1. 뜻밖의 횡재…"내가 필리핀 보내 줄 게"

 필리핀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나는 필리핀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한 번 갔으면…", 하고 말했더니 “그럼 한 번 가, 내가 보내줄 게.”하는 친구가 있었다. ‘한・중수교전입국자모임’ 진원근 회장이었다. 나는 그냥 시물시물 웃었다. 가고는 싶어도 억지로는 싫었다. 그런데 진회장은 정색을 해서 “정말이란데…” 하고 정중한 기색을 지었다. 쉰다섯의 강파른 사내는 거짓말을 몰랐다. 목소리가 높고 직통배기이다.

  ▲ 마닐라 광장 공원에서

3월1일, 출국 날짜가 되자 나는 짐을 꾸려서 출근했다. 정말 필리핀을 가게 된 것이다. 여권에 붙여진 필리핀 비자는 영어글씨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어를 모르는 자기가 국어(國語)가 영어인 나라로 간다고 생각하니 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5시, 일행 24명은 서울조선족교회에서 회의를 가졌다. 윤완선 목사와 사모님이 함께 동행을 하게 됐다. 그전에 벌써 두 번이나 갔다 온 중국동포들이 있다. 한・중수교전에 입국하여 17년 이상 고국에서 불법으로 살다가 이번에 합법체류비자를 발급 받기 위해 중국, 또는 제3국으로 출국했다가 입국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했었다. 한국 법무부는 그들의 생활기반이 이미 한국에 있고, 중국에 돌아가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거의 다 소실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그들에게 G-1비자를 내주고, 입국하면 다시 H-2-D비자로 바꿔주기로 했다. 초기에 법무부는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초청을 받고 입국하게 되면 규제는 없애준다는 정책을 내놓았었다. 그리하여 서울조선족교회와 수교전입국자들은 거의 한달 간 농성(서경석 목사 25일 단식)을 벌여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물론 법무부가 최종, 인도적인 차원에서 수교전입국자들에게 합법적인 체류권리를 보장해준 것은 너무 잘 한 일이었다.

“한국에 와서 20년 가까이 불법으로 살면서 맘 놓구 어디 관광도 못 다녀봤고, 더구나 출국은 엄두도 못 내셨겠는데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이번에는 맘 놓고 외국관광 갔다 오세요. 인생의 향수를 누려야지요. 수교전입국자 여러분은 충분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있구말구요.” 하고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소장 이호형 목사가 말했다. 작년 5월부터 지금까지 수교전입국자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해 왔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 저녁, 어둠이 깃드는 마닐라 풍경

일행은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는 외국으로 관광 간다는 실감이 묻어있지 않았다. 법무부에서 갔다 오라고 하니 가는 것이겠거니, 하는 덤덤한 표정들이다.

“자자, 김치~, 웃어요.” 하고 내가 소리쳤다.

플래시가 번쩍 터졌다. 한결 밝아진 얼굴들이 카메라 스크린에 들어 왔다.

떠나기 전 저녁식사는 어유도 횟집에서 했다. 알탕에, 남자들은 소주 한잔씩 거치고, 금방 출발시간 여섯시가 됐다. 대형 전용 버스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 짐 갖고 출발해요!” 하고 진원근 회장이 외쳤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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