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렬 기자

인천공항을 가는 전용버스는 공항버스가 다니는 도심을 거쳐 가지 않고 인천공항고속도를 타고 있었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길을 수 십 번 다녔지만 이 고속도를 타 보기는 처음이었다.

   ▲ 머나먼  필리핀 수도 마닐라, 길거리에 서서
‘한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경인운하’,  바로 그 건설현장이 보였다.

나의 뒷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장관이네. 이삼년 후이면 서울과 경기도 김포시, 부천시, 인천시 굴포천의 한강을 잇는 18키로미터 뱃길이 완공된 데. 용산 사이까지 항로가 트이고 국제여객선이 정박할 터미널이 놓인 데요.”

“그래, 우리도 이제사 바다로 나간다. 바다 위를 날아…나는 19년만이다. 허허.”하고 얼굴 쓰다듬는 사내는 쉰이 넘어보였다.

나는 놀라지 않아도 될 것을 놀라했다. 19년 동안 이 좁은 남한 땅에서, 한 번도 출국하지 않고 살았단 말인가? 정말 불가사의한 일 같았다.

고속도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수교전입국자들은 이상하게 침묵을 지켰다.   간간히, 아무런 쓸모없는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법무부에서 추방령이 떨어졌을 때 나는 그들을 취재하면서, 정말 아픈 인생들에 가슴 울먹거렸던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 일행을 싣고 갈 필리핀 비행기 5j-135
헤룽쟝 대평원의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서 자식 둘을 떼어내고 기차에 오른 삼십대의 여인이 있었다. “엄마 언제와?”하고 대여섯살 되는 애들은 기차를 따라 달렸다. “잘 있어, 엄마 이삼년 돈 많이 벌어 올게, 공부 잘 해야 돼!”하고 엄마도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러던 부모자식간의 리별은 18년 이상이 됐다. 애들은 장성해서 제 마끔 중국대륙 어디론가 떠돌아다니고 부모인 그녀는 매일 저녁 그리움을 달래며 울다 잠이 들곤 하였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노래방에 들어가 혼자 볼륨 크게 틀어놓고 정신없이 울며 노래 부르며 탄식을 하다가 나오곤 했다. 그러다 이제는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벽을 타다가 떨어져 허리도 쓰기 힘들게 됐다. 남편은 집을 나가 어디에서 사는지도 모르고, 고향에는 일가친척도 없다.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돌아가 먹고 살길도 막막하다. 그래서 그녀의 외로움은 계속된다. 간혹 불법체류 단속하러 나온 경찰이 나오면 그녀는 아직도 가슴이 후둑후둑 뛴다. 언제인가 병원에 갔더니 심장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녀는 단속기간이 길어지면 몇 달씩 집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벌어놓은 돈도 별로 없다. 이웃이 조선족 불법체류자라고 고소할까봐 이웃과 말도 하지 않고 지낸지도 십 몇 년이다. 그녀는 이 사회에 버려진 대표적인 고독한 동포여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수교 전 입국자 모두가 누구에게 호소하기 힘든 아픔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출국했다가 입국을 하게 되면 법무부에서는 방문취업제 비자(H-2-D)비자로 바꿔주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인생역사는 새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이다. 공항의 규모도 그렇고 공항디자인도 그랬다. 다들 세월의 무상함에 탄식을 내뿜었다. 한국에 입국할 때 그들은 거의가 홍콩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입국을 했고, 배를 타고 인천바다로 입국했던 것이다. 세계 1류의 인천공항의 규모와 디자인은 정신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였다.

일행은 탑승수속입구 근처에 모이어 잡담을 늘어놓았다. 한동수(남‧57)씨와 이춘근(남‧44)씨의 말에 나는 시선은 그들이 끌고 온 여행가방 트렁크에 가 멎었다. 한동수 씨는 고리가 약간 고장 난 은빛드링크를 갖고 왔고 이춘근 씨는 녹색 트링크를 끌고 왔었다.

“이래 봐도 이 가방은 18년 만에 처음 외출을 해요.”하고 한동수씨가 말했다.

“18만에 처음이라니?”

“18년 전에 중국 간다고 사놓은 가방이, 내가 중국 못 가게 되니 천반 위에 처박아두고 지냈으니까. 이제야 해빛을 보게 된 거지.”

“허허, 내 가방도 그런데…17년 됐어요. 가방 싸서 우리 아버지와 인천부두로 갔었는데 마침 집으로 돌아가는 흑룡강 가목사시의 한 처녀를 만났어요. 그 처녀가 내보고 왜 돌아가려구 그러냐. 어지간하면 여기 남아 돈 버는 것이 낫다고 해서 결국 아버지만 보내고 나는 여기 남게 됐어요. 후에 들어보니 우리 아버지를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하던군요.”

“그럼 그 처녀가 당신 인생을 바꾸어놓았네? 허허.” 하고 누군가 웃었다.

작은 가방 하나에도 인생의 희노애락이 들어있는 셈이다.

▲ 심사대를 빠져나오다

출국심사대를 지날 때 여권을 검사하던 직원이 일행을 잠깐 멈춰 세웠다. 입국한 기록이 없는데다가 출입국관리국으로부터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위에는 긴장한 순간이 흘렀으나 문제는 인차 해결됐다. 일행 모두가 발급 받은 사증발급인정서 코드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공항 심사대를 지나면 탑승구 사이공간은 국제 자유지대이다. 한국에서는 떠나보낼 준비를 마친 상태이고 손님들은 한국 출입국의 통제를 벗어나 제3국지대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마친 생태이기 때문이다. 일행은 그제야 면세점을 돌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필리핀에 가서 며칠 있는 동안 임시 쓸 물건과 귀국할 때 갖고 올 면세 담배 등을 샀다.

인천공항의 밤은 아름다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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