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중국·러시아의 문화가 뒤엉킨 '변두리의 땅'
어마어마한 석탄 발견되면서 발전했지만
해체되는 조선족 농촌사회 쓰나미 못피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조선 중국 러시아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도시 훈춘의 시가지. 갈 때마다 분홍빛 노을이 아름다웠다.
연길에서 도문 지나 훈춘에 가자면 가파른 협곡의 두만강변을 지나야 한다. 옛날에는 그 사이에 험난하기로 이름난 까울령 고개가 있어서 다니기가 매우 불편했다 한다. '언제면 까울령고개를 넘어 세상 구경을 할까'며 탄식하던 고개가 훈춘에 어마어마한 석탄이 발견되면서 기차길도 놓이고 길도 넓게 뚫렸다. 하지만 훈춘은 아직까지 호랑이가 출몰하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변방지역이다.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때는 러시아군(軍)의 침입로가 된 곳이며, 한때 러시아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영토 분쟁의 전쟁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청국(淸國)과의 조약 때 그 동부를 러시아에 할양하는 바람에 바다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것은 중국 쪽에서 보면 통한의 역사였다. 바다 쪽으로는 땅 한 뼘도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한때 두만강 하구의 땅 방천에 가기 위하여 러시아 땅을 빌러 가기도 했고, 지금도 속초에서 훈춘 가는 카페리는 러시아 땅을 빌려서 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훈춘은 러시아, 조선, 중국의 문화가 뒤섞여 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자세히 캐보면 중국도 만주족과 한족의 문화가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한자 이름이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혼춘'인데 모두 '훈춘'이라 한다. 중국식으로 다바툰(大八屯)이라고도 하지만 중국사람들도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은 드물다.

'훈춘'은 만주말로 '변두리의 땅'이라는 의미도 있고, 여러 강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훈춘에는 특히 만주식 지명이 많다. 마띠따(馬滴達), 하다먼(合達門), 미쟝(密江), 루텐(魯田)…. 이런 만주족 지명들을 한족들은 한자로 음차해서 불렀다. 뒤에 조선족들이 건너오면서 다시 한자를 조선식으로 마적달, 합달문, 밀강, 로전 등으로 불렀다. 만주어에 '마띠따'는 뾰족하다는 뜻이고, '하다먼'은 언덕, 미쨩은 화살, 루텐은 늪이란 뜻이다.

훈춘은 분홍빛 도시다. 나는 그 분홍빛에 취한 적이 몇 번 있다. 이상하게 그곳에 갈 때마다 바로 가지 않고 꼭 중간에 도문이나 향파촌 같은 데 들러서 한잔을 걸치다보니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때쯤이면 가는 길 끝 쪽으로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훈춘 가는 것이 일부러 노을을 보러 가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실 훈춘의 노을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평지가 넓은 탓으로 하늘이 넓고 그래서인지 왠지 노을빛이 다른 곳과 달리 분홍빛을 많이 띤다는 것, 그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그것 때문인지 훈춘 시내 건물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이상하게도 분홍색으로 도색한 건물이 많아 보였다. 아무튼 내가 처음 훈춘에 갔을 때 도시는 하늘과 땅 온통 분홍의 세상이었다. 게다가 술기운까지 절인 내 눈 속에는 마치 동화나 꿈속의 도시 같았다.

훈춘에는 분홍빛 노을처럼 인생의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고 있는 김동진 시인이 있다. 김동진 시인을 훈춘의 명물인 만두집에서 만났다. 그는 흑룡강성 영안 사람인데 말년을 훈춘에서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 그런 자신을 가리켜 "발해는 흑룡강성 영안(상경-용천부)에서 발현해서 훈춘에서 망했다"며 자신과 발해의 운명이 닮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노년에 연길 같은 도시에서 편하게 살지 않고 변방 시골인 훈춘에 사는가'라는 내 질문에 "인정이 많고, 순수하기 때문"이라면서 시집 한 권을 내밀었다. 그의 시집에서는 조선족 농촌 사회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의 시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내음이 떠나버린 개바자는

오붓하다는 맛깔스러운 고유어가

가난 앞에서는 더 오붓할 수 없다는

서글픈 증언의 패말로 남아

바라보는 사람의 눈알을 아리게 한다.


해체되고 있는 조선족 농촌사회의 쓰나미가 훈춘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강바닥은 갈라터지고, 여울소리 울리는 언어가 사라지고, 사람내음이 떠나가버린. 조선족 농촌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훈춘을 마냥 분홍빛의 아름다운 노을로만 생각하는 나의 철부지함을 나무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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