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은 잘 보냈니?" 

3월 내내 연길을 가로지르는 부르하통 강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세게 부는 연길에, 봄은 청명이(4월5일 전후) 지나야 온다고 하던데, 연변에 “드디어” 봄이 왔다. 청명절에 한족들은 돈을 태우면서 복을 기원하고, 조선족들은 조상의 산소를 찾는다고 한다.
 연길의 젊은이들 모임에서 만난 재희가 청명절에 화룡에 있는 본가에 함께 가자고 제안해, 난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청명 전날, 연길에서 화룡으로 가는 시외버스의 예매는 이미 끝났다.  그래서인지, 아침 6시에도, 차안은 서서 가는 사람들로 아주 복잡했다. 버스 안에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큰 삽을 가지고 올라탔다.
 청명이구나. 만원인 버스 안에서,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두 조선족 아주머니는, 그동안 한국에 갔었네, 소련에 갔었네, 누구네 집은 한국에 다녀와서 돈을 많이 벌었네, 망했네, “이제 한국 가는 건 별로 멋이 없제” 등등의 이야기를 내내 나누었다. 

4월 5일 청명절을 맞은 재희의 집

▲ 청명, 그리움은 더 짙어지는데...
재희네 집은 화룡시내에서 좀 더 들어간 농촌 변경마을이었다. 재희는 연변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연길의 한 개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호기심 많은 친구이다. 농촌 변경마을에서 몇 명 안 되는 대학생 중의 하나인 재희가 마을에 들어서자, 재희는 마을 사람들과 총총 인사를 나누었다. 마을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인지, 재희는 그들을, “삼촌”, “맏아바이(큰아버지)”, “아매(할머니)”,“아재(숙모)” 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마을자체가 일종의 확대된 가족과 같았다. 재희네 집에 도착하자, 우리(재희, 어머니, 재희 삼촌, 재희 사촌)는 어머니가 준비한 삶은 쇠고기, 돼지고기, 과자 등을 성묘 음식으로 싸가지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소로 올라갔다(한국과자 꼬깔콘과 자갈치가 제사상에 오르는 것은 내게 새로워 보였다). 마을동산에 모여 있는 산소들 주변에는, 흙을 더 얹거나, 잡초를 뽑거나, 산소를 가다듬고, 조상들에게 절을 하는 가족들로 붐볐다.
 성묘가 끝난 후, 재희 어머니, 외숙모, 삼촌이 점심상에 둘러 앉았다. 아버지가 작년에 한국에 가신 이후, 재희는 연길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화룡 농촌 집에 내내 혼자 지내신다. 재희가 고중 1학년 때 어머니가 당뇨병 진단을 받은 이후, 어머니의 치료비와 재희의 대학교 등록금 걱정에 아버지는 계속 한국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운이 닿지 않아서인지, 아버지는 한국에 “시집간” 조카의 초청으로 한국행 시도 7년만에 한국에 가게 되었다. 재희가 대학에 다니는 내내, 부모님은 1년 농사 수익의 전부를 재희의 등록금을 지불하는데 사용했고, 농사 이외의 여러가지 장사들도 겸하면서 농촌생활을 어렵게 버텨 왔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난 이후, 몸이 약한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짓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넘겼다

한국에 간 가족, 외삼촌과 아버지

재희 어머니의 남동생(외삼촌)도 한국에 간지 7년째이다. 외숙모는 불법체류자가 된 외삼촌이 보내오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7년간 지내오고 있다. 화룡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외숙모는 외삼촌에게 “차라리 확 붙잡혀 와라”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삼촌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은 외숙모의 몸과 맘을 더 아프게 해 왔다.
 “니네 삼촌 때문에 내가 이렇게 늙었다”.
 혼자서 딸을 키우면서, 외숙모는 돈 뿐만 아니라, 외삼촌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려 왔다.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은 아버지 형제 중 가장 똑똑하다. 삼촌은 공부를 잘해,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신용합작사(은행)에서 일하다가 10년 전 화룡 시내로 이사 했다. 숙모는 한국에 간지 10년이 되었고, 서울에서 어떤 재벌집에서 입주 가정부로 일한다. “4층집” 재벌집을 오르내리는 게 힘든 것을 빼고, “일없다”(“별다른 불만이 없다”의 연변어투). 숙모가 벌어 보낸 돈으로, 삼촌은 시내에 널찍한 아파트를 마련했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또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숙모 없이 10년째 살아온 삼촌은 아들도 잘 보살피고, 음식도 잘하고, 떡도 잘 빚을 수 있다.

▲ 재희네 가족은 청명을 맞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했다. 위 사진을 보면 성묘음식으로 한국과자 꼬깔콘과 자갈치를 놓고 술을 따르는 재희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깊다. 사진=권준희

 점심상에 둘러앉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파트너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세 사람 모두 방문취업제를 위한 한국어 시험을 쳤거나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남편과 아내를 만나기 위해 “쉽게” 여행으로 갈 수 있는 “고국”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거나, 특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갈 수 있는 노무를 위한 나라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세계 금융위기에도 꿋꿋이 버티고, 중국 위안화가 한국 원화에 절대 강세를 보이게 되면서 한국에 가는 건 더 이상 “멋”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 농촌의 풍요로운 먹거리와 여유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가는 “티켓”을 얻기 위한 방문취업제 시험은 계속되고, 추첨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여전하다. 어머니는 돋보기를 대고 예상문제집을 훑어본다. 외숙모는 사설학원에서 방문취업제 관련 특강을 이미 들었다.
 삼촌은 작년에 “당첨” 되지 않았다. 조선족들이 방문취업제 시험을 통해서, 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한국에 갈 수 있는 희망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의 식목일에, 중국의 청명을 생각하면서, 재희의 아버지는 술냄새 나는 목소리로-“청명은 잘 보냈나”-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가깝지만, 아주 먼 곳, 그리고, 누군가는 쉽게 갈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주 가기 힘들다는, “한국”에서 쓸쓸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권준희 : 듀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한국인 유학생 / 중국동포타운신문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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