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는 조선족 만나본다 (14)

한국에서의 15일간은 눈깜짝할새에 지나간것 같다.

보름동안이란 비록 짧은 시간이고 이 시간동안에 한국의 많은것들과 깊은것들을 리해하고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날이 갈수록 이 나라,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조선족들의 한국에 대한 느낌과 감수도 차근차근 깊어지고 인식되는것일것이다.

분명 이국타향이면서도 멀어보이지는 않는 곳, 그것은 거리마다 눈에 익은 조선글 간판과 사람마다 주고받는 한국말이 보고 듣고 느끼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고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일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느끼는것은 이 곳이 우리와는 체제와 리념이 다른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일것이다. 또 한국거리의 난해한 영어표기글과 한국사람들 언어의 특이한 억양 그리고 그 영어표기글들과 억양에 쉽게 다가갈수 없는 조선족 이것은 똑같은 글과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이질적인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가?!

한국에서 많은 조선족들은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하층일수밖에 없다. 한국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고 그들과 수준맞는 대화를 나눌수 없고 매너며 문화며 수양에 옷매무시까지, 우리는 우리보다는 더 우월하고 세련되여보이는 한국사람들에게서 거리감과 차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과 차이감은 혹은 비굴함으로 혹은 폭발적으로 혹은 경멸과 무시로 다양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확하다. 한국사회는 동정심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를 련민하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자세와 설자리는 무엇일가?  처신에 맞는 자존심은 세우고 쓸데없는 자비감은 버리라는 말로 개괄하고싶다.

영덕대게를 가지고 오겠으니 작별술이나 마시자던 친구 광호가 밤 9시 30분이 다 되여서야 련락이 왔다. 의정부에서 일이 끝나 다시 집에 보낼 짐을 만들려고 포천까지 갔다오느라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고 했다. 차라리 밖에서 한잔 하잔다. 뱅뱅사거리에 있는 회집으로 갔다.

농어회를 시키고 카스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회도 푸짐했고 신선해서 입맛이 깔끔하고 좋았다. 그동안 영실이가 일이 바빠서 그런지 전화 한통 없어 서운했다. 전화 한통 할새없이 바쁜게 한국생활이라고 광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새벽 1시까지 늦도록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6시에 자명종이 자지러지게 울리는 통에 잠에서 깨여났다. 광호가 출근을 위해 일찌감치 새벽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새벽어둠속으로 일에 쫓기듯 달려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와 다시 잠자리에 누우면서 다시 재잠이라도 잘수 있는 일상의 새벽잠자리가 왜 이렇듯 따뜻하고 소중해보이는지 모르겠다.

아침을 먹고 누님과 함께 귀국하려고 공항으로 나오는데 녀동생이 오빠한테 아무것도 못해줬다면서 따라나와 미안해한다. 인천공항에 나온 후에도 속에 그냥 걸리는지 전화를 해왔다. 동생한테 뭘 바랄게 더 있겠는가? 녀동생도 아직 한국나온지 얼마 안되여 돈고생이 심한것 같아 그 애가 극구 비행기표를 사주겠다고 하는것도 밀막아버렸다. 이후 돈 많이 벌면 그때 도와줘 하고 위안하고는 건강조심하고 꼭 신체 건강히 한국생활을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건강만큼 소중하고 값진것이 이 세상에 어디 더 있을가? 

누나가 배웅해준다면서 반날 말미를 맡고 나왔다. 요즘 참 나때문에 너무 수고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해주랴, 빨래하랴, 서울구경시켜주랴, 참 송구할따름이다. 그런 누나가 있었기에 한국생활이 서먹하지 않았고 의외로 잘  적응하며 좋은 인상을 남길수 있었던것 같다. 친족들의 배웅은 탑승구까지이다. 탑승구 저쪽에서 동생을 떠나보내면서 누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리별이란 참 이상한것이다. 가슴이 야릇하게 젖어들었다. 한국에 떠나갈 때도 가족들의 리별은 아프더니 한국에서 돌아올 때도 리별은 역시 아팠다. 그것은 나는 그래도 편안한 중국의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한국에 남겨져있는 내 친지들은 아직도 기약 모를 고달픈 한국생활의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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