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희의 연변일기<12>

습관화된 욕망 “더 잘 살기”:

연변과 조선족은 중국 개혁개방의 흐름에 변화중, 적응중

퇴직 老간부로부터 듣는 중국 개혁개방후 용정의 변화상을 짚어본다.

 노동력의 국제적인 이동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노동력을 밀어내는 힘”과 “노동력을 당기는 힘”과의 상관관계들을 밝히고자 한다. 즉, 인구집단이나 국가 간의 노동인원의 차이, 임금의 차이, 또는 노동환경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인구이동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중국의 조선족들은 왜 특정한 시기에, 한국으로의 “월경”을 시도했고, 아직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한국은 그 많은 조선족들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나는 용정에서 두 명의 “노간부”들을 만나면서, 이 단순하고도 오래된 질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월경”에 대한 시도는 1980년대 본격화된 중국의 개혁개방의 실시와 함께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연길은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버스, 택시, 그리고 자가용들로 도로는 분주하고, 높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공사중이다. 반면, 용정은 삼륜차들이 길거리에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띠엔티로우(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건물)는 손꼽아 셀 정도로 한적한 도시이다.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 용정에서 만난 1930년대 중반인 박노인과 최노인은 길을 걷는 도중 내내, 지인들에게 인사하며, “언제 한국에서 왔는갚, “돈은 많이 벌어 왔는갚 등의 장난 섞인 안부를 물었다.

중국어가 기본상 필요 없었던 용정

공무원으로 퇴직한 노간부인 박노인과 최노인의 부모님과 일가족은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반도인 함경도에서 중국인 용정으로 이주해왔고, 비슷한 또래인 이들은 1930년대 중반 연변 용정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만주국의 일본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 두 노인은 지금도 일본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한다. 1945년 해방 전, 두 노인은 조선(맥락상 식민지 조선)의 유행가들을 부르고, “애국갚를 부르고, “태극기”를 그리면서, 만주에서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이 개간해서 터를 잡은 연변에 한족들은 지금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박노인은 문화대혁명 이전(1966년 이전)의 용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용정에서는 한어를 기본상(보통) 안 썼다. 우리가 회의를 해도, 조선말로만 하고. 한족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구석에서 ”소번역(옆에서 조선사람 한명이, 간간이 번역을 해줌)”으로 회의를 이해했다. 난, 그때까지도 한어를 못했다. 문화혁명 때 모주석 어록(모택동어록)을 읽으면서, 그때, 한어를 배운 것이지. 다 조선사람 뿐인데, 한어가 굳이 필요없제. 문화대혁명 시기를 전후해서, 한족들이 많이 들어오고, 문화대혁명 이후에야, 한어를 세게(많이) 쓰게 되었제“

장마당경제 등장(80년초)

 1978년 개혁개방과 함께 연변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의 집체호에서 개체호로의 전환(인민공사 관할하의 집단 생산체제에서 개별농가 생산체제로의 전환), 장사꾼들의 등장(나물장사나 두부장사들의 등장), 본격적인 “장마당 경제”(시장에서의 물물판매)의 시작, 그리고, 이에 따라 현금의 수요와 저축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만원호(개별호의 수입이 만원 이상)”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개별가정의 경제적인 수준의 차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북조선(북한: 이하 북조선으로 기재)에 있는 가족들과 교류가 재개되고, 보따리 장사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게 되면서, 북조선을 통해서 수입된 일본산 텔레비전이 연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재일동포들의 물건이 북조선으로, 다시, 북조선에서 연변으로 유입된 것이다. 당시, 연변에서는 한족에 비하여 조선족 가정에 텔레비전 보급률이 훨씬 높았고 생활수준도 높았다고 이 노인들은 회상했다. 도박의 흥행과 “기생집”(맥락상 매매춘)의 증가 등 중국의 개혁개방은 각 방면에서 연변의 조선족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연변의 공장들에서의 감원과 부도가 꼬리를 이으면서, 수많은 공인들은 실업자가 되고, 연변에서 일자리를 찾기는 더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조선족들은 연변이라는 집거지를 떠나, 어디론가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은 중국 전체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연변, 특히 용정을 ”중재지구“ 만들었제. 

공장은 망하고, 조선족들은 다 흩어지고.

돈 번다고 다 한국에 가서 일하고 있고. 언제 같이 살날이 오려나”.

 나는 박노인, 최노인과 함께 이러한 개혁개방의 과정들을 짚어가면서 연변, 특히 용정의 변화에 대한 의미있는 “학습”을 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나는 개혁개방이 연변과 조선족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 노인들의 안타까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노인은 중국 개혁개방에 대한 양면적인 성과를 지적했다. “개혁개방은 중국 국가의 전체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연변, 특히 용정을 ”중재지구“(엄중한 재해지역)로 만들었제. 개혁개방으로 공장은 망하고, 조선족들은 다 흩어지고. 그리고 내 가정도 ”중재가정“이 되었제. 돈 번다고 다 한국에 가서 일하고 있고. 언제 같이 살날이 오려나”. 하지만, 두 아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최노인은 의견을 달리했다 “여기 일자리가 없는데 어쩌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어디든 가서 잘살게 되면 되는 거지, 뭐 꼭 같이 살아야 하나”

 40년 전,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에서는 한어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현재의 연변에는 한어를 모르고서는 생활하기 쉽지 않다. 40년 전, 이 두 노인들은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공작”(사업 및 활동)을 했지만, 현재 연변에는 한족이 조선족(http://baike.baidu.com/view/69882.htm#7에 의하면 연변인구의 36%)보다 더 많다. 한족들이 연변으로 이동해오고, 개혁개방 이후, 많은 조선족들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갔다. 내가 만났던 많은 조선족들은 말한다. “더 잘살기 위해서 떠난다”고. 이 짧고 단순한 문장의 뒤에는 30년 개혁개방의 역사 속에서 조선족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빠른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치열함이 배여 있다. 조선족 “노동력을 밀어내는 힘”은 개혁개방의 흐름 속에서 습관화된 “더 잘 살기” 위한 개인적인 욕망과 함께 개혁개방의 제도적, 문화적인 장치들이 복잡하게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연변도, 조선족도, 개혁개방에 흐름에 계속 변화중, 적응중이다.

권준희 : 듀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한국인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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