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삼과 중국문화풍경

‘궁칙변 (窮則變) 변칙통(變則通) 통칙령(通則灵)’
궁지에 몰리면 변화를 꾀어야 하고, 변화가 있으면 통하기 마련이고, 통하면 여유가 생긴다.

글깨나 읽은 중국사람 치고는 모를 수가 없다. 늘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모오저뚱(毛澤東-모택동) 전 주석이 입버릇처럼 외웠던 글발이다. 아마 모우의 이런 사고패턴이 호두(好斗)하는 그의 성격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기실 이 말은 모우의 발명은 아니다.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처럼 주역 공부를 통하여 주역사상을 익히는 것 아니다. 많은 중국인은 주역을 읽지 않는다. 주역의 사상은 평소 무의식적인 전파를 통하여 보통 백성에게 뿌려지지만 그 생명력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궁지에 몰리다.’- 중국인에게는 딱 맞는 표현이다. 그들 삶의 가장 생동한 역사의 표현이라 할 수도 있다. 늘 궁지에 몰려 쫓기고 허덕이고 굶주리고, 또 억압 받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 참 말이 아니었다. 외적에 몰리지 않으면 외족에 밀리고 그렇지 않으면 내전이 일고 자연재해에 쫓기고 늘 궁지의 몸이었다. 나라가 그 신세이니 백성도 따라갈 것이고 그러니 변화, 탈출의 꾀여야 했다. 살려고 하니 늘 머리를 짜가며 살길을 가늠해야 하고, 좋은 표현으로 말하면 지혜가 생기고 나쁜 표현을 쓰면 음모가 생기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신세라 정당한 수단으로는 상대를 이기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명백한 일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궁지에 몰리지도 않을 것이고.화자는 지금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한국 사람은 대체로 곧은 성격이다. ‘하면 한다,’ ‘망하더라도 밀어붙인다.’ ‘한번 뺀 칼은 도로 집어넣지 않는다. 호박이래도 내리 찍어야지’ 하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살펴보면 대개 궁지에 몰린 상황은 아니었다. 모종의 ‘자존심’, 또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자아희생이다. 내란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상대나 제3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과의 다른 점이 뚜렷한 것이다.


사유의 방식은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궁지에 몰려야만 그렇게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때도 한국인과 다른 그런 사유가 몸에 배인 것이다. 중국인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주역의 뜻에 따라 사유한다고 느끼지 않아도 그렇게 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중국 사람과 보통 5-6년, 길어서 10여 년을 접촉한 한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느끼지 못할 것이고 설상 알고 느낀다 할지라도 그것을 한국인의 몸속에, 한국인의 냄새로 바꿀 수는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타민족의 문화가 내 몸에 배이게 하려면 우선 그 민족의 더러운 점, 악취까지 피부에 와 닿고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면 그 민족의 우수성이 혜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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