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독일의 개인주의와 한국의 가족주의

현재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삶의 가치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주의란 ‘개체로서의 개인이 사회보다 선행하여 실재’하며, ‘인생의 가치와 권리 측면에서 개인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정의가 가장 일반적이다. 개인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 유럽에서 태어난 사상 및 삶의 가치관이며, 개인과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유럽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현재 유럽사회에서 삶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대적 개인주의는 유럽의 종교와 학문적 유산, 문화·전통적 인소들이 융합되어 오랜 세월의 시련과 투쟁으로 이뤄진 것이다. 독일사회에 고착된 개인주의는 개인의 존재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반면 가족 관념은 담백하며, 이는 한국사회에서 신성시되고 있는 가족주의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 독일 남부도시 휘센에서

  가족주의란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개개의 가족성원보다 중시하고, 가족적 인간관계를 가족 이외의 사회관계에까지 확대·적용하려는 사상’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삶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한 가족주의는 그 자체의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는 반면, 사회적 문제로서의 가족이기주의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충(忠)과 효(孝)를 기반으로 하는 동양의 유교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외세의 침략과 문화적 압력 속에서도 고유의 정체성과 생활문화를 지켜왔고, 가족을 토대로 하는 민족공동체를 지키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 가족주의는 ‘합리적 계약관계’를 위주로 하는 서구 가족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가족은 곧 혈연공동체를 의미하며, ‘나’를 포함해 ‘우리’를 강조하는 가족이기주의는 배타성을 내포한다. 전통적 가족주의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확대되었고, 이 집단 외부의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

  독일의 개인주의와 한국의 가족주의는 두 나라의 국민성과 근본적인 사고방식 및 가치관의 차이를 형성하고 있다. 독일인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 보장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특징이라면, 한국인은 개인보다 가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면서도 타인과의 어울림과 공동체적 관계를 중요시한다. 한국인은 가족과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나’의 존재보다 ‘우리’를 강조하지만, 독일인은 개개인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우리(가족)’보다 ‘나(개인)’를 우선시한다. 독일에서는 자녀가 18세가 되면 부모가 그들의 생활에 별 간섭을 하지 않지만, 한국부모들은 자식들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면서 ‘가족의 의무’를 다한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에서도 ‘가족과 가족 간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적 사고와는 달리 독일인들은 결혼당사자의 만남과 의견을 중요시한다. 퇴근 후에는 회식 등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한국문화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퇴근 후에는 개인시간으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독일에는 저녁 늦게까지 영업하는 식당이 매우 적은데, 이는 늦은 밤까지 영업하는 식당이 많고 서비스와 배달문화가 발달한 한국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다. 독일인들은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남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생활하는 반면, 외로움과 ‘정’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현재 외로움과 고독은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사회의 ‘국민병’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인은 가족의 끈끈한 정 속에서 공동체의 매력을 느끼며, 그것을 삶의 원동력 및 동기부여로 간주한다. 요컨대 우리의 인생에서 ‘나’ 위주의 개인주의와 ‘우리’를 중요시하는 가족주의 간의 단점은 상호 보완하고, 그 장점은 적극 발휘시키는 ‘상부상조’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8. ‘라인강의 기적’, EU의 중심국가

▲  라인강변에서

  한국에 유명한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독일에는 ‘라인강의 기적’이 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1960~80년대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을 서울중심을 흐르는 한강을 통해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로,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라인강의 기적’에서 유래된 것이다. 독일의 대표적 강이며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라인강은 이웃국가들 간의 정치통합과 문화적 융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세기 후반 근대산업의 발달에 따라 라인강의 물동량은 더욱 증가되었고, 라인강의 운송업은 독일의 산업과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 라인강의 운송업은 독일물류의 20~30%를 차지하며, 독일의 경제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라인강변을 몇 시간 동안 달리면서 필자는 ‘푸르고 깊은’ 라인강에서 물자를 싣고 쉼 없이 달리는 대형 바지선들을 목격했고, 따라서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의 유래를 다소 알 것 같았다. 현재 라인강은 양안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중류구간에는 강의 구비마다 가파른 암벽과 우뚝 솟은 성(城)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 1980년대의 (중국)개혁개방에 ‘작은 거인’ 등소평이 거론되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라인강의 기적’을 창조한 주요한 공신으로 두 사람이 거론된다. 그들이 바로 독일 현대사에서 ‘거물급 인물’로 인정받는 독일(서독)의 초대총리 아데나워와 그가 수상으로 재위하던 기간 경제장관으로 재직했던 에르하르트(후임총리)이다. 1949년 9월 자유시장경제를 경제발전의 지도방침으로 내세운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탁월한 리더십 하에 ‘경제전문갗 에르하르트는 14년간 경제장관으로 있으면서 독일경제의 부흥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 독일은 비참한 패전국으로부터 유럽경제 질서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고, 현재 프랑스와 함께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주도함으로써 유럽연합(EU)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50년대 서독은 산업인프라를 복구하고 경제재건의 기반을 마련해 선진국대열에 진입했고, 1960년대에는 경제규모 확장 및 현대화를 통해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에는 현대적인 복지국가의 건설을 완성하고, 국제적으로는 유럽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 7월 동서독의 경제화폐통합은 서독 마르크를 단일통화로 채택했고, 동독경제를 서독의 시장경제체제로 흡수했다. 동서독일이 통일된 후 동독주민의 복지혜택과 동독지역의 환경복구 및 낙후한 기간시설 재건 등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지만, 현재 동독의 경제발전은 서독의 80~90%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1990년 ‘분단의 상짱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후 동서 간 이념과 경제발전 차이가 기본상 극복되었고, 통일독일은 유럽공동체(EC) 국민총생산 25%를 차지하는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현재 유럽 최다의 인구대국(8천2백여만)이며 EU의 중심국가로 발전한 통일독일의 현황은 남북으로 분단된 한(조선)반도에 주는 계시와 시사점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작금의 독일사회에는 여러 가지 내부갈등과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들이 상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동서독의 주민 간에 잔존하는 이질감과 문화적인 위화감, 구동독인의 상대적 빈곤감과 사회체제가 서독화 과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등은 통일독일의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동유럽의 민주화 이후 그 지역 독일인들의 역이민도 내부갈등을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난민문제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독일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최근 독일사회에 고착화된 개인주의 ‘병폐’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저출산·고령화는 유럽의 최장수국가인 독일의 사회문제로 부상했으며, 이는 향후 독일정부가 해결해나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이다.

  9. 온고지신, 유대인 강제수용소

▲ 뮨헨, 유대인 강제수용소

 6월 2일, 필자는 뮨헨 근처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견학하면서 히틀러와 나치의 극악무도한 파쇼적 만행을 실감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로서 최초로 개설된 곳이며, 뮨헨 북서쪽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다하우의 군수품 공장 대지에 세워졌다. 1933년 6월에 개설된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가톨릭중앙당과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연립정권에 의해 세워졌고, 공식적인 명칭은 ‘정치범 수용을 위한 강제수용소’였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그 후 독일전역에 새워진 수많은 강제수용소들의 원형이 되었다. 개설 후 30여 개국의 20만 죄수들이 다하우에 수감되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함께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한 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 상징이다.

  독일 최대의 강제·집단학살수용소는 폴란드 부근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다. 1940년 4월 히틀러의 명령 하에 건립된 ‘아우슈비츠 1호’에는 주로 폴란드와 독일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특히 1941년 10월에 건립된 ‘아우슈비츠 2호’는 가스로 죄수들을 처형하는 ‘목욕탕’과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시체보관실’ 및 ‘화장막’을 갖춘 대규모의 집단 처형소로 개발되었으며, 이는 히틀러가 유럽 유대인들을 멸종시키기 위한 ‘최후의 해결책’이었다. 1942년 5월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3호’는 당시 대규모의 화학합성고무농장에 노동자들을 공급해주는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선별’된 젊은 남자와 여자들은 무조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고, 강제노동자들 중 과로와 질병 및 굶주림 등으로 허약해진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제거되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사망자 수는 보통 150~250만으로 추산되지만, 최대 400만에 이른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다하우 수용소는 생체실험이 실행되었던 강제수용소로 유명하며, 수감된 죄수들을 의학실험에 사용하기 위해 최초로 실험실을 세운 곳이다. 현재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17만㎡의 수용소 자리에는 2채의 단층건물과 60여 채의 수용소 건물이 남아 있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이 겨우 3만2000명이었고, 고문과 영양실조 및 전염병 등으로 3만5000여명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 현재 다하우 수용소에는 각종 생체실험이 실행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전시관과 학살 장면을 찍은 영화를 상영하는 소극장이 있으며, 가스실과 시체 소각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수용소 구역은 32개의 막사로 구성되었고, 전기철조망 출입구와 배수로 및 7개의 감시탑이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하우 수용소는 1945년까지 ‘큰 변화가 없이’ 운영된 가장 오랜 강제수용소이기도 하다. 

한편 같은 전패국인 일본은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참회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정책에 대한 철저한 반성 및 역사적 과오에 대한 회개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해방 60주년 기념식이 베를린에서 거행된 적 있었다. 당시 강제수용소 생존자들 앞에서 나치독일의 과거사에 대해 ‘치욕’을 느낀다고 말한 슈뢰더 전 독일총리의 연설은 독일정부의 진솔한 참회와 약속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최근까지 강행한 일본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神社) 참배와 더불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현재 강제수용소는 독일인들이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는 온고지신의 ‘추모단지’로, 후세들의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0. ‘맥주의 도시’, 바이에른 뮨헨

 ▲ 뮨헨의 '세계 최대의 호프집'에서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독일인 1명이 매년 마시는 맥주는 500깡통에 달하는데, 이는 우리가 마시는 물의 양과 비슷하다. 필자가 금번 독일 여행에서 퍽 인상적이었던 것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맥주를 마시면서 생활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독일인들의 일상모습이었는데, 독일인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태어났다’는 속언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독일 맥주는 지방특색이 강하고 종류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현재 독일 전역에 널려있는 맥주공장 수는 무려 1500개에 달하며 맥주의 종류도 공장의 수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독일 속담에 “맥주는 양조장 굴뚝 아래서 마셔야 제 맛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기 지방의 맥주를 먹어야 제 맛’이라는 뜻이다. “맥주는 건강의 근원이며, 맥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는 독일 속담처럼, 독일인들에게 있어 맥주는 음료수처럼 일상화되었다. 따라서 현재 독일에 ‘비만환자’가 많은 원인 중의 하나로, 독일인들이 ‘영양가 높은 맥주를 즐겨 마시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일견이다.

  뮨헨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주도(州都)로, 인구가 약 125만이며 베를린과 함부르크와 함께 독일의 3대 도시이다. 1506년에 바이에른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히틀러가 뮨헨에서 나치스 운동을 일으켰다고 해서 뮨헨은 ‘나치스 운동의 수도’로도 불린다. 독일의 중요한 예술문화도시인 뮨헨에는 고딕·르네상스·바로크·클래식 등의 건축물이 즐비한 반면, 현대식 고층건물 또한 적지 많으며 이는 독일 특유의 클래식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역사가 유구한 현대도시 뮨헨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모차르트’ 등 전통적인 음악축제가 열리고 있고, 각종 박람회와 국제회의가 수시로 개최된다. 특히 매년 9~10월에 열리는 맥주축제(Oktoberfest)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현재 뮨헨은 도르트문트에 이어 독일 제2의 맥주생산지이다. 흔히 프랑스가 포도주로 유명한 국가라면, 독일은 뮨헨의 맥주축제로 인해 ‘맥주의 나라’로 각인된다. 

  현재 뮨헨에서 개최되고 있는 맥주축제는 통상 9월의 마지막 주부터 시작되어 10월 첫째 주까지 계속된다. 즉 ‘10월 맥주축제’가 9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15일간 지속되는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10월 축제’로 불리고 있는 것은 축제가 시작되었던 당시에는 10월 초부터 약 1주일간 진행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맥주축제 기간 당지의 맥주회사들은 6000~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텐트를 설치해 손님을 맞이한다고 한다. 또한 축제기간에는 500백만 리터의 맥주와 65만 마리의 닭 및 110톤의 소시지가 소비되며, 연간 축제기간 세계 각국에서 온 600만의 방문객이 뮨헨을 찾는다고 한다. 이 맥주축제는 1810년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왕자 결혼식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시 축제가 일주일간 열광적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다.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10월 맥주축제’는 거대한 경제이익과 함께 현재는 뮨헨의 도시브랜드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 브랜드는 맥주이며, 맥주하면 뮨헨의 ‘10월 맥주축제’를 연상한다. 뮨헨의 맥주축제가 독일의 민속축제로 자리 잡으면서 각국의 수많은 맥주팬들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불원천리 뮨헨으로 휴가를 떠난다. 필자는 뮨헨에서 세계 ‘최대의 호프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지만, 여행기간 마셔본 독일 맥주 중 ‘쓴맛이 나는’ 뮨헨 맥주보다는 쾰른 맥주가 입에 맞았고 인상에 남았다. 쾰른 맥주는 한국의 하이트(맥주)와 중국의 청도맥주 및 일본의 기린맥주와 그 맛이 비슷했다.
 
  11. 세계적인 관광지, ‘백조의 성(城)’

   ▲ '백조의 성' 기념

  6월 3일, 필자가 마지막으로 관광한 명승고적은 독일의 남부도시 휘센 부근에 위치한 세계적인 관광지 ‘백조의 성’이었다. 독일어로 노이슈반슈타인이라고 하는 이 성은 우리말로 신백조석성(新白鳥石城)란 뜻이다. 중국에 유명한 만리장성이 있다면, 독일에는 역사유적지로 수많은 성(城) 건축물들이 있다. 13세기에 건축된 하이델베르크성이 전쟁으로 인해 성의 일부가 ‘폐허’가 된 것을 방치해둔 것이 특징이라면, 1886년에 완공된 ‘백조의 성’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 루드비히 2세가 ‘자신의 향락을 위해’ 건축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후세에 희귀한 문화유산과 관광지를 남긴 루드비히 2세는 성이 완공된 후 강제 폐위되었고, ‘의문의 익사체’로 연못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 대포의 발명으로 성이 ‘쓸모없는 시대’였지만 루트비히 2세가 본인의 ‘순수한 취미’로 국고를 털어 성을 건축했고, 결국 그 ‘순수한 취미’가 바이에른 왕국의 경제파탄과 궁극적 멸망을 초래했던 것이다. 성이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은 루드비히 2세가 성을 없애버리라고 유언했지만 후세에 많은 전설을 남긴 성은 없어지지 않았고, 현재 바이에른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로 들었던 ‘백조의 기사’ 전설은 루드비히 2세가 정권을 잡은 후 성을 건축하게 된 직접적 계기이다. 작곡가 바그너의 후원자였고 오페라에 심취했던 루드비히 2세는 영웅담·모험담 같은 판타지에 빠져들었고, 특히 ‘로엔그린’ 모험담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로엔그린이라는 사람이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공주를 구하고 그 공주와 결혼한다”는 ‘백조의 기사’의 전설 속에 나오는 성의 이름이 슈반슈타인성이었고, 그 이야기에 크게 감명 받은 루드비히 2세는 자신만의 ‘슈반슈타인성’을 꿈꾸었고 그 꿈을 현실화시켰다. 그 성이 바로 노이슈반슈타인성이며, 노이는 독일어로 ‘새롭다’는 뜻이다. 1869년에 시작된 노이슈반슈타인성(백조의 성)은 17년 만에 완공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는 아름다운 성을 건축했지만 루드비히 2세의 판타지 집착은 그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했고, 늘어나는 궁의 재정적자는 그에 대한 귀족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결국 성이 완공된 1886년에 루드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성에서 쫓겨났고, 작은 베르크성에 유폐되어 2일 만에 호수에 ‘몸을 던져’ 한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한다. 

  루드비히 2세는 새로운 ‘백조의 성’을 건축해 어린 시절의 꿈은 이루었지만 그의 삶은 불행했고, 오스트리아 공주와 약혼했지만 결국 결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7년 동안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짓는데 모든 정력과 (국가)재산을 쏟아 부은 그는 자신의 꿈이었던 ‘백조의 성’에서는 겨우 3개월 동안 살았을 뿐이다. 정치보다 낭만을 추구했던 루드비히 2세는 뛰어난 용모와 조용한 성격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받으면서 18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음악·시·미술·건축에 대한 애호와 함께 오로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만 심취했다. 판타지의 매력에 매혹된 그는 자신을 바그너의 오페라 속 ‘백조의 기사’로 착각했고, 동화 속에 나오는 전설적 영웅처럼 살면서 엄청난 국고를 탕진해 결국 자기가 만든 연못에서 비극적 인생을 마무리했다. 한편 전설과 판타지 및 예술적인 추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백조의 성’이 오늘날 세계 각지의 관광객을 끌어들여 루드비히 2세가 탕진했던 재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후손들에게 되돌려 주는 역설적 결과가 이뤄진 것이다. 필자는 가장 비현실적 삶을 살았던 루드비히 2세가 오히려 국가에 재산을 늘려주는 ‘성공적인 왕’이 되었다는 현실에 심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인 루드비히 2세가 현실을 이탈하여 자신의 향락을 추구하기 위해 지은 ‘백조의 성’을 견학하면서, 필자는 ‘꿈’은 이뤘지만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비운의 왕’ 루드비히 2세의 ‘공과’를 음미해보았다. 한편 조선시대 말기에 쇄국정책을 펼쳤고 왕실권위의 과시를 위해 거금을 들여 경복궁을 중건했으며, 그 비용을 각종 세금으로 백성들에게 부과한 흥선대원군과 청조 말기에 외세의 침략과 나라의 우환을 외면하면서 해군경비를 유용해 의화원을 재건하고 극도의 사치와 타락에 빠졌던 서태후(자희태후)를 연상했다. 요컨대 이들 모두가 권한을 남용해 거금으로 ‘세계적인 관광지’를 건축하여 후세에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결국 그들의 부패통치가 바이에른 왕국과 조선왕조 및 청나라의 쇠퇴와 몰락을 불러왔다는 ‘공통젼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그들의 권력 남용과 개인적 향락을 위한 집요한 추구가 역설적으로 후세에 ‘훌륭한 관광자원’을 남긴 현실적 상황은 역사가 남겨놓은 이율배반적인 극적 아이러니이다.

  12. 에필로그

  금번 7박8일 독일 관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녹색으로 잘 정비되어 ‘오염 없는’ 독일의 환경산업이었는데, 독일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푸르다’라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독일의 대지는 온통 ‘푸른 색’이었고, 녹화가 잘 되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푸르른 하늘과 길가의 울창한 숲 및 도시에 우거진 푸른 나무들을 보면서 독일의 발달한 환경녹화산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환경산업은 남북의 ‘차별 없는’ 기후와 사시절 골고루 내리는 강우량 및 나무들이 사계절 동안 성장을 멈추지 않은 자연환경과도 관련이 없지 않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독일인들의 환경보호 의식과 녹화산업에 대한 중시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독일의 환경녹화 중 99%는 인공림으로, “전 독일인들이 나무만 베어서 팔아먹어도 3년은 산다”는 속설의 의미를 점차 납득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동서독이 통일된 후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고, 선진복지국가로 자리매김을 한 통일독일의 발달한 모습을 독일 전역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풍경 속에 자리 잡은 2~3층의 양옥들과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자연목장 및 도농(都農)차별이 사라진 전원풍경을 보면서, 필자는 1970년대 한국의 유명가수 남진이 부른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꿈의 현실화를 실감했다. 한편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동독출신인 메르켈 총리의 “우리는 유럽에서 강한 목소리를 내는 나라다”라는 광고판에서도 독일의 여성파워를 실감했고, 경제대국에 이어 ‘정치대국’이 되려는 독일정부의 야심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법과 사회제도 및 일상규칙 준수를 최우선시하는 독일인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선진국의 사회문화를 절감했으며, 독일 전역에서 수많은 장수노인들을 보면서 이미 초고령사회에 근접한 독일사회에서 고령화 대책 마련이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체감했다. 저출산·고령화는 바야흐로 한국과 중국에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며, 이는 각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나서고 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책의 마련은 한·중·일 등 동아시아와 독일 등 EU의 국가를 막론하고 급박한 당면과제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하면서 배우는 지식은 그래서 더욱 값지고 수확이 큰 것이다. 금번 7박8일의 독일강연·관광을 통해 해외동포인 독일동포들의 현황과 희망, 통일독일의 정칟경제적인 현황과 역사문화 및 인정세태를 다소나마 이해하였다. 아울러 동서양의 문화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를 얻게 된 것 역시 큰 수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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