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01년 여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일행들은 그곳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인들과 터키인들을 대상으로, 기독실업인회(CBMC)창립대회를 지원하기 위해 여행을 갔었다. 한국 지원단의 대표로 본인은 그날 순서 가운데 ‘축사’를 맡게 되었다. 행사 몇 시간 전부터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는데, 마침 우리를 안내하는 한국인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여기 이스탄불은 과거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이곳이 동양인지 서양인지 명확히 구분이 잘 안돼요. 터키 사람들이 한국의 6․25 참전 얘기를 하거나 알타이語 문법을 얘기할 때는 분명히 자신들이 아세안이라고 표현합니다. 근데, 최근에 EU(유럽연합)가입 문제가 논의될 때는 우리가 어떻게 아세안이냐,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봐도 우리는 틀림없이 로마․그리스와 함께 서양 사회다. 왜 우리를 따돌리느냐, 이렇게 항의를 하지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섬광처럼 지나가는 아이디어 하나를 잡았다.

‘이스탄불은 역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함께 공존해온 도시다. 보스프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서양을 하나의 도시로 품고있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인데, 그렇다면 이 도시를 ‘퓨전 시티’라고 불러주면 어떨까? 이것이 이 사람들의 참모습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왜냐면, 이 생각 끝에 하나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꼬리를 물고 떠올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날 저녁, 나는 모임에서 터키인들을 앞에 놓고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훌륭한(?) 스피치를 했다.

“여러분, 이스탄불이야말로 중세 이후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연결해온 Fusion City입니다. 그리고 Fusion이란 단어를 길게 늘여쓰면 Future Vision이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이 Fusion의 정신과 문화를 통해 동․서양의 갈등을 극복하는 21세기 새로운 Future Vision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게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88서울올림픽에서 함께 불렀던 노래처럼 ‘We are the World’를 실현하는 형제국이 되어봅시다. 우리들은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6․25전쟁에서 피흘려주신 여러분들의 고귀한 희생이야말로 우리들을 하나되게 하는 Fusion의 사랑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한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영원한 Future Vision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나는 그날 터키인들로부터 내가 스피치했던 시간보다 더 길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외국인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거나 또는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운 좋게도 나는 한마디 단어의 재치있는 변형과 조합을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터키인들과의 아름다운 Fusion의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Future Vision is Fusion’이라는 개념을 갖고 모든 일에 이 ‘Fusion Spirit’을 적용해보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이게 왠일인가?

그전에 미쳐 생각지도, 풀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과제들이 이 ‘개념’을 통하여 하나씩 둘씩 해결되고, 정리되는 놀라운 결과를 맛보았다. 중국 길림성의 연변과학기술대학 대외협력 업무나 북한에 세우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건설지원 업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여러 도시에 CBMC(기독실업인회)를 창립하는 사역과 KOSTA(해외유학생회)를 위한 강의활동을 통해서도 이러한 상호협력과 융화의 정신이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마침내 나는 ‘Asian Fusion Society is Our Future Visio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를 설립, 운영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 이스탄불에서의 ‘퓨전 이야기’는 두고두고 내 인생에 지렛대와 같이 소중한 핵심가치로 작용해 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경험치를 주변 이웃과 여러 나라의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다는 여망의 결과가 오늘 이 책이다.

미래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주인들은 오늘을 보지 않는다. 오늘이 아무리 달콤해도, 오늘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현혹당하지 않는다. 미래의 주인들은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본다. 그리고 언제나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산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을 코앞에 두고, 또한 연이어 밀려오는 세계경제위기의 파고에 시달리면서 우리가 원하는 번영의 길을 찾아간다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개혁적인 마인드와 열정을 갖고 짧게는 10년, 멀리는 100년 앞을 내다보는 자세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한다.

이런 노력가운데 필자는 일본과 중국을 한반도에 직결시켜 한 몸의 유기체로 변화시키는 Fusion의 작업이야말로 이 시대의 흐름을 활용하는 가장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다시말해 한·중·일 3국간에 대중교통로가 열리고, 자금과 물자가 자유롭게 통용되고, 능력에 따라 아무 장애없이 취업하고 인력이동이 가능한 공동체자유주의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이 21세기를 향한 동북아시대의 Future Vision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지구촌 사회는 어느 국가나 집단을 막론하고 그 크기에 상관없이 홀로 존립할 수 없는 상호작용의 그물망 속에 놓여있다.

특히 세계화현상과 지역화문제가 동시 다발적으로 돌출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갈 장기발전계획은 주변국가들과의 긴밀한 국제협력이 필수적이다.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 그 가운데서도 1차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이 유기적인 공조체제를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의 저술 목적은 바로 이와같은 동북아지역의 국제공조체제 즉, 동북아공동체사회 구성을 위한 인프라를 기획하고 이를 기반으로 급변하는 세계역사속에서 신국제질서의 창출과 생산성있는 국제협력의 새 길을 찾아가는데 그 사명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탁월한 학문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랜세월 동안 축적해온 경험적 지식과 감각을 토대로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세차게 구비치고 있는 세계역사의 한 흐름을 해석 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껴왔을 따름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동북아시대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내재적 통찰을 추구하는 한 탐구자의 미숙한 고백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라기는 이 책이 앞으로 남·북한과 한·중·일 3국을 관통하는 ‘퓨전 로드맵(The Fusion Loadmap)’이 되어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발전뿐만 아니라 장차 21세기 미래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또 한 걸음의 위대한 도전의 이정표가 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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