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유 복/ 중앙민족대학 박사지도교수

2007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비우량주택담보 대출) 사태는미국의 톱 10에 드는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가 련이어 파산하면서 시작되었다. 2008년에는 미국에서 거대한 금융위기상황을 불러 왔고, 미국만이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 신용경색을 일으켜 세계금융위기로 이어졌다. 현재 미국 경제는 1929년 대공황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GDP가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은 대공황 이후 가장 긴 침체에 빠지는 것이다.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는 발 빠르게 세계를 휩쓸게 되었고 미국 경제와 깊이 결속되어 있는 한국의 경제는 휘청거릴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의 금융위기로 인해서 대미수출이 감소되면서 년평균경제성장률이 약간 둔화되는 등 영향은 받았지만 2천억 달러에 육박하는 외환보유고를 보유하는 세계 제1위의 외환보유국이고 세계최대의 FDI(외국인직접투자)유치 국가이므로 중국의 경제는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해 그리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중한수교이래 중국 조선족은 자체의 경제활동관계를 한국과 너무나 긴밀히 결속해 왔다. 35만 명이 한국에 나가 로무에 종사하거나 취업내지 류학하고 있으며,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으로 이동한 60여만 조선족도 대부분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일하고 있거나 한국이나 한국인과 관련되는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것은 절반이 넘는 조선족 로동 인력이 자신들의 생계를 한국경제에 밀착시켰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세계금융위기사태는 한국경제를 강타함으로써 조선족경제생활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1. 자유시장경제원리와 미국의 금융위기

200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 금융, 경제 위기의 뿌리가 너무나도 깊기 때문이다. 아무런 규제 없이 작동하는 자유시장경제원리를 맹신하는 미국의 경제와 시장 시스템 자체가 위기의 주범이다. 이런 시장에서는 약삭빠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하고 파렴치한 자들만이 돈을 벌게 되고 부의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아무런 규제가 없는 시장은 카지노 판과 같고, 규제 없는 자본시장은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세계 경제와 금융을 선도하던 미국이 신용불량국가로 전락한 현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달러는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세계 준비통화로서의 위상을 얻었다. 미국은 해외의 자산을 저렴하게 사들일 수 있는 특혜를 얻었지만 자국 통화의 유동성을 마음대로 늘릴 수 없는 족쇄를 차야 했다. 성장률이 낮아지더라도 전 세계 수요를 넘는 달러를 찍어낼 수 없게 되였다. 1971년 미국은 달러의 금본위제를 철폐했고 그 후 미국의 경제는 잠깐 반짝하다가 끔찍한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은 강력한 반 인플레이션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침체를 벗어날 수 있었고 경제의 호황은 2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규제완화, 파생금융상품, 구조화채권의 출현으로 지각변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은행으로부터 별 다른 확인 과정 없이 차입될 수 있게 되고 그 돈의 흐름도 알 수 없게 되여 금융 감독당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커졌다. 두 번째로 고도로 세분화된 금융시장에서 신용불량의 대리인은 신용악화의 증폭기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투자의사결정이 위험한 극단의 상황을 초래할 확률이 큰 수학적 도구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 경향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해 2000년대의 신용버블 붕괴를 일으킨 것이다.

미국은 2000년대 들어 닷컴버블 붕괴와 9.11사태로 인해 불어 닥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값싼 돈” 정책을 선택했다. 거의 0%에 가까운 연방기금금리로 달러는 마구 풀려나갔다. 이렇게 풀려나간 달러는 전 세계에 유동성 과잉을 불러일으켰다.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를 통해 돈이 될 만한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각국의 부동산은 물론, 전 세계 자원과 곡물과 사치품 시장, 심지어 미국 전체 금융시장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택담보대출시장에까지 손을 뻗쳤다. 세계 최고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자랑하던 미국의 금융시스템도 허점투성이로 전락해 공격적인 투자은행과 헤지펀드의 투자 행태를 전혀 감독할 수 없었다. 이 허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2007년에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2. 세계금융위기와 중국

중국은 2002년 WTO 가입 후에 폭발적인 성장세로 경제를 성장시켰고 1990년도에 미국경제규모의 6%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던 자국의 경제규모를 2008년 말에는 30%가 더 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중국의 대미수출이 2007년도에 3216억 달러였고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이 653억 달러였다. 미국 발 금융위기 때문에 중국의 대미수출이 둔화되고 년간 10%정도의 경제성장을 수년간 지속하던 것이 2009년도에는 6.5%정도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은 2007년부터 세계 최대의 외국인직접투자유치국가(2009년 중국의 외국인직접투자유치액수 950억 달러예정)가 되었고 2009년을 기점으로 세계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가 되어 미국(16%)을 누르고 1위에 부상했다. 그리고 미국의 주식총가를 기준으로 2009년 세계 20대 은행 중 중국계은행 5개(공상은행, 건설은행, 중국은행, 초상은행, 교통은행), 미국계은행 4개, 영국계은행 1개로, 중국은 미국과 영국을 누르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2003년부터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의 대중국수출은 한국의 대미국수출과 대일본수출을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은 820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로 되었다.

중국은 2020년대 중반이 되면 미국의 경제규모를 릉가하게 될 것이고 지금 미국의 금융위기 때문에 대미수출의 감소로 연평균경제성장률이 둔화되는 등 약간의 영향은 받지만 2조 달러에 육박하는 외환보유고를 보유하는 세계 제1위의 외환보유국이고 세계최대의 FDI(외국인직접투자)유치국이기에 중국의 경제는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해 그리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2007년 이후로 중국의 경제성장이 세계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기여도가 미국의 경제성장이 세계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기여도를 릉가했고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이미 세계경제의 두개의 축이 되었기에 미국의 경제가 침몰하는 것이 중국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만약 중국경제가 위기를 맞게 된다면 현재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경제의 타격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세계경제대공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3. 조선족사회에 미친 불황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 붐에 따라 조선족들은 (1)북경, 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지역, (2)청도, 제남을 중심으로 하는 황하중하류지역, (3) 심천, 광주를 포함한 화남지역, (4) 상해 등도시를 아우르는 양자강하류지역, (5) 심양, 대련, 장춘, 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 등 중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해 가는 지역이자 또한 5만개 이상의 한국회사와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 진출하게 된다. 그들은 주로 한국관련 회사나 공장의 노동자, 회사직원으로 취직되거나 한국인을 상대하는 식당, 유흥업소, 여행사 등 서비스업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은 전통적인 거주지역인 동북 3성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현재 중국 조선족의 거주판도는 동북 3성 대도시에 40여만 명, 현, 시 이하 농촌에 45여만 명 그리고 중국 동남연해지역에 60만 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90년대의 또 다른 추세는 한국 로무의 붐이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코리안 드림"의 유혹에 끌러 한국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2007년 초부터 방문취업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금은 한국진출 조선족인구가 35만을 헤아린다. 그 외에도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호주, 남미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어섰다.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어 있는 조선족기업의 특징 때문에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조선족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공간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각을 바꾸어 보면 스스로 자체의 발전공간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35만 명의 조선족 로무자들이 한국에 나가 로무에 종사하고 있으며,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으로 이동한 60여만 조선족도 대부분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일하고 있거나 한국과 관련되는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것은 절반이 넘는 조선족 로동인력이 자신들의 생계를 한국경제에 밀착시켰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는 미국의 금융시장을 모범으로 삼아온 한국의 금융과 경제를 강타함으로써 조선족경제생활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한국의 금융위기로 조선족 로무자들의 수입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돌아오고 있다.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에 진출했던 조선족 로무자들도 동북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방황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대전환의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번 금융위기사태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세계금융위기가 몰아온 세계적인 경제 불황속에서 이제 조선족 기업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4. 조선족과 한국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민족(nation)”이란 용어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서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을 뜻한다. 우리가 “민족”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가”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 (《중국대백과전서》 민족권 참조).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에서 이민해 온 민족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1992년 중국과 한국간의 수교가 단행되면서 조선족과 한국간의 래왕이 잦아지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을 따뜻한 겨레(ethnic)의 정으로 맞아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들도 한국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도와 나섰다. 2006년, 한국보다 10년 먼저 중국과 수교를 실시한 일본은 대중경제교류에서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한국은 도리어 254억 달러의 흑자를 얻었다.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협력관계는 2003년부터 중국이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고,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이 820억 달러로 상승되는 일이 가능케 했다.

5. 중국에서 뿌리내린 조선족

중국으로의 조선족이민사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류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료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이 된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당신이 중국이나 한국 축구가운데 어느 팀의 스포츠풍격을 좋아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조선족은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집단(ethnic group)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기에 일부 조선족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 다민족국가에서 형제민족들의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난 90년대에 동, 서방 대립의 냉전구조가 종식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장막은 걷히고 경제활동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역시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변화와 새로운 움직임들을 재빨리 파악 하고 그와 같이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21세기에 살아남는 생존 전략으로서 우리는 조선족이면서 중국적인 안목과 세계적인 안목을 함께 갖춘 새로운 조선족집단의 민족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6. “중국 돈” 벌어야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의 교섭과정에서 다른 민족보다 빠르게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했고 평균 경제수입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노무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돈” 벌기를 위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문화영토"로 인정되던 조선족 마을의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조선민족학교의 폐쇄, 민족 정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한국 돈” 벌기를 위해 주류사회에 진입을 포기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조선족의 지위는 점점 바닥을 내리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아온 세계적인 경제 불황속에서 이제 “한국 돈” 벌기는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조선족 기업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 발전공간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미국의 권위경제지⟪포브스(FOBES)⟫가 선정한 2007년 중국의 재부서열에서 돈이 가장 많은 10대부자들 중에 6명이 부동산업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땅장사를 하는⟪대지주(大地主)⟫들이었다. 미국의 갑부 빌 게이츠나, 일본의 갑부 손정희는 IT산업, 즉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하이테크산업으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중국의 갑부는 기술함량이 낮은 땅장사로 재부를 축적했다. 이것도 ⟪중국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중국 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조선족기업인들은 우선 형제민족기업인들과 같이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어야한다. 현제 중국에서 비교적 성공한 조선족기업가들 중 대부분은 조선족사회에서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민족들 속에서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글로벌경쟁시대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우세와 다른 민족 집단이 대체할 수 없는 특수한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조선족 기업들은 한국계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한다.

급격히 변모하는 조선족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과제 역시 부단히 변하고 있으며 또 외적, 내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이 글은 길림 “송화강문화강단”(2009년 5월 17일)에서 한 강연원고 를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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