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칼럼-류연산 작가

   서문

  지난 4월 22일부터 5월 2일까지 연길-장춘-상해-가흥-소흥-녕파-상해-장춘-연길로 비잉 돌아왔다.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탔다. 그 동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직접 듣고 내 머리로 직접 느낀 것들은 내 마음에 직접적인 충격이였다. 고요한 호수 면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문이 일어나듯이.
  지금도 사뭇 출렁이는 마음을 기울여서 이 글에 담는다.  
   
               1   상해 - 힙합의 도시

  2003년과 2006년에 상해를 다녀왔다. 꼭 3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상해행이 이루어졌다. 전과는 달리 상해가 유난히 정답게 느껴졌다. 아들 광엽이가 살고 있는 곳이라 부모된 이 마음 절반이 늘 머물러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리라.
  아들은 연변과기대에서 건축을 배웠다. 그런 연고로 상해의 건물들 하나하나를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포동에서 자석렬차(磁浮列車)를 타고, 택시를 타고 아들이 세를 들어있는 시내까지 가는 동안에 차창으로 달려왔다가 달려가는 건물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하늘을 찌르고 우뚝우뚝 치솟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었다. 마치도 수많은 종들의 나무가 숲을 이룬 원시림을 보듯이 빌딩마다 높이가 같고 모양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도 콩나물 모양의 음이 그려져 있는 오선보를 보는듯 싶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매 하나의 건물마다에서 쏟아져나오는 음들이 하나로 모여서 장엄한 교향곡을 이룰듯 싶었다. 베토벤도 모자르트도 차이꼽스끼도 어쩌면 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노래도 울려나올듯한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는 대형 극장에 들어선듯한 느낌도 받았다. 뮤지컬이 공연되는듯이 건물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배역처럼 안겨왔다. 배우마다 모습이 다르고 맡은 역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듯이 건물마다 모양이 다르고 용도가 다르고 이미지도 다르다.  
  반시간 좋이 달려서 광엽이가 세를 들어있는 아파트단지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아파트들이 질서가 정연하게 줄을 지어섰다. 묻지를 않아도 지난 세기 70년대, 80년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시대의 맥박이 높뛰는 상해의 구석구석에 폐쇄되였던 당시의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튿날 우리는 거리구경을 나갔다. 광엽이가 다니는 회사가 위치한 막간산로(莫干山路) 50호가 제일 인상이 깊었다. 그곳은 오래전에 가동을 멈춘 공장구역이였다. 담장이며 건물이며 모두가 옛날 그대로라고 했다. 그러나 담장에 그려진 그림하고 건물 한뙈기씩 칸막이를 하고 인테리어를 한 모습이 살아서 움직였다. 건물속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돌아보노라면 상해의 젊음을 느끼게 된다. 전시장의 인테리어와 전시품들은 시때가 없이 바뀐다고 한다.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공장구역내를 한바퀴 돌아보면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기계소리와 로동자들의 노래소리가 멈춘 곳에서 시대의 맥박이 약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서에 묻힌 시대의 숨소리는 사뭇 고르로왔다.
  상해의 힙합은 중국 특유의 전통과의 융합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었다. 상해의 건물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건물은 한편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단편들이 모여서 상해라는 하나의 대하소설과 같은 건축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상해의 건물들은 저마다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한 한수한수의 노래들이 모여서 상해라는 하나의 대형 뮤직컬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연길에는 아파트가 없었다. 3층의  복무청사(현재 복무청사는 1990년대에 한층을 추가하였음)가 제일 높았다. 연변대학에서도 제일 큰 건물이 현재의 사범청사(1982년부터 사용함)였다. 현재 연길시내에서 굴뚝이 즐비한 당시의 단층집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낡은 공장건물들도 없다. 불과 20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길은 통째로 층집들이 즐비한 도시로 변모했다. 비좁은 분지속에 빼곡하게 들어앉은 한 본새의 건물들이 사뭇 따분하다. 가담가담 고층 건물이 솟아있어서 대도시의 분위기를 돋구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공간미를 고려하지 않고 질서가 없이 높기만 한 고층건물들은 지저분한 감을 강하게 안겨준다.
  상해는 통째로 생동하는 도시였다. 옛 건물들을 인테리어를 새롭게 하여 거리를 예술적으로 재생을 시켰다. 거리는 옛 그대로이고 건물 또한 옛 그대로이나 현대적 삶의 맥박을 느낄수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가? 그것은 상해 특유의 전통을 현대적인 기발한 아이디어로 부단히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에 비해 연길은 죽은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낡은 건물을 부셔버리기에 신났고 지금도 성수를 내고 있다. 간신히 하나가 남은 도윤공서 청사마저 아파트 단지의 사면 포위속에 주눅이 들어 잔뜩 옹송그리고 있다. 아파트가 즐비하고 거의 모든 아파트 1층은 영업용으로 되어 있고 한집 건너 식당이고 노래방이고 다방이고 상점이고 가로세로 뻗은 아스팔트 길에는 밤낮으로 차가 붐비고 --- 그런데 왜서 생기를 못 느끼는걸가?
  모든 살아있는 것은 숨결을 통해서 감지된다. 도시속에서 사람들이 비비고 다닌다고 해서 그 도시 자체가 숨을 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차들이 길이 좁게 달린다고 해서 활기가 넘치는 것이 아니다. 식당이 때마다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노래방이 24시간 노래소리로 넘치고 다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식당-노래방-다방으로 채바퀴 돌리듯하는 일과를 365일 반복하는 연길 사람들의 안이한 삶이 도시의 활기를 죽이는 장본인이다.
  변화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변화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연길에서는 아이디어가 하찮은 존재로 전락되여 있다. 은근슬쩍 남의 것을 카피를 해서 옮겨다 놓으면 되는 줄로 안다.
  심장이 뛰기만 하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맥박에 따라 숨쉬는 도시야 말로 살아있는 도시이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락후된 맥박에 따라 숨쉬는 도시는 인공호흡으로 간신히 숨을 쉬는, 힘겨운 자연사 과정에 처한 로인이나 다름이 없다.
  낡은 것과 새것이 어울려서 옛날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어가는 상해에서의 며칠 밤을 나는 악몽에 가위가 눌렸다.
  꿈속 연길에서는 무덤과 같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계속 일어서고 있었다. 

          2  가흥 - 명인의 고향

 
  <<한국항일운동서사와 쟈싱(韓國抗日運動敍事與嘉興)>>이라는 주제의 한중문학포럼은 4월 25일부터 사흘간 절강성 가흥에서 열렸다.
  전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상해 - 가흥행 밤 고속렬차를 탔다. 1932년 봄비가 내리던 날 김구 등 대한민국 상해림시정부요원들도 상해를 떠났다고 한다. 그들도 기차를 탔다.
  나는 77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기차로 동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쫓기는 몸이고 나는 그들의 옛 자취를 따라 세미나 참가차 가고 있었다. 그들의 탄 렬차의 시속은 불과 3, 4십킬로메터이고 내가 탄 고속렬차의 최고 시속은 300킬로메터, 보통 시속이 150킬로이다. 나는 복받은 시대의 행운아였다.
  세미나는 하루반이고 26일 오후와 27일 오전은 관광이였다. 가흥은 강남의 수향(水鄕),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문화명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볼거리이다. 거기에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있었던 남호가 가흥을 국내 홍색발원지로 떠올렸다.
  수많은 볼거리에서 나한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인물기념관들이다.  <<중국대백과전서>>에 오른 전국 명인 1,800명중 가흥 출신이 80여명, 현재 39명의 원사가 있다. 작가 김용(金庸)도 가흥 사람이란다. 나는 기념관들을 돌아보면서 가흥이 강남문화의 발원지로 부상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가 하는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나는 가흥사람들은 인물기념관을 만들줄 안다는 답을 얻었다.
  가흥지구에만도 오진(吳鎭), 왕국유(王國維), 심증식(沈曾植), 심균유(沈鈞儒), 저보성(褚輔成), 주생호(朱生豪), 왕호정(汪胡楨), 모순(茅盾), 장원제(張元濟), 장악평(張樂平), 서지마(徐志摩) 등 옛집이 있다. 가흥사람들은 명인들의 옛집을 복원하고 하나하나를 인물기념관으로 만들고 관광명소로 부상시켰다.
  매만가 76호는 가흥의 대부호 진동생(陳桐生)의 저택이였다. 항일전쟁시기 한때 한국림시정부 국무령 김구(金九)선생이 피난처로 쓰였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이 사실을 안 가흥에서는 력사자료를 발굴하고 <<김구피난처>>로 진렬실을 만들었다. 김구와 더불어 한국림시정부요원주소(매만가 일휘교 17번지)를 관광명소로 부상시키기까지 세 사람의 노력이 지대했다.
  가흥의 역사학자 김예(金睿)는 수년동안 김구와 한국림시정부요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자료를 발굴, 가흥김구연구회를 발족했다. 그는 말했다.
  <<현장답사는 선인들의 족적을 새롭게 발굴하는, 력사와 현실을 오가는 작업입니다.>>
  가흥텔레비죤방송국 PD 허암(許岩)은 김구의 아들 김신(金信: 상해 태생)장군이 고향으로 온 기회를 잡아 다큐를 제작했다. 그는 말했다.
  <<지나간 력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를 잊는 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가흥일보사 기자 하련생(夏輦生)은 김구와 상해림시정부의 활동을 제재로 한 <<선월(船月)>>, <<대장부의 망명(虎步流亡)>>, <<회귀천당(回歸天堂))>> 등 3부작 력사소설을 창작하였다. 그녀는 말했다.
  <<중국과 한국은 연분이 있다. 한국의 국부 김구와 가흥은 연분이 있다. 이러한 연분은 아주 깊고 아주 중요하고 아주 특별하다.>>
  력사를 통해 가흥사람들은 피로 맺어진 중한친선을 복원하였다.
  중국 혁명에 공헌한 조선족의 우수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물론 1호 인물로 주덕해를 꼽을수 있다. 주덕해 기념비도 있고 주덕해 옛집도 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주덕해의 이야기>>라는 책도 발간했다. 하지만 주덕해기념관 하나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기념비는 쓸쓸히 와룡산 언덕에 서 있고 룡정시 지신향에 있는 옛집은 복원은 잘해놓았으나 일년이 가도록 그곳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하긴 관광명소로 명동의 윤동주생가가 있다. 한국의 관광객들이 꼭 찾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유지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윤동주는 룡정 뒤산 공동묘지에 묻힌대로 고향 옛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족의 명인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에서 방황하고 있다.

             3  소흥 - 허구의 원형

  27일 오후 나는 소흥으로 갔다. 대학교 동창 리광인씨가 월수외국어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 안해도 상해에서 소흥으로 와서 합류했다.
  저녁에 리광인씨 집에는 유은종교수의 부부하고 여러 선생님들이 모였다. 고사리며 곰취며 봄나물 무침이 일미였다. 이튿날 점심과 저녁은 유교수의 초대를 받았다. 연변인민출판사의 편집이였던 량복선(유은종 부인)선생께서 돼지순대며 고추순대를 해주었다. 먼 남방에서 먹는 연길 특유의 민족음식이 맛도 좋지만 제자에 대한 은사님의 정이 넘쳐 감동 그 자체였다.
  이튿날 리광인씨의 안내를 받아 오전에는 대우릉(大禹陵)을 보고 오후에는 로신의 옛집을 다녀왔다.
  회계산(會稽山)에 대우묘가 세워진 것은 기원 545년이였고 1995년부터 소흥시에서는 대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회계산 정상에 21메터 높이의 대우상이 세워졌다. 우리가 가기 며칠 전에 올해의 대우제가 열렸다고 한다. 이제는 소흥시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차원의 제사란다. 대우는 중화민족의 시조이며 화하립국(華夏立國)의 국조(國祖)이며 일대 치수(治水)의 영웅이다. 선사시대를 살았던 그의 모든 이야기는 전설이다.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인으로, 신으로 거듭 났다. 조상에 대한 숭배심이 이 시대의 리더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로신의 옛집은 소흥시 중심에 있다. 로신의 일가는 소흥성내에서 손꼽히는 봉건대가정이였다. 로신의 옛집은 3대가 함께 한 대가족으로 건물과 정원이 4,000여평방메터에 달했다고 한다.
  고리끼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나서 성공한 문화인들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 레브 똘쓰또이처럼 잘 사는 집안에서 문화적 거인이 쉽게 난다. 돈도 벌고 문화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로신이 대지주 가문에서 태여나지 않았다고 하면, 일본 류학까지 하면서 학문을 닦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제기초는 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물질적 기반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로신이 죽어서도 소흥의 지명도를 세계만방에 알릴수 있게 된 것은 그 가문의 재력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로신이 세상에 남겨놓은 문화유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두 개의 세계에서 산다.
  그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다.
  이른바 육체적인 것은 실제세계이고 정신적인 세계는 가상적이다. 육체적인 것은 물질로 생명이 유지되고 정신적인 것은 이미지로 숨을 쉰다. 
  육체적인 것은 소멸된다.
  정신적인 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은 분리하여 생각할수 없다.
  육체의 생명속에 정신이 존재한다.
  영원한 것은 유한한 속에 있다.
  지금 로신의 고거(故居)로 관광지의 면적은 14,000평방메터의 거리를 이루었다. 그것은 단순한 로신의 생가가 아니였다. 그리고 단순히 로신이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아니였다. 그것은 로신이 일생을 두고 창작한 소설의 환경이였다. 그 속에서 살아온 집 식구들과 그의 집을 드나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소설의 원형이였다. 거리와 집을 돌아보노라면 <<고향>>이며 <<공을기>>며 <<아Q정전>>이며 로신의 소설속을 거닐면서 소설속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대문 앞에는 <<고향>>의 주인공 어린시절의 <<나>>의 친구인 윤토 등이 동상이 있다. <<축복>>의 샹림아주머니며  <<공을기>>며 <<아Q정전>>의 아Q며 로신의 집과 정원에 동상으로 있다. 공을기는 소흥의 술 이름으로 자리매김을 했었다. <<공을기>>를 맛보지 못했다고 하면 소흥을 다녀간 사람이 아닐 정도로  공을기는 소흥의 술을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좁은 거리에 줄느런히 있는 가계에서는 로신의 저작들과 로신에 대한 연구서들, 그리고 로신과 관련된 력사유물 복제품들을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다.
  로신의 고거를 돌아보노라면 로신의 진실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나의 머리속에는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을 대하고 머리 숙여 유자의 소가 되련다.>>고 한 로신의 시구가 떠올랐다.
  순간 <<편하게 살려면 불의와 타협하라. 사람답게 살려면 그에 도전하라.>>라고 한 김학철선생의 유언이 불쑥 생각났다. 로신과 김학철이 하나로 이어졌다.
  하긴 김학철을 로신에 비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그의 창작은 로신을 많이 닮아있다. 김학철의 <<격정시대>>의 주인공 선장은 20세기 조선족의 운명 그 자체이고 <<21세기의 신화>>의 주인공 임일평은 20세기 독재통치에 의해 스러져가는 문명 그 자체이다. 로신 소설의 원형들과 마찬가지로 김학철 소설의 원형들 모두가 20세기 중국 사회의 진실한 대표자들이다.
  안타깝게도 김학철을 아는 사람은 조선족중에도 몇이나 될가? 다행이 화가 필충국선생이 룡가미원에 김학철 문학비를 세웠다.     김학철을 기리는 사람들은 몇몇 지성인에 불과하다.
 
  .      4  녕파 - 기업의 요람
 
  29일 우리 부부는 녕파로 갔다. 녕파 기차역 맞은 켠 은안빈관(銀安賓館)에 주숙을 잡고 점심까지 먹고 나서 김철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난 음력설에 나는 연변인민출판사 박청산씨를 통해 녕파로부터 보내온 해산물 한 상자를 받았다. 김철준이라는 분인데 일찍 8, 9십년대에 소설을 썼고 나를 통해 발표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편집에 종사한 것은 25년(1982. 7 - 2007. 9), 그동안 나의 손을 거쳐 발표된 작품도, 나하고 인연이 된 작가들도 부지기수라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감사의 회신을 했고 그때부터 김철준사장하고 자주 메일을 주고 받았다.
   1시 경에 김철준사장이 호텔로 찾아왔다. 김철준사장은 기사겸 관광안내자로 되어주었다. 시내 월호(月湖)공원 내에 있는 고려사관을 돌아보고 그의 공장에 들렸다. 전문 수도꼭지를 생산하여 한국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그의 부인이 사무실에서 커피를 대접했다.
  김철준사장은 말했다.
  <<제가 연길을 떠난 때는 1997년 10월이니까 해수로는 12년이 됩니다. 녕파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처가 친척이 왕복로비까지 대준다고 하면서 초청을 했었지요. 연길에 비해 기후도 좋고 일자리도 많았습니다. 처음에 한국의 삼성중공업회사에 총무로 취직을 했습니다. 김병상사장님, 장충삼장로님, 리지연사장님, 원중연 사장님 등 녕파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한국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키웠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지요. 무역이라는 무(貿)자도 모르던 제가 실천속에서 생산, 사무, 행정 등 관리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분들로부터《앞으로 같이 가도 될 사람》이라는 평언을 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회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한국기업의 법인대표로, 년간 천만원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정을 주고 인연을 귀중히 여기고 허심히 배우면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회사를 내집처럼 생각하고 회사와 운명을 같이했던 것이 저의 성공비결입니다.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회사원의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월 5천원씩 로임을 받는다고 해도 녕파에서는 집 한 채 사놓고 살수가 없어요. 일시 내 호주머니 불릴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회사를 발전시킨다면 회사와 함께 회사원도 부유해지게 마련입니다. >>
  김철준 부부하고 우리 부부는 장개석 옛집 구경을 떠났다. 
  수금소를 지났다. 자동으로 차단봉이 열렸다. 녕파에 적을 둔 기업의 차량은 매년 교통카드 값 5원을 내면 무료통과라고 했다.
  김철준사장은 말했다.
  <<기업마다 시장의 직통전화가 있습니다. 정부 관원들이 회사에 와서 트집을 잡거나 불리익을 줄 때 전화 한 통화면 해결이 돼요. 정부 여러 관련부처에서 가끔 전화가 옵니다. 어떤 곤난이 없는가, 도와줄 일이 무언가? 하는 내용의 전홥니다. 우리 회사는 수출이 주요한 업무입니다. 공업품수출은 세금을 돌려줍니다. 일단 물건이 통관을 하면 해관에서 회사구좌로 세금을 돌려보냈으니 확인해달라는 전화가 옵니다.>>
  법테두리안에서 정부의 직능은 기업경영을 위한 최대한 봉사이다. 명절같은 때 김철준사장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떡값봉투를 드리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라고 했다.
  녕파의 일년 수입이 길림성과 맞먹는다는 통계가 있다. 사람들은 천혜의 지리적 위치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위치가 좋다고 해도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여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녕파라고 해서 부정부패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녕파의 기업은 요람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5  월계 - 중조우호왕래의 장

  그날 저녁 식사중에 녕해현 월계(寧海縣越溪)향 월계촌에 <<최부표류사적비(崔簿漂流事迹碑)>>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귀에 익은 이름이긴 했지만 딱히 누구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김철준사장이 <<표해록(漂海彔)>>을 쓴 사람이라고 하자 5백여년의 세월을 번개같이 거슬러 나는 한 인물을 만났다.
  제주 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館) 최부(1454-1504)는 1488년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오던 중 풍랑을 만났다. 일행 43인이 14주야를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절강 녕파부(寧波府)에서 구조되였다. 그들은 륙로로 하여 오늘날 료녕성 단동시 구련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해서 서울로 돌아갔는데 꼭 반년의 로고를 바쳤다. 그는 왕명을 받아 <<표해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명대의 해협, 지리, 민속, 문화, 언어 등에 대한 생동한 기록으로 조선은 물론 중국 력사상 보귀한 자료로 인정된다.
  2002년 최부의 12대 후손 병일(秉一)이 자금을 투자하고 월계향 정부에서 소학교 울안에 이 비를 세웠다. 같은 해 월계향 정부에서는 뒤산 언덕에 <<정해정(靖海亭)>>을 세우고 그 속에 <<월계순검사성유적지기념비(越溪巡檢司城遺址記念碑)>>를 세웠다. 주원장(朱元璋)이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순검사성을 세우고 수군 500명을 주둔시킨 곳이란다. 최부의 배가 륙지에 닿자 명군은 처음에 왜적으로 오해하기도 했으나 조선인임을 알고는 극진히 대접하여 환송했다고 <<표해록>>은 적고 있다. 그리고 <<녕해현지>>에도 <<조선 최교리를 환송(送朝鮮崔校理序)>>이라는 글이 있어서 이를 립증한다.
  우리를 맞은 응사관(應四官 1934년. 생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책임자이며 월계촌 로당지부서기)은 말했다.
  <<우리 마을이 중조량국교류사에서 중요한 사적지임을 몰랐습니다. 2001년에 최부의 후손들이 한국에서 찾아와서야 알았답니다. 표류사적지기념비는 최부의 12대 후손 병일(秉一)선생의 후원으로 세웠고 정해정과 순검사성기념비는 향정부에서 출자하여 세운 겁니다. 기념비가 생긴 다음해부터 한국에서 최씨의 후손들이 가끔 우리 마을을 찾아옵니다. 정부에서는 중조우호왕래의 력사사적지로 삼아 애국교육과 국방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월계향은 녕파에서 자가용으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산간마을이다. 근년에 한국기업들이 현내 각지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태광조명녕파지사 원준연(袁俊淵)사장은 말한다.
  <<우연한 기회에 기념비를 보고 간 후로 월계가 어쩐지 낯설지가 않더라구요. 월계 사람들이 더욱 친근하게 여겨졌지요. 그래서 이곳에 공장을 세운 겁니다. 500년 전 최부선생의 후광을 입고 있답니다.>>
  월계를 떠나 녕파로 오는 길에서 나는 정판룡선생님을 머리에 떠올렸다. 2001년 10월 초 사망을 며칠 앞둔 시점에 정판룡선생님이 나한테 하신 한마디 말씀이 새삼스럽게 내 가슴을 울렸다.
  <<연변의 산과 벌과 마을에는 유서가 깊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소. 그러한 곳에 기념비를 세우면 관광지가 되고 교류의 장이 되오. 하지만 세월속에 방치해두면 이미지가 바래지기 마련이라오. 연변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사업은 기념비를 많이 세우는거요.>>      

           6   연길행 - 공포의 로정

  5월 2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택시를 탔다. 상해에서 택시를 타는 것은 기분이 난다. 좌석에는 새하얀 까운이 씌워졌다. 매일 한번씩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택시기사는 차안에서 금연이 되어 있다. 연길 택시의 때가 다닥다닥한 까운과도 대조적이고 차에 오르면 담배냄새가 진동하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봉사 또는 자상하다. 어느 길로 갈가요? 하고 손님하고 묻는데 외지의 사람일경우에는 길을 자세히 소개하고 나서 손님의 선택에 따른다.
  그날 오후 장춘에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장춘시내로 들어가자 택시들이 길을 막아섰다. 서로 자기의 차를 타라고 한다. 기차역 앞 장도버스역까지 가는데 얼마냐고 물었더니 20원이라는 자도 있고 30원이라는 자도 있다.
  한 조선족아주머니가 연길로 가느냐고 묻고는 5.1절 기간이라 버스표가 없다, 자기를 따라가면 버스도 탈수 있고 표값도 75원이라고 했다. 20원이나 싸다는 말에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우리는 큰길에 나가서 달려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버스역까지 기본 료금 5원이였다.
  표를 사려고 버스역으로 들어가는데 당금 떠나는 차가 있으니 밖에서 직접 승차하라고 녀자 승무원이 소리를 쳤다. 그녀를 따라갔다. 4시에 떠난다는 차가 15분이나 연착되여 역을 나왔다.
  왕청현운수공사의 버스번호는  吉H - 65333였다. 무작정 올라탔다. 승무원하고 흥정해서 버스표값 80원을 물었다. 버스안은 텅텅 비였다. 불과 몇사람이 아니였다. 그런데 버스는 어떤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1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공항버스 종점역에서 연길손님을 찾던 그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들은 75원에들 차를 탔을 줄로 안다.
  하도 마음이 찜찜해 승무원하고 명함장을 요구했다. 명함에는 이런 글이 찍혀 있었다.

  왕청 - 경유 연길, 길림 - 장춘
  우통(宇通)고속대형버스 길H65333
  왕청 발차시간: 버스역에서 오전 8시 발차
  장춘 발차시간: 황하로(黃河路) 버스역 오후 4시 발차
 
  버스가 안도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삼도만에 못미쳐서 자그마한 봉고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吉HA0378호였다. 버스 승무원의 말이 자기들 차는 왕청이 종점이라 연길손님들은 봉고차로 갈아타라는 것이였다. 혹시 랍치를 당하지나 않나 하는 우려심이 들었다. 승객들이 불만을 터쳤다. 왕청까지 갈려면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한다. 협박이였다. 무가내였다.
  밤 10시경에 연길에 도착했다. 장춘-연길 버스로정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길이였다. 당지의 사람들도 깡패조직의 사기행각에 빠진것은 아닌지 하는 무서운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황차 외지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무서울까?
       

               후기

  녕파에서 장개석 옛집에 갔을 때 108불상이 전시되여 있는 라한당(羅漢堂)을 돌아보았다. 나는 수발타라존자(須跋陀羅尊者)를 선택하고 점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런 계시가 씌여 있었다.
 
  근고수행득자연(勤苦修行得自然)
  도력유변역무변(道力有邊亦無邊)
  자안락모심지성(慈顔樂貌心智醒)
  만사하수불성전(萬事何愁不成全)
  (고난의 수행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니
  도의 힘은 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라
  인자하게 웃는 모습 마음을 지혜롭게 하니
  구태여 만사를 이루지 못할 근심을 하랴)

  이번 려행에서 나는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는 도리를 깨우쳤다. 
  그래서 려행은 마냥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려행은 마냥 깨달음의 행보이다.

                    2009년 6월 30일      


조글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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