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항주고려사 옛터자리 아니다

1)

지난해 5월 12일(사월 초파일날), 항주시안의 화랑한식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현충혁씨가 식사후 항주고려사 옛터를 찾아보지 않겠는가고 물어온다.

《항주고려사 옛터자리?》

《네》

뜻밖의 얘기는 나를 한껏 부풀게 했다. 지금의 항주고려사가 옛터에서 조금 뒤로 들어앉았다는 정도로 알고있는 나에게 오늘날 항주고려사가 옛터자리가 아니라는것은 어마어마한 충격이 아닐수 없다.

▲ 고려사 있었던 곳에는 동파정(소동파)이 세워져 있고, 앞에는 일본이 투자하여 지었다는 호텔(화가산장)이 들어서서 차를 팔고 있다. 한창훈씨가 촬영하여 제공

점심식사후 그는 승용차를 다시 서호가 항주고려사쪽으로 몰아갔다. 적산부 부근 갈림길에 이르더니 그는 왼쪽 산밑길을 가리키면서 저기로 들어가면 절강성외사판공실과 화가별장이라고 하면서 화가별장 부근이 항주고려사 옛터자리라고 알려주었다.

나로 말하면 여기 갈림길은 꽤나 익숙한 편, 항주고려사 답사차 수차나 다녀간 길이였으니까. 그런데 절강성외사판공실, 화가별장 부근이 항주고려사 옛터자리임은 모르는터였다.

절강성외사판공실과 화가별장은 항주고려사쪽으로 이어가는 갈림길에서 한참 들어가면 이르는 산밑에 자리하고있었다. 화가별장곁 산쪽 펑퍼짐한 지대에 자그마한 정자 하나가 나타나고 동파정이라는 편액이 걸리여 호기심을 끈다.현충혁씨가 이 정자는 송나라때 항주지사로 활동했던 소동파를 기념하고저 세운 정자이고 정자안 돌상의 주인공이 소동파라고 소개한다.

《항주고려사 옛터자리에 동파정은 왜 세웠을가?》

《일이 그렇게 되였답니다.》

《그럼 이 옛터자리에 있었다는 주추돌은?》

《모르고있습니다.》

나는 그와 얘기를 주고받다가 동파정의 돌상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돌상의 높이는 2메터를 훨씬 넘게 보이지만 오래된 산물인지 돌상 여러 군데에 금이 가고 부스러진 모습을 나타낸다. 돌상 뒤면에 비문이 있어 한자한자 훑어서야 항주고려사  옛터에 소동파―소식상을 세우게 된 유래를 조금 알것 같았다.

                                                        2)

비문에 의하면 동파정 돌상의 주인 소동파 즉 소식은 사천사람(1037-1101)이고 호가 동파거사인데 송나라때 두번이나 항주지사로 있으면서 오늘날 서호개발에 공로가 큰 사람이였다. 그런 사람이 후세에 호법상으로 항주고려사안에 모셔지게 되고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고려사가 자취를 감추면서 돌상의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단다.

비문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있었다. 1996년 2월초 항주고려사 옛터에 항주 화가별장을 시공할 때 둥그런  모양으로 조각한 문관석상 하나가 출토되였는데 기초부분부터의 높이가 2.8메터에 달하였다. 이듬해 10월에 국내 문물고고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쳐 소식으로 확인되고 출토된 항주고려사 옛터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모시게 되였다.

비문으로 헤아린 동파정의 건설과 소식돌상의 유래이다. 이는 또 항주고려사 옛터가 이 곳이라는 현충혁씨의 얘기가 옳음을 알려주고있었다.

《항주고려사 관련자료를 보면 소식은 항주지사로 있으면서 고려명승 의천이나 항주고려사에 대해 억압역할을 꽤나 한것으로 보이던데.》

《사실인것 같습니다. 내가 본 력사자료들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위해 마련한 의천 관련자료 한부를 꺼내들었다.

《의천은 송에 머물면서 당시 활동하고있던 거의 모든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 불교에 대하여 토론했다. 의천의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불교전적 수집에 대하여 당시 관직에 있던 소식은 몇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비판했지만 송나라 조정은 오히려 의천을 환대했다.》

이 자료래원은 한국의 《두산대백과사전》이였다. 사실 의천은 불교전적을 수집하고 화엄종과 천대학의 교리상의 차이점을 알아보며 불교에 정진하고저 사사로이 제자 수개 등을 데리고 송나라 상선에 앉아 비밀리에 송나라로 오며 송나라 수도―변경 즉 오늘의 하남 개봉에서 송나라 황제―철종의 극진한 접대를 받는다. 또 철종의 추천으로 화엄종 승려 유성 등을 만나고 항주행에 오르게 된다.

소식의 저애는 그뿐이 아니다. 연변대 인문학원 력사학부 리매화선생의 의천연구에 따르면 의천은 송나라에 14개월 머무르다가 귀국한 후에도 항주의 혜인사(오늘의 고려사)와 줄곧 련계를 맺으면서 혜인사 정원법사에게 청서 금자화엄경 180권을 보내드린다. 1089년에 고려로 온 혜인사의 행자 안현을 통해 정원법사의 입적 (사망)을 알게 된 후 황금보탑을 보내게 되는데 항주지사 소식은 이를 되돌려 보내고도 모자라 혜인사의 제전을 중지하게 하고 남아있는 의천의 제자 수개에게 축출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황제나 조정,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의천을 례의로 대하며 환대할 때 소식은 의천에 대해 역작용만 일으킨다.

3)

우리는 동파정자 구간을 지나 수풀이 무성한 산밑의 수원지―샘물자리를 찾았다. 옛날 의천대사님이랑 마시며 노니였을 샘물터와 샘물로 이루어진 그 아래 호수, 옛스런 고목들이 하늘을 떠인 숲속을 거닐며 현충혁씨에게 항주고려사는 신해혁명시기 광주에서 손중산선생을 만나기도 한 이름난 시인이고 항일독립운동가인 신정과도 관계된다고 하자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나는 2007년 10월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겨레항일지사들》 전 4권 제3책 신정부분에서 이렇게 쓴바 있다.

《1915년에 신정의 셋째동생 신건식이 항주의 적산부 부근에서 고려사 옛터를 발견하였다. 이 고려사는 원래 옛날 항주의 명승고적의 하나로서 고려시대에 성덕태자가 항주에 와 출가했을 때 지은 옛절이였다. 그때 고려사안에는 성덕태자의 신상이 모셔지고 매일 향불이 그칠줄 몰랐는데 루루 수백년 세월이 흐르자 볼품없이 파괴되여 원 모양이 거의 없어졌다. 신정은 이 소식을 듣고 〈선인들의 유적을 없애는것은 후손들의 죄〉라고 탄식하면서 많은 자금을 희사하여 사원을 다시 수건하게 하였다. 그리곤 친히 󰡐고려사󰡑란 편액을 써주고 자기의 감회를 시로 표달하기도 하였다. 그때로부터 고려사란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였다.》

이는 내가 의천대각국사를 잘 모르던 시절에 관련자료를 가지고 쓴것이지만 항주고려사에 깃든 신정의 이야기는 진실한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항주고려사에는 또 겨레의 저명한 력사학자이고 1952년부터 1980년까지 강소사범학원 력사학부 교수로 근무하다가 1980년 11월에 강소 소주에서 병사한 류수인선생의 발자취도 스며있다. 류수인선생은 자기의 저서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사람들》에서 이렇게 썼었다.

《1972년 4월, 나는 항주를 유람할 즈음에 고려사유적을 답사하였다. 사찰은 원래 오늘의 화강초대소에서 수백메터 떨어진 항주 적산부에 있었다… 마을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해방전에는 숙직승이 한명 있을뿐이였는데 해방후에는 그 곳을 평지로 만들어 포전으로 삼았다는것이다. 내가 포전을 참관할 때는 그대로 버려둔 옛절의 주추돌만 보이고 다른 유적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나는 류수인선생을 떠올리면서 현충혁씨에게 항주고려사의 옛터자리 주추돌 행방을 부탁했다. 수소문하면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행방이 알려질거라는것이 나의 소신이였다.

우리는 항주고려사 옛터를 떠나 의천대사님이 다녀간, 1060년의 력사를 가진 부근의 진나라때 고찰―법희강사를 돌아보기도 하고 서호의 서서호로 불리는 모가부 호수가에서 차를 마시며 사월 초파일날 항주고려사 전등원과 고려사옛터를  답사한 감수를 주고받았다. 그 감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금의 항주고려사가 비록 옛자리가 아니더라도 현지답사수확은 엄청이나 컸다는것이다.

우린 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의 발자취, 절강의 고대겨레 발자취를 꾸준히 추적할데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길림신문 리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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