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로드맵 연재](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이승률 회장 저

또 한 가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이다. 흔히 동아시아의 자궁에 비유되는 한반도는, 중국을 거쳐 온 모든 아시아문명의 정수가 찬란하게 꽃피운 곳 일 뿐 아니라, 그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보고다. 그것은 문화예술분야에 독창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특유의 능력에도 기인한 바 있겠으나,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영향도 결정적이다. 반도란 원래 대륙을 바라보고 뒤로는 배수진을 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산실인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다양한 문화충격들을 더 이상은 보낼 곳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고스란히 품고 곪삭여서 이를 완성시키고, 원형을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 흔적들이 우리 역사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조선왕조의 성립이다. 조선왕조는 중국대륙에서 출발한 성리학의 기본이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아 실제로 도덕정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다. 유학의 새로운 사조로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중국은 황제를 천자(天子)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이를 단순한 이상적인 도덕정치이론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달랐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성리학의 도덕론에 입각한 여론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근대적인 관료정치체제를 갖춘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이후 600년간 사림과 학계, 여론과 사법부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구현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정치의 일거수 일투족이 성리학의 기준에 의해 철저하게 검증받았고, 모든 과정이 공개적으로 결정되고 상세하게 기록됐다. 왕은 관료들의 신뢰와 동의 없이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통유교국가로 세계 유교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600년의 치열한 자취는 오늘날 세계학계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중세 도덕국가 연구에 가장 정통적이면서도 신뢰할만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창덕궁과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불교유적들과 나란히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신라의 치열한 위민사상,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이 땅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이상적인 불국을 만들고 싶어했던 고대 한반도 통치계급의 염원이 기하학이라는 첨단 과학속에 용해된 불가사의다.

이 외에도 한국은 아시아문화의 정수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로 주목받고 있다. 고대 한자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 유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라, 중국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나라.......이것이 바로 반도인의 저력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근대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현대정치사회사상 유일한 나라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건국 60주년을 즈음하여 세계평화포럼의 김진현 이사장이 한 일간지를 통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1945년 이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세계 140여개의 제 3세계 국가 중에서 정치민주화, 시민자유, 근대경제성장, 교육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사회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개방과 해외 진출이라는 근대화의 요소를 완벽하게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절대 가난 탈출은 역사적인 일이지만 이들의 근대화진입은 아직 에너지, 환경, 인구구조변화, 물, 전염병 등 문제군의 대국이 된 것일 뿐, 문명적 선진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싱가포르 경제가 최선진인 듯 보이지만 정치 언론의 자유는 아직 후진이어서 부자세습 정권이 끝난 뒤의 운명은 불투명하다.

지금 대한민국 5천만 시민은 현대적 모든 자유 ― 선거, 표현, 결사, 거주와 이동, 외국여행, 소비와 직업과 교육선택, 그리고 전통적 신분계급으로부터의 자유 ― 를 누리고 있다. 동으로는 일본열도에서 서로는 우랄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50개국 40억 인구 중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근대시민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일본은 아무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신분사회요, 신민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 과학기술, 예술, 산업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수준과 겨루고 있다.

......동양의 전통문명에서 2천년 이상 성숙한 한국인들이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그것도 일본같은 제국주의가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은 문명사적 기록이다.

즉 우리는 동양의 전통문명을 가지고도 서양 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지구촌 유일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 역시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을 증명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통찰하는 시각으로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문명사적 쾌거로 정의한 김진현 이사장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가 충돌하고 대결하는 단층으로 보는 시각에 단호히 반기를 든다. 대신 그 양극의 문화와 가치들을 성공적으로 융합해낸 민족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현 이사장은 더 나아가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근대화혁명을 세계 보편적 모델로 승화시켜 21세기 후반에 전개될 지구촌 인류사회의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중국과 일본을 넘어 지구차원에서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지역과 세계, 전통과 근대의 융합점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력을 갖고 있는 반도인이다. 주변의 이질적인 문화를 품는 완충지대로서 핵심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질적인 외부의 충격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품고 곪삭혀서 완성시키는 독보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기질을 생각하면, 반도인은 사실, 외부 충격을 겁낼 필요가 없다. 최대한 문을 넓게 열고 다양한 문화와 충격을 받아들여 그것을 새로운 문화창출의 밑천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대를 앞두고 왜 우리가 반도성을 회복해야 하는 지는 이쯤이면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에 할 일은 오직 하나, 누구와도 손을 잡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인 서울대 하영선 교수는 이를 그물망국가에 비유했다. 즉 세계와의 관계를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는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구한 동양적 전통 위에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저력을 바탕으로 반도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이제는 국제사회 속에 탄탄한 그물망을 갖춘 동북아의 매력국가가 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인접 해 있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우고, 한편으로는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동북아시대를 꽃피울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윤활유가 되어야 하고, 길이 되어야 한다. 대륙으로 가고자 하는 일본, 태평양연안으로의 진출을 원하는 중국, 그들은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들과 최상의 관계를 갖는 것은 단순히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안위나 도모하는 피동적인 전략이 아니다. 다가오는 아시아대륙시대를 앞두고 도도한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즉,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시작해 유럽과 대서양과 미국을 지나고 태평양을 건너온 서진(西進)의 역사 흐름을 다음 시대의 주역인 아시아대륙으로 안내하는 촉진자 역할을 해냄으로써 민족도약의 기회를 잡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철저한 준비와 최대한의 서비스기능(섬김의 리더십, 탁월한 경쟁력 등)을 발휘해 중국과 일본 양국을 우수고객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독보적인 가치를 극대화해서 실리와 명분을 함께 얻는 최상의 부가가치를 챙겨야한다. 균형과 포용으로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발전과 공존 및 상생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천성이고,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체력에서는 게르만족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했던 로마인, 그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세계를 지배했고,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말은(필자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럼 우리 한민족은 어떤가?

체력에서는 몽골족보다 못하고, 지성과 경제력에서는 강한성당(强漢盛唐)의 한족보다 못하고, 또한 기술력에서는 일본민족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들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굴하지 않고 1,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반도를 통일국가체제로 유지해온 민족이 아닌가.

주변국가들의 정치사회적 갈등을 완충하고, 나아가 이들 국가들이 보유한 문화적 특질, 즉 대륙풍의 웅장함과 해양풍의 섬세함을 융합시켜 제3의 독창적 문화가치를 창달해 온 민족이 아닌가.

또한 여기에 더하여 재치와 순발력이 능해 이 시대 국제관계의 흐름을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접속하고 조정하고 선도해 나갈 수 있는 민족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두바이에 세계의 투자가들이 몰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곳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아랍과 서방이 만나는 독보적인 완충지대이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의 최대 강국은 바로 이런 관계성이 높은 나라다. 부가가치 높은 관계성으로 세계 교류의 장이 되는 나라가 강대국이다. 두바이가 지금 세계 최고의 소득을 올리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라. 두바이에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과 싱가폴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게 거리나 문화적 친밀감으로 볼 때 한국만한 완충지역은 없다. 더구나 IT와 정보화능력, 관계성이 국력이 되는 21세기를 맞아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부가가치를 활용해, 역사상 최초로 세계중심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동북아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가 한국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자신을 향한 시대적 각성이다.

이렇게 시대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시각을 넓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안에서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그래서 사회를 이분화하고 친북이니 반미니 싸우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동북아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나가 그물망같은 국제관계를 만들라고 말한다. 동쪽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외교중심을 이제 서쪽으로 더 넓혀서 중국대륙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바라보고 미래를 구상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는 지금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 한일해협 및 환황해 지역경제권, UNDP 관련 지역 및 한반도 국제정세에 관해 그동안 협의하고 구상해왔던 생각들을 간추려 국민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동북아경제중심국가론’에 대한 담론을 다시 시작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파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중·일 3국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는 동북아 FTA와 해저터널(T&T) 프로젝트를 한 묶음의 대안으로 구체화시킴으로서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한반도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대안의 성격을 기능주의적 접근방법 이라 말하고 싶다. 오랜기간 동북아지역에 산적해왔던 과거사적 역사인식의 장벽들을 뛰어넘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롭고 실질적인 국제협력의 과제를 풀어가는 데는 원론적인 성격의 논쟁보다 기능주의적인 실천방안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이것의 성사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목표에 이르는 대안의 성격을 보다 현실적인 이슈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일 것이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고대해 본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