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녀는 자연풍경만을 사진에 담았을까? 사진기술에는 전혀 문외한이면서 말이다. 기자나 촬영애호가가 아닌 일반사람들은 대개 자동카메라를 사용하며 인물사진들을 주로 찍는 편이다. 그런데도 은파랑은 초보자들이 사용하기에 무난한 자동카메라가 아닌 프로들이나 애용하는 수동카메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카메라도 아니고 인젠 고물이 되기 시작한 기계카메라를......게다가 시간만 허비하고 금전만 날리면서 굳이 풍경사진만을 촬영한 데는 어떤 까닭이 숨어 있을까?
 웬일인지 그녀의 모든 것이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36컷짜리 네거티브를 가위로 6프레임씩 여섯 줄로 잘라냈다. 그런 다음 준비된 확대기, 유리, 인화지, 스펀지, 받침대를 이용하여 교정인화작업에 막 들어가려고 시도하는데 위층에서 미경의 목소리가 지하실로 새어 들어왔다.
 “오빠, 미미 전화야. 미미가 막 울고 있어. 빨리 나와 봐.”
 “뭐, 미미가 운다고?”
 정도는 네거티브를 유리위에 배열하다말고 서둘러 암실에서 올라왔다. 가정부의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있을 때보다는 어쩐지 딸애 미미를 맡긴 기분이 늘 불안했다. 가정부아줌마의 술주정뱅이남편 형태가 며칠 건너 찾아와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미미니. 왜 울어?”
 “아빠. 빨리 집에 와. 미미 무서워!”
 “무슨 일인데? 아빠 지금 일하지 않아.”
 “아줌마가 그 곰 아저씨랑 싸워. 막 때리고……엉엉.”
 “너 지금 집이니?”
 “아니, 밖이야. 공중전화……”
 “알았어. 아빠 곧 갈 테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금방 보게 될 파랑의 신비한 사진을 버려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아쉬웠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기심보다는 현실이 더 중했다.
 자택은 사진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81번 버스종점차고를 돌아 한남동쪽으로 가다가 골목 하나만 유턴하면 집이다. 그 골목 입구 고깃집 벽면에 공중전화 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미미는 눈물범벅이 된 채 공중전화부스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집에 있지 않고 여기 나와 있는 거니?”
 “아저씨가 무서워.”
 “아빠랑 같이 들어가자.”
 정도는 미미를 번쩍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막 집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쇠대문이 덜그렁 열리더니 가정부아줌마가 밖으로 허둥지둥 달려 나온다.
 “미미야. 우리 미미 어디 갔니?”
 그녀의 치마꼬리를 잡고 뒤이어 남편인 형태가 쫓아 나온다.
 “이년아! 어딜 가. 돈 달라는데. 돈 내놓고 가. 10만원만 말이야. 씨벌 년! 종아리를 확 분질러 트리기 전에……”
 구두 한 짝이 총알처럼 날아 나오는 바람에 정도는 흠칫 놀라 몸을 피했다. 구두 짝은 쉬-익 하고 귀뿌리를 스쳐 지나가더니 등 뒤의 벽돌 담장에 맞고는 곤두박질했다. 구두는 해어지고 퇴색하고 코까지 터진 흉한 꼴이다. 그 허름한 구두 짝 만큼이나 초라하고 험상궂기까지 한 형태는 알코올기운이 올라 벌건 얼굴을 하고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어머, 사장님. 이거 죄송합니다. 미미야. 어디 갔었어? 어서 아줌마한테로 와.”
 아줌마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애를 받아 안으려고 했지만 놀란 미미는 더욱 더 아빠의 품을 오비작오비작 파고들었다.
 “하~ 글쎄 이년이 소비 돈을 좀 달라니까 안주는구려. 어서 내.”
 주인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기가 싫었던지 아줌마는 그제야 마지못해 지갑에서 십만 원 액면가의 수표 한 장을 꺼내어 형태에게 건넨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내 눈앞에서 꺼져요.”
 “진작 줄 것이지. 미안합니다. 동네 분주하게 떠들어서.”
 형태는 허리를 굽실하고 인사하더니 길바닥에 뒹구는 구두 짝을 집어 신고는 비틀비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아내가 벼룩시장에 낸 구인광고를 보고 자진하여 가정부로 입주한 아줌마였다. 맘씨가 착하여 낙점했는데 그들의 부부관계가 이토록 험악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남편은 주사가 심한데다 난봉에 도박까지 일삼는 시정잡배였다.

연재 7 -

집안에 들어와 보니 식탁위에는 정도도 아까워 마시지 않고 두었던 고급양주병과 마른 고기안주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죄송해요. 말렸지만 말을 들어야죠. 제 월급에서 뺄게요.”
  아줌마는 허둥지둥 식탁을 거두며 거듭 사과했다. 접시와 수저, 음식물들도 사내의 손에서 뿌려나간 듯 방바닥에 어수선하게 나뒹군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줌마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아내에 대한 불만이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아내는 남편과 자식을 이런 살벌한 전쟁터에 내버려두고도 마음이 편할까?
  할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면 다시 내려가더라도 일단은 올라왔다가……

     2

   정도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두컴컴하고 숲마저 무성하고 바위에는 검푸른 이끼가 두터운, 깊숙한 계곡이었다. 물은 차고 투명한데 그 속에 정도는 알몸으로 서있었다. 머리위로는 장쾌한 폭포가 쏟아지는데 그 힘찬 낙차에 수면은 여지없이 구멍이 뚫리며 깊숙이 밑바닥까지 파여 들었다. 움츠러들려고 하나 줄기찬 물줄기에 갈기갈기 찢기기만 하는 수면, 그 주위에서 질탕치며 부걱거리는 하얀 포말덩이들, 안개발로 실실이 피어오르는 물보라와 부산스레 돌아치며 꿀렁- 꿀렁거리는 물 트림소리는 정도의 육신 어딘가에서 이상한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물 속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이윤정도 있고 여동생 미경이도 있고 그리고 엉뚱하게도 파랑도 있었다.
  정도는 아내에게로 다가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로 자꾸만 굵은 물줄기와 파랑이 막아선다. 탄력과 부드러움으로 싱싱하고 기름진 그녀의 가슴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아내대로 연신 뒷걸음을 쳤고 미경은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잠을 깨고서야 정도는 자신이 시트위에 질퍽하게 몽정했음을 발견했다. 창피한 나머지 아줌마가 보기 전에 서둘러 시트를 벗겨 슬그머니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도대체 누구하고 몽설한 거지? 아내랑? 아니면 파랑이랑?
  “사정은 해서 뭘 해. 그게 섹스의 전부는 아니잖아. 정액이 콘돔 속에 그들먹이 차오르는 그 불쾌감을 넌 몰라. 죽어버린 액체, 하수구를 찾지 못한 썩은 구정물에 지나지 않지. 그 얇은 막이 나와 아내 사이에서 생명의 탄생으로 통한 통로를 차단하고 있단 말이야. 그건 섹스가 아니라 단순한 배설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정이고 헛된 짓일 뿐이라고.”
  석준범이 그토록 저주하는 콘돔과 대상마저 없는 몽설은 너무나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스물다섯밖에 안된 청춘이란 말이야!”
  살아있어도 남자구실을 못하는 남편에게서 성적쾌감을 얻을 수 없는 여동생 미경이의 눈물과 한탄도 조금은 이해될 듯도 싶다. 겨우 스무사흘이다. 아내와 갈라진지 고작 스무사흘뿐인데도 이처럼 황당하고 치사한 꿈을 꾸었다. 이불을 끌어안고 사정했다. 아직은 생소한 파랑과……
  무언가가 부족한 자의 불안과 슬픔 그것은 어쩌면 은파랑의 그 이상한, 사진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조잡한 피사체들에서 나타나는 결여와 부족함에서도 꼭 같이 느낄 수 있었던 기분이다. 가끔 결여와 부족함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결여와 부족이 결코 인생의 궤도에서 탈선하는 명분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듯이 인생에는 정도正道가 있다. 정도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이름값은 하려고 29년 동안 하루도 되는대로 일상을 소비한 적은 없었다. 인생을 바르게 살도록 해주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윤리와 양심과 정의 같은 것들로 삶의 균형감각을 오늘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없었던 스무사흘동안에 나에게 무슨 변화라도 생겼단 말인가? 이불위에 사정한 끈적끈적한 몽설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그냥 정상적인 생리작용이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는가. 꼭 거창한 이유를 붙여만 하는가.
  설령 이 몽설이 석준범의 콘돔이나 미경의 성적불만이나 파랑의 이상한 사진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정도는 그들처럼 불만을 토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토로해서는 안 된다. 몽정은 몽정일 뿐 어떠한 마음의 변화도 입증하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 간단한 생리현상을 이유로 아내에 대한 배신, 외도 등 무시무시한 윤리적, 양심적, 결론들을 도출해낸다는 그 자체가 일종의 죄악이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