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석준범의 콘돔콤플렉스와 미경의 성적 불만이 한번의 몽정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일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불만은 만 악의 근원, 뭐 이런 설법이 가능다면 몰라도...... 
 영문 없이 이 모든 의문의 해답이 파랑의 이상한 사진 속에 죄다 숨겨져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줌마가 주인이 좋아하는 북어찜을 만들어놓고 조반식사를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집을 나섰다. 음식 향기 먼저 정도에게 다가온 것은 가정부의 그 과분한 정이 담긴 눈길이었다. 친자식을 바라보는 듯, 그녀의 시선에는 언제나 모성애 같은 풀기 있는 정이 가득 발려있었다. 착함과 선량함도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도는 아줌마를 통해서 알았다. 이유 없는 과분한 인정 또한 받기가 거북하다. 챙겨주는 넥타이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고 나왔으나 대문을 나서자 그냥 가방 안에 집어넣고 말았다. 제발 좀 주인에 대한 필요 이상의 관심은 꺼줬으면 싶다. 아무리 정에 갈증이 든 사람일지라도 상대는 가려야할 것이 아닌가. 난 주인이고 댁은 가정부가 아닌가. 그러니 인정보다는 복종과 공경이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구분이 있고 서열이 있고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늘이라고 미경이가 오빠 먼저 출근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지난 밤에도 네댓 번이나 광혁이 한테서 추적전화가 왔었다.
 “형. 미경이 퇴근했다면서 왜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오는 겁니까?”
 수화기 속에서 들리는 우렁우렁한 음성만 듣고서는 그가 하반신이 마비된 채 병석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장애자라는 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교통사고가 있기 전 광혁은 신체가 곰처럼 건장한 남자다운 남자였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그런데 하체가 불구가 된 후로는 성미도 갑자기 옹졸하고 좀스럽게 변했다. 병석에 누워 운신을 못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질구질하게 아내의 뒷조사나 하는 게 하루일과의 전부였다.
 “글쎄. 어디 잠간 들렀나 보지. 친구를 만났거나. 좀 있다 들어가겠지 뭐.”
 핏줄이란 어쩔 수 없나보다. 객관적으로 문제를 판단하고 양심에 따라 사는 걸 좌우명으로 삼는 그도 저도 모르게 여동생을 두둔하고 허물을 감춰주게 되니 말이다.
 “친구는 무슨 친굽니까. 또 그 배달 녀석을 만난 거지요. 형. 좀 찾아줘요. 이렇게 폐인이 된 것만 해도 억울한데 ……”
 “알았어.”
 그러나 다리가 성한 정도도 미경의 행적을 탐문할 도리가 없었다. 여동생이 불륜을 저지른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미경의 외도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하루 24시간 미경의 뒤를 미행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 계집애. 내일 아침 출근하기만 해봐라.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은 광혁을 달래고 미경을 훈계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벼르다가도 정작 오빠의 호된 질책에 눈물을 흘리는 미경을 보면 정도는 금방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대로 그냥 두었다간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가문의 법도를 망치고 동네를 웃기는 패가망신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나한테 남은 거라고는 미경이 하나뿐입니다. 건강도 희망도 돈도 나한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발 미경이를 내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막아주세요. 형, 부탁입니다. 무릎 꿇고 엎드려 빌게요.”
 꼭 광혁의 구차스런 애걸 뿐만은 아니었다. 여동생을 인생의 바른 길에서 탈선한, 실패한 인생의 악역이 되도록 방심하기에는 너무나 정직한 정도였다. 
 스튜디오 셔터를 열고 홀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증명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조차도 없이 한산하다.
 정도는 곧장 암실로 내려갔다. 하룻밤을 재워 둔 파랑의 필름네거티브의 진면모가 더욱 궁금해진다. 결여와 부족과 여백으로 흉한, 거의 폐품에 가까운 사진들에 이처럼 호기심이 동해보기는 처음이다. 천사 같은 미모의 아가씨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서툴고 조잡한 실패작들……
 그 속에는 말 못할 무슨 까닭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확대기를 이용하여 뽑아낸 교정인화지는 정도의 부푼 기대감을 다시 한번 뒤집어엎었다. 36컷짜리 필름 세 개에서 그런대로 살려낼 만한 사진은 구도와 노출이 무시된 화폭까지 합쳐 겨우 십여 점뿐이었다. 돋보기를 통해 관찰한 화면들은 광선, 노출, 초점, 구도, 피사체의 중심과 주변들이 전혀 무시된 것들이었다. 자동카메라가 아니고 첨단기능을 가진 프로용 카메라는 초보자의 손에서는 오작품만 생산해 낼뿐이다. 셔터조절에서도 운동감이 없는 정지된 피사체에 슬로셔터촬영을 했는가 하면 흐르는 물이나 가을바람에 날리는 단풍잎들은 도리어 쾌속셔터촬영을 했다. 노출과다와 부족현상이 허다하고 직사광과 순광촬영이 위주고 촬영에 가장 적합한 사광斜光, 역광 이용은 도리어 부족하다. 설령 역광촬영이라고 해도 노출과 초점이 적절하지 않고 화면의 콘트라스트현상이 과분하며 광각렌즈보다 무리한 망원렌즈사용 등 부적절한 촬영이 대다수의 사진을 점하고 있었다.

연재 9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가까스로 선정한 십여 점의 사진만을 인화했을 것이지만 그녀의 것만은 그 전부를 인화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아가씨의 부탁도 있었지 않은가. 이 사진들에는 사진의 일반적인 기교를 떠난 사진이라는 존재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위층에서 문소리가 나고 이어 미경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나 왔어.”
 그러나 한시라도 급히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미경의 존재를 지운다.
 정도는 다른 손님들에게는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자신이 촬영한 예술사진을 인화할 때만 사용하던, 콘트라스트효과가 가장 강한 아그파Agfa6호 인화지를 선택했다. 특수효과를 얻기 위한 인화에만 특용되는 사진종이였다. 고급인화지를 써서라도 표백, 블리칭, 스파팅, 등 사진교정과 화장술을 써서라도 그녀가 만족할 만한 훌륭한 사진 몇 장을 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진을 뽑았으나 역시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렸거나 노출과다 또는 노출부족현상이거나 화면구도가 굴절되고 잘려나가고 불안정하거나 초점이 맞지 않거나 하는 실패작들뿐이었다.
 프로작가인 정도가 보기에도 단두 점, 말라 죽은 고목과 커다란 바위를 담은 사진만이 살릴 만한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강한 직사광작용으로 과도한 콘트라스트현상이 도리어 하늘을 배경으로 한 고목의 위엄과 장엄함을 부각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칠 만큼 공포감에 휩싸이게 한다. 정오의 순광順光에서 촬영한 청석靑石은 세월의 무상함과 풍상고초를 느끼게 하는 음울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다. 흐린 날이나 새벽의 사광斜光을 즐기는, 차가운 분위기를 선호하는 정도에게는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그러한 촬영효과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지향한 것은 아닐 테지만 예술이란 워낙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지 않는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찍은 사진이 나중에 마음에 들 때가 종종 있다.
 두 점의 사진을 놓고 정도는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사진을 정착액에 담갔다가 2~3분 뒤에 꺼내어 반듯한 면의 플라스틱위에 놓았다. 하늘의 꺼멓게 점으로 박힌 구름 몇 점과 역시 흑점으로 보이는 먼 산의 숲들을 표백시키면 고목의 형상이 한결 부각될 것이었다. 표면을 휴지로 닦은 후 표백제인 청산염을 화면의 다른 부분에 번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농도가 옅은 것부터 붓에 찍어 발랐다.
 15분쯤 지나 사진을 다시 정착액에 넣어 표백을 정지시켰다. 이런 과정을 원하는 화면이 얻어질 때까지는 몇 번 반복했다. 스파팅 과정까지 거쳐 인화지위의 미세한 흠집이나 얼룩까지 말끔히 제거하면 화면 전체의 톤을 조화시키자 사진은 제법 한 폭의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완성되었다.
 사진을 가지고 지상 카운터로 올라왔다. 햇빛 아래서 자세히 보는 순간 정도는 다시 한번 엄습하는 공포감에 전율했다. 고목은 나무가 아니라 무슨 괴물 같았고 청석은 무시무시한 위엄을 아니, 독기를 거느린 채 화면을 꽉 채우며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의 광기를 제압하는 자연의 어떤 거대한 무언의 위용이 과시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위엄 앞에서는 그 누구든 공손해지고 오로지 순종만을 해야 할 것 같다. 
 미모의 아가씨가, 천사 같은 은파랑이 이런 무시무시한 공포의 존재에 눈길을 돌리다니?!
 이것은 단순한 카메라의 농간일까 아니면 그녀가 포착하려 의도했던 피사체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파랑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공포를 보았으며 또 보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름다움과 공포!
 아름다운 마음과 눈으로 본 공포와 괴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인가. 자연을 인격화시키려한 것일까.
 단 한가지 만은 분명하다. 공포는 그녀의 관심사이다.
 느닷없는 이러한 결론은 잠시 정도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냥 파랑의 뜻과는 상관없는 카메라의 농간이라고 까닭을 달아주자. 그것이 파랑을 위해서도 정도를 위해서도 편안한 선택이었다. 정말 자연의 수려함을 본 그녀의 아름다움이 카메라의 무시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녀는 촬영에는 문외한이 아닌가.
 “오빠. 이건 무슨 사진이야? 어머, 무서워! 누가 이런 괴물을 찍었지.”
 어느새 등 뒤에 와서 어깨 너머로 사진을 건너다 보던 미경이 혼비백산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야, 이 싸가지 없는 계집애야. 너 지난밤엔 어딜 갔었냐? 또 중국집 배달 녀석이랑……”
 “오빠. 날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진남 씬 욕하지 마.”
 “이런, 이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젠 공개적으로 두둔까지 하냐. 너 정말 그 사람과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아빠와 죄다 일러바칠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오빠. 나 죽는 꼴 보지 않으려면 눈 한번 감아줘.”
 “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데, 넌 유부녀야.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 유부녀답게 행실을 똑바로 가져야 할 것 아니냐.”
 “살아만 있으면 남편이야. 남자구실을 해야 남편이지……”
 “구실을 하든 못하든 너희들은 법적으로 맺어진 부부야. 부부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갑자기 그들의 대화를 중단하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도는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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