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상심하지 마.”
 윤정은 놀라기는 커녕 미동조차 없다. 남편의 동정에 북받치는 그리움이나 슬픔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하고 심드렁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꿈속에서처럼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정도는 흠칫 놀라며 팔을 풀고 윤정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당신보다 전 저 사찰의 목탁소리와 함께 하고 싶어요.      
 그 말은 그렇게 들렸다.
 아내와 사찰 그리고 목탁소리!
 윤정은 왜 갑자기 목탁소리에 심취했을까?
 윤정은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던 발을 옮겨 드디어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가랑잎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가볍고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언덕위의 사찰 쪽을 향해,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밤의 계곡에 은근하나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기 시작했다. 윤정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인은 아내에게서 멀어졌고 그만큼 윤정과 목탁소리와의 거리는 좁아졌다.
 잠간 사이에 윤정의 모습은 먹물 같은 어둠 속에 잠겨버린다.
 갑자기 정신이 돌았나?!

 장례식은 소박하나 구색이 정연하게, 빈틈없는 절차대로 거행되었다. 대리석 비석에는 『고 박병술지묘』라는 비문과 그분의 애국자적 일대기를 새겨 넣었다. 봉분위에는 고운 잔디를 입히고 묘지주변에 기념식수도 했다. 워낙 서울의 동작동국립묘지에 안치할 조건이 충분했지만 고인의 유언에 따라 할머니의 무덤이 있는 고향마을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상경 길에 오를 때까지도 윤정은 침묵만 지켰다. 그녀의 눈길은 수시로 언덕위의 사찰로 향했고 법종法鍾소리와 목탁소리에 심취된 듯 귀를 솔깃이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정도는 운전 도중 룸미러 속으로 뒷좌석에 앉은 윤정이 가방 안에서 검은 가죽케이스를 씌운 할아버지의 일기책을 손에 들고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반짝거렸다. 연신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정도는 아직 고인의 유고를 보지 못했다. 저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기에 장례식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던 아내가 일기장을 보자 눈물을 흘릴까?
 호기심이 부쩍 동했지만 운전 중이라 빼앗아 볼 수도 없었다.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혔어?”
 룸미러를 통해 윤정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대답이 없다. 윤정은 말이라는 걸 아예 망각해 버린 실어증환자 같다. 아니면 죽음 앞에서 언어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말은, 언어는 죽음의 의미를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그저 인생을, 삶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계적 도구일 뿐이다.
 인생에는 정해놓은 길이 있는가?
 있다면 그건 어떤 길인가?
 고인이 그에게 남겼다는 유언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스친다.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정도라고 지어주셨다. 바를 정正자에 길 도道자이다.  그러나 그건 이름일 뿐이고 아버지의 소망일뿐이고 바른길 그 자체는 아니다.
 혹시 그 해답이 저 일기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고인은 나에게 당신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적은 유고를 물려주신 건지도 모른다.
 정도는 발에 힘을 주어 가속페달을 밟았다.
 빨리 귀가해서 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13  2장 38도선전투

1

 밤새 내리던 굵은 빗발이 새벽 4시경부터는 기세가 한풀 꺾이며 잔잔한 가랑비로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참호위의 갈참나무와 개암나무 싸리나무숲이 머금었던 콩알 만한 이슬방울들을 후드득-후드득-  떨어트린다. 철모위에 떨어져서는 퍽퍽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낸다.
 참호주변의 숲을 간단없이 때리는 가랑비소리는 평소 고요할 때면 분명하게 들리곤 하던 내린천의 물소리를 압도해버렸다. 최전방전투부대인 A중대가 주둔한 여기 519.5고지에서 내린천까지는 좌측방으로 겨우 1500m거리밖에 안된다. 내린천은 대대지휘소가 설치된 현리에서 방대천과 합류하여 B중대가 위치한 흙고개 방향으로 흘러간다. 밤새 퍼부은 호우로 불어났을 내린천은 조금 뒤면 자신의 우렁찬 목소리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박병술 일병은 참호바닥에 빗물이 질퍽하게 고여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 묻힌 계곡의 숲은 후줄근하게 젖은 채 졸고 있다. 멀리 자작나무숲만 희읍스름한 빛을 띤 채 싱싱함을 고집한다. 갈참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와 단풍나무들이 비워둔 숲 공간을 머루덩굴, 개나리, 버드나무, 개암나무, 싸리나무, 오미자덩굴들이 우거져 짙은 녹음을 이룬다.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연인가.
 그런데도 박병술은 총개머리를 부여잡고 밤잠을 설치며 여기서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삼라만상이 죄다 잠든 새벽의 고요함은 오늘도 38선상에는 어떠한 사변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게 하며 박병술의 신경을 느슨하게 했고 그것은 다시 권태와 졸음을 불러 못 견디게 의식을 침습해왔다.
 선채로 눈을 감고 졸음의 포로가 되려는데 느닷없이 어디선가 쿵-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B중대 방어구역인 서북쪽 흙고개부근에서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우는 것이려니 여기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쪽에서는 지금 폭우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C중대가 배치된 방동리나 진흑동 쪽은 조용했기 때문에 그 예측은 더욱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굉음은 더욱 요란하고 잦아졌고 번득이는 섬광이 북쪽 하늘을 벌겋게 달구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나 아닐까?
 망원경을 들고 북쪽을 관찰하던 민병기 소대장은 갑자기 거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지랄염병하고 자빠졌네. 잠도 못 자게 들볶아대고 있어.”
 “소대장님. 무슨 변이라도 일어난 겁니까.”
 박병술은 민병기 소대장의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난들 알 턱이 있어. 대대에서 아직 아무 연락도 없단 말이야. 보나마나 빨갱이새끼들이 또 도발하는 모양이지.”
 “번갯불이나 우렛소리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심상치 않은 징조니까 모두들 자지 말고 경각성을 높여. 내가 중대장님한테 가서 상황을 요해하고 올 테니까.”
 민병기 소대장의 군홧발에 참호 속의 고인물이 철벅철벅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대장이 자리를 비우자 소대원들은 금방 훈시를 잊고 다시 졸음에 빠져들었다. 새벽은 밤의 어느 시간보다도 졸리는 때이다. 그리고 38선에서의 국지전局地戰은 오늘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2연대는 벌써 옹진지구전투를 겪었던 전투부대이다. 중부전선에로 이동배치 된 뒤로도 소규모화력공방은 늘 있어온 터였다.
 박병술이 다시 졸음의 짓궂은 유혹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그가 딛고선 참호바닥이 드르릉- 진동했다.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는 고지의 뒷부분 가까운 곳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구치며 화광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돌덩이들과 흙 부스러기들. 나뭇가지들이 허공중에 날아올랐다가 참호 속에 투덕투덕 부산한 소음을 내며 쏟아져내렸다. 박병술은 저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머리부터 부둥켜안고 물이 질퍽한 참호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건 번개도 우레도 아니었다. 분명 강력한 야전포탄의 폭발음이었다. 
 포격은 그 한두 발에 그치지 않고 연이어 계속되었다.
 박병술은 이처럼 맹렬한 포사격은 난생처음이다. 하늘 땅을 뒤번지는 듯했다. 참호바닥의 고인물이 단솥안의 펄펄 끓는 물처럼 짜르륵- 짜르륵- 뜨거운 물방울을 튕겨 올렸고 뱃가죽이 지표면의 강한 진동에 충격을 받아 갈기갈기 찢기는 듯 얼얼해났다. 그의 전신은 삽시에 흙과 돌덩이들과 나뭇가지들로 덮여 무슨 무덤처럼 두둑하게 쌓였다. 고막이 파열됐는지 귀청은 기능을 상실한 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각이 드르릉거리는 진동과 투덕투덕 몸 위에 떨어지는 흙과 돌덩이들의 감각을 통해 폭발이 계속되고 있음을 감지할 뿐이었다. 잔등에 불덩이를 얹은 듯 달아오른 흙덩이들에서 열기가 확확 풍겼다. 매캐한 포연과 화약 냄새와 먼지에 숨이 꽉 막혔다.
 전쟁이다!
 이건 국지전이나 소규모공방전이 아니라 대규모군사작전이고 무력공격이다.
 다급한 중에도 이런 판단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죽음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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