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 잘지 기약이 없는 만큼 틈이 나는 대로 자꾸만 자두어야 한다. 전투 중에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졸음이다. 졸음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며칠 간의 후퇴 길에서 겪었던 피로와 기아, 공포와 졸음은 유령처럼 그의 뒤를 짓궂게 따라다녔다.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이 죽었고 국토가 위험에 봉착했다는 위기감도 졸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이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졌다.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진 군인으로서 해야 할 무언가를, 사명감을 졸음 때문에 망각할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 박병술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일념,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의 성욕도 군인의 사명감도 국민 된 애국심도 없이 그냥 피곤하나만을 느끼는 동물이었다.
 종일 욕설을 퍼붓던 민병기 소대장도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노그라졌는지 잠잠하다. 인민군이 105mm곡사포, 고사포, 야전포, 전차포, SU자주포의 포문을 일제히 열고 아군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한 건 자정이 가까워 오는 깊은 밤중이었다.
“엎드려! 모두 참호바닥에 대갈통을 틀어박고 엎드려! 뒈지고 싶지 않은 놈들은.”
 요란한 폭음 속에서 민병기 소대장의 고함소리는 모기소리보다도 더 아득하게 들렸다.
 박병술은 소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써 본능적으로 참호바닥에 엎드렸다. 순식간에 돌멩이들과 흙덩이들이 철모위로 날아 떨어지며 투덕투덕 둔탁한 소리를 냈다. 고지는 삽시에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불바다로 변했고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귀청이 멍해졌다.
 10여 분 간의 맹포격이 끝나자 이어 적군의 전차부대와 보병부대가 공격을 개시해왔다. 인민군의 일부 공격부대는 아군의 방어구역을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적군의 우세한 병력과 강력한 화력망 앞에서 국군의 저항은 중과부적이었다. 우선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탄 때문에 고개조차 쳐들 수 없었다. 벌써 일부 사병들은 적탄을 맞고 참호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사격. 사격하란 말이야. 꿩 새끼처럼 대가리를 참호바닥에 처박고 있지 말고. 이 새끼들아!”  
 민병기 소대장의 명령은 아무 효력이 없었다.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사격을 해보았자 눈먼 총질일 것이다.
 그래도 박병술은 대담하게 고개를 쳐들고 참호 아래를 주시했다. 적군이 싯누렇게 능선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만세의 함성이 어찌나 우렁찬지 그 기염에 저도 모르게 기가 꺾인다. 돌격대의 선두에 군기와 인민공화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 기세를 꺾을 어떠한 힘도 없을 거라는 것을 느꼈을 때 박병술은 절망에 빠졌다. 인민군은 승리의 신심에 넘쳐 사기가 충천해 있고 국군은 그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대세의 흐름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박병술은 용기를 내어 총을 들고 적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소대장은 총탄에 쓰러진 기관총수를 대신하여 기총소사를 맹렬하게 퍼붓고 있었다. 맨머릿바람의 그가 내지르는 고함소리는 요란한 기관총소리를 압도할 만큼 악청이었다.
 “죽여라, 죽여! 이놈들아, 뒈져라 뒈져! 쏴라.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괴성이 터져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여기저기 참호 속에 은폐해 있던 사병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사격을 시작했다. 박병술은 사격할수록 흥분했다.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어린애처럼 환성을 질러댔다. 싸움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전투라는 것이 이렇듯 신명이 날줄이야. 방아쇠를 당기고 수류탄을 투척하고 환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금방 목이 쉬어 고함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아군의 저항이 효력을 발휘한 듯 적들의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산병선으로 흩어져 나무나 바위 뒤에 은폐한 채 사격이 뜸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방의 부대들이 인민군의 파죽지세의 공격에 와해된 채 무질서하게 퇴각해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이 기회를 틈타 또다시 기관총의 맹렬한 화공엄호를 받으며 돌격을 재개했다. 적탄에 쓰러지는 장병들의 수가 급증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일부 사병들이 진지를 이탈하여 후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어딜 도망쳐?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어서 돌아와!”
 민병기 소대장은 노발대발하여 공포탄까지 쏘아댔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병사들의 동요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죽음의 공포는 소대장의 엄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이미 박병술의 신변에는 남은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느새 적군의 선두부대는 아군의 진지위에까지 뛰어올라와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뛰어. 어서 도망가란 말이야. 이 멍청한 놈아! 다들 줄행랑을 놓는데 눈깔에 안 보여? 바보, 등신!”
 민병기 소대장이 아직도 참호 속에서 망설이는 박병술의 엉덩이를 군홧발로 냅다 찬다.
 박병술은 뭉그적뭉그적 참호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어둠 속 어딘가를 향해 허둥지둥 달렸다. 갑자기 누군가의 억센 팔이 그의 목을 집게처럼 꽉 껴안았다.
 “이 괴뢰군 종간나새끼! 도망치긴 어디로 도망침메?”
 올가미가 조여드는 듯 숨이 꺽 막히며 몸을 비틀거렸다.
 인젠 꼼짝 없이 죽었구나. 하고 모든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퍽!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나무뿌리처럼 목을 칭칭 휘감았던 팔이 맥없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내가 뒈지지 말라했지. 구역질이 나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민병기 소대장이 얼굴에 튕긴 핏방울을 팔소매로 뻑뻑 문지르며 씩 웃고 있었다.
 “소대장님!”
 목구멍으로 뜨거운 불덩이가 불쑥 치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뿌연 그림자가 불쑥 뛰어나오더니 뾰족한 총창 끝이 민병기 소대장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박병술은 무심결에 소대장의 어깨를 떠밀었다. 창끝은 그들 사이에 생긴 공간을 빗 찍고 휙- 지나갔다. 적이 균형을 잃고 몸을 비틀하는 순간 박병술은 총개머리로 그의 정수리를 조준하고 힘껏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군인은 땅바닥에 코를 박고 꼬꾸라졌다.

17

“잘했어. 짜식!”
 민병기 소대장은 땅바닥에 너부러진 적군의 등에 총창을 푹 꽂았다가 슬쩍 비틀어 빼며 칭찬한다.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쫙 뿜겨져 올라와 두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비린내가 확 풍겼다. 민병기 소대장은 입안에 튕겨 들어간 핏방울을 퉤퉤 땅바닥에 뱉어냈고 박병술은 한참이나 허리를 구부리고 마른 구토를 했다.
 “자, 인젠 뛰는 거야. 죽기내기로. 병서에는 도망가는 것도 군사계략 중의 하나라고 했으니까 군인은 싸울 줄도 알고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해. 36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 봤지?”
 “네.”
 “뒈지면 안돼. 알았지. 등신 같은 놈아.”
 가시덤불에 얼굴이 할퀴어 피가 흘렀고 나무그루터기가 군화 밑창을 뚫고 들어와 발바닥을 따끔따끔 찔렀지만 그런 걸 아랑곳 할 경황이 없었다. 오로지 남쪽방향을 향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렸다. 엎어지고 뒹굴고 했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야 해. 똥 무더기위에 굴러도 살아야 한다고 이놈아!”
 “그런데 소대원들은 다들 어디 갔습니까? 소대장님과 저만 달랑 남았으니 말입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통에 말마디들은 토막토막 동강났다.
 “뒈질 놈은 뒈졌을 거고 살 놈은 살았을 테지. 지금은 남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살아야 저놈들과 또 싸울 거잖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집착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쟁 첫날 현리에서의 포격과 철수 때에도 삶에 대한 집착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더 컸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박병술은 삶에 대한 미칠 듯한 미련에 휩싸여 있었다. 진지를 버린 군인, 패주병, 군인의 사명감을 망각했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느끼지 못했다. 삶의 의욕은 그의 의식과 행위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신비한 위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냥 본능 그 자체뿐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진리가 있으랴 싶은 자기변명 같은 것도 없었다.
 갑자기 주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박병술이네가 입을 다물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그들의 인기척을 포착한 뒤였다.
 “서라! 도망치면 쏜다. 꼼짝 말아!”
 등 뒤에서 몇몇 군인이 강한 이북말씨로 외치며 뒤쫓아 왔다.
 “쏠 테면 쏴라. 누가 무서워 할줄 아느냐. 개새끼들아!”
 민병기 소대장은 죽음을 눈앞에 둔 위기상황이라기보다는 전쟁유희에 심취한 어린에 같다. 달리면서도 연신 적군과 신나게 설전을 벌인다.
 “악질 반동새끼들! 어디 죽어봐라!”
 따따따- 따따따-
 기관단총연발사격소리가 귀청을 찢는 순간 민병기 소대장은 박병술의 등을 콱 떠밀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마침 그들 앞에는 가파른 비탈이 막아섰다. 무작정 비탈 아래로 몸을 내던져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총탄이 연이어 그들이 굴러 내려간 뒤편 땅바닥에 푹푹 박혀들었고 더러는 바위에 맞으며 새파란 불꽃을 튕긴다.  
 “난 죽지 않아. 총알이 날 피한단 말이야.”
 민병기 소대장은 지어 너털웃음까지 껄껄 웃어댄다.
 그렇게 뒹굴다가, 소대장의 너털웃음소리를 듣다가 박병술은 갑자기 육신이 허공중에 번쩍 떠오름을 느꼈다. 어딘가로 높이 떠올랐고 그 다음은 급속하게 아래로 추락했다.
 “이놈아. 어딜 가? 거긴 낭떠러지란 말이야. 저 바보, 등신 같은 자식! 뒈지지 말라는데 끝내……”
 민병기 소대장의 목소리는 점점 귓전에서 멀어졌고 드디어는 들리지 않았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병술은 거대한 충격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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