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족문학인 소개 1 - 박옥남편]


형님이 죽었다.
나와는 사촌간이고 우리 밀양박씨문중에서는 장손인 형님이 죽은것이다. 사촌간이라지만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친구같이 쭉 함께 자랐기에 정으로 치면 친형님 못지않은 사이이다. “형님이 돌아갔음”이라는 문자메일이 낯선 전화 번호로 내 핸드폰에  들어왔을때 나는 그것이 바로 사촌형님의 부고메시지임을 알수있었다. 사람이 어느땐가는 꼭 죽는다는 사실만큼 더 확실한것도 없고 또 언제 죽는가하는것 보다도 더 불확실한것도 없다지만 언제부턴가 사촌형님이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죽을것이라는 상서롭지 못한 예감을 나는 늘 지니고 있었기에 부고메일을 읽는 순간에도 놀라움 보다는 드디여 올것이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한발 더 앞섰다.
    예상했던 죽음이였기에 놀라움은 없었지만 사람이 어렵게 한번 태여나서 너무나 짧은 생을 살다 가누나하는 아쉬움은 뻐스를 탔다가 너럭배로 갈아타고 다시 뻐스로 바꿔타기를 거듭하며 문상하러 가는 도중의 다섯시간 내내 가슴에서 떠나주질 않았다. 주마등처럼 언뜻언뜻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차창밖은 여름내 극성을 떨던 록색이 슬밋슬밋 자취를 감추고 누릿누릿한 가을자락이 언죽버죽 자리를 깔기시작하는 초가을 풍경이다. 높은 곳은 수수와 옥수수로 간작이 되여있고 낮은 곳은 벼밭인데 멀리로 밀어보는 벼밭은 시골집 온돌장같이 반듯하고 일매지다. 수전농사를 전혀 할줄 몰랐던 사람들이 어느새 조선사람 뺨칠정도로 벼농사에 미립이 터서 올해도 작황이 무척이나 좋아보인다.


   큰아버지의 주선하에 신립이라고 부르는 새마을 소학교 교원으로 부임되는 아버지의 등에 엎혀 이고장으로 이사를 들어오던 때도 바로 이 계절이였었다. 달랑 이불 보따리 두개와 가마솥 두짝뿐인 이삿짐도 짐이라고 큰아버지가 마련해 내보낸 소달구지가 현성 부두가까지 마중을 나오긴 나왔는데 때아닌 때에 왕창 쏟아부은 장마비로 죽가마가 된 농토길에 수레바퀴가 빠져들어 수레우에 탓던 사람들이 내려 밀고 당기고 씨름을 하며 걷다보니 우리일행은 땅거미가 뉘엿뉘엿 깃드는 저녁녘에야 마을에 들어설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의술 하나를 보고 큰아버지가 이끄는 한두럭의 이민부대까지 말없이 받아주고 신풀이를 할 생땅까지 무상으로 제공했던 이웃마을의 중앙툰사람들, 그사람들에겐 다 죽어가는 사람도 되살려 낼만큼 좋은 의술을 가진 우리큰아버지를 얻는것이 다섯가구의 이민호를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큰 대가를 치를만큼이나 대단한 홍복이였던가보다. 그렇게 발을 붙인 이민자들의 작은 부락으로 그후 육속 새 이민호가 밀고 들어오다보니 나중엔 제법 자그마한 한 동네를 이루게 되였는데 그러다나니 자연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이 필요했던것이다. 일색 한족인 중앙툰과 신작로 하나를 사이놓고 이웃해 앉은 신립촌은 그때까지만해도 열세가구뿐이였다.
우리의 이삿짐은 일단 큰아버지네 집에 부리워졌다. 원목 몇가치만 있으면 지을수있는 초가집이래도 그땐 형편이 여의치않아 열세 가구중 독집을 갖고 사는 집은 의사인 우리큰아버지네 뿐이였다. 두집 식구가 북적대는 거처도 거처려니와 중앙툰 한복판에 덩실하게 지어놓은 그 마을 회의실 옆칸이 진료소로 쓰기엔 안성맞춤 하다며 큰아버지는 큰아버지네 안방에 진설했던 의무실을 중앙툰으로 옮겨갔다. 중앙툰 사람들도 모두 퍽들 좋아하는 눈치였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랄가. 큰아버지는 하루치고 거의 대부분 시간을 진료소에 나가 있었다. 게다가 큰아버지의 일손을 도와 간호사겸 산파노릇까지 닥치는대로 맡아하는 큰어머니까지 늘 의무실에 나가 있었기에 사촌형님은 하루종일 중앙툰에 가서 살다싶이 했다. 그랬기에 사촌형님은 중국말을 참 잘 했다. 얼음우에 표주박밀듯 입만 열었다하면 중앙툰애들도 감당하지 못할 말들을 주어섬겨 어른들이 혀를 차게 만들군했다.
의사에대한 무한한 공경심을 갖고있던 중앙툰 사람들은 의사의 아들인 형님을 왕세자 모시듯 떠받들었다. 찰옥수수떡이며 해바라기씨며 들꿩고기며 하여간 저희들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음식은 잊지않고 남겼다가 형님에게 가져다 주었다. 사촌형님은 장난이 심해서 쩍하면 고양이처럼 그들의 뜨락안에 있는 건초더미며 곡식다락우에 기어올라가 난장판을 만들어놓기도 했고 길가에 놀러나온 그동네 거위떼들을 휘젓고 다니며 동네안을 소란스럽게 굴기도 했지만 중앙툰사람들은 별말없이 넘어가주곤했다. 적령기가 되였는데도 사촌형님은 학교를 가지않고 개구장이처럼 두동네를 휩쓸고 다니며 자유자제로 놀기만했다. 그는 부모님들의 지청구를 별로 겁내지 않아했고 보암보암 큰아버지도 그런 아들의 방종을 별로 개의치않는 눈치였다.
한살아래인 내가 소학교에 입학을 하던날, 아버지는 마을길에서 신나게 뛰여놀고있는 사촌형님을 붙들어 나와 같은 학급에 입학시켰다. 며칠이 안되 사촌형님은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두동네를 넘나들며 실컷 놀아야겠는데 꼼짝없이 교실에 앉아 공부를 하려니 자연 오금이 쑤셨던 모양이였다. 그일로 형님은 우리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울고싶을때 뺨맞은 격으로 그바람에 형님에겐 학교에 가지않을 핑게거리가 생겼다. 삼촌이 때리니까 삼촌이 있는 마을학교엔 절대 가지않겠다고, 굳이 보내려거든 중앙툰에 있는 한족학교에 보내달라고 제쪽에서 장훈을 불렀다. 의술은 좋아도 외아들에대한 교육이 등한했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아들의 이유같지않은 이유를 꺾지 못하고 그가 하자는데로 중앙툰 한족학교에 사촌형님을 옮겨넣는데 합의를 보았다. 모르긴몰라도 사촌형님의 운명은 그때 벌써 중앙툰사람들과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인연으로 연결이 되였던게 아닌가싶다.


마을밖에서부터 중앙툰사람들이 장례의식때마다 불어대는 새납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어렸을때부터 볼라니 중앙툰사람들은 결혼 희사에도 새납을 불었고 장례식때도 새납을 불었다. 희사때 부는 새납곡과 장례식때 부는 새납곡의 차이를 나는 아직 잘 모른다. 그저 좋은날 들으면 귀에 즐겁고 슬픈날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울적해지는 새납소리이다. 보나마나 사촌형님의 장례가 중앙툰식으로 치루어지는 모양이였다.
마을길 한복판에 고사를 지내듯 제상이 진설되여있었다. 다리긴 네모상우에 사발만큼 크게 빚어 찐 밀가루빵 세개와 주먹만한 사과 세알 그리고 두눈이 딱 붙어버리도록 잘 삶긴 돼지머리가 통째로 올라있었다. 상앞쪽에 놓인 향로에서는 실오리같은 연기가 끊임없이 가물가물 하늘로 피어오르고있었다. 마을안에 상이 있음을 하늘과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알리는, 말하자면 효시같은 제사상이였다. 그옆으로 새납군 둘이 나란히 비껴서서 신들린 사람들처럼 새납을 불고있었다.
 내가 당도했다는 기별을 듣고 형수되는 여자가 눈물도 없는 마른곡을 하며 나를 맞았다. 몇번째로 맞아들인 여자인지 그 번지수가 얼른 가늠이 잘 안되는 사촌형님의 아내다. 중앙툰에 본가집을 둔 이 여인은 다리는 훤칠하니 길었으나 무척이나 복이 없어 보이는 그런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나이로 말하자면 사촌형님과 띠동갑쯤이나 될, 아니 그보다도 한참 더 어리면 어렸지 긍정코 더 많지는 않은 그런 앳된 연령의 여자다. 하지만 큰아버지가 쌓아두고 간 재산을 다 말아먹고 병든 몸땡이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형님의 옆에 오늘까지 있어주었다는 그점 하나만으로도 이여자에게 형수대우를 아니해줄 이유가 나에겐 없었다. 가문은 넓어도 한국이다 일본이다하며 자기 가고싶은 곳으로 다 가버리고나니 문상을 올 사람도 없던차 시댁쪽 사람이라고는 유일하게 나타난 나의 출현이 내심 반가웠던지 형수는 구태여 묻지도 않는 말들을 쑤왈쑤왈 늘어놓았다. 장례식을 우리식으로 치루려고 했지만 어떻게 하는건지 알수없어서 일단 자기네 식대로 시작하게 되였다나. 
사촌형님의 빈소는 객실 한쪽에 차려져 있었는데 망자의 유체는 천금을 대신한 백포 한자락으로 덮혀져 있었다. 키가 큰 탓인지 아니면 백포가 짧은 탓인지 두발이 감추어지지 못하고 삐죽하니 밖으로 나와있었는데 손으로 누빈것같은 커다란 검정 헝겊신이 신겨져 있었다. 유치하고도 화려한 색상의 연꽃무늬가 신바닥에 다닥다닥 수놓아져 있는게 특이했다. 자는 시간 외에는 좀해서 신발을 잘 벗지않는 중앙툰 사람들이라는걸 익히 알곤 있었으나 죽어서 누워있는 사람에게까지 신발을 신겨놓는 풍습이 있는줄은 처음 알았다. 하긴 다시는 돌아올수없는 먼길을 떠나는데 신발이 없이 어떻게 가랴? 백포자락을 젖히고 형님의 얼굴을 배알하려고 하자 나쁜 병으로 임종을 맞은만큼 아니 보는게 좋을듯 하다며 형수가 내손을 말렸다. 남달리 멋있었던 그 얼굴만 머리속에 남기는것도 그리 나쁠것 같지않다는 생각에 나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왼팔에 검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대여섯명 쓸어들어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알은체를 하는데 도대체 알만한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완장을 두른것으로 보아 일반 조문객은 아닌것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초면인걸로 미루어 보면 묻지않아도 형수의 친정쪽 푸내기들임을 지레 짐작할수 있을것같았다. 사람은 득실거렸지만 상가집엔 곡이 없었다. 여자는 많이 거쳐갔어도 자식은 많이 낳질않아 죽은후 울어줄 상주도 없는 박복한 종말로 형님의 인생극은 드디여 그 막이 내려진것이다. 내 기분을 읽었는지 검은 완장을 두른 사람중 하나가 다가와 곧 곡을 해줄 사람들이 들이닥칠터이니 수고비로 내줄 돈만 준비해 두면 된다고 아뢰였다. 곡을 해줄 사람들이라니? 그러니까 남의 울음소리를 돈을 주고 사기로 했다는 말인가? 옷을 사고 물건을 사고 집을 사고 땅을 산다는 말은 들었어도 울음소리를 사고 파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참말로 나에겐 금시초문이였다.
이윽고 울음군들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소위 울음군으로 왔다는 아낙들이 형수가 건네주는 흰 헝겊띠를 받아 저희들의 허리를 질끈질끈 질러 묶으며 어떻게 울어야 하냐고 물었다.
“오라버니라고 우세요.”
형수가 말했다.
“오라버니요? 알았수다.”
울음군중 대장인듯한 아낙이 알았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곡을 하려면 배가 고프니까 일단 먼저 먹을걸 좀 달라고 부탁했다. 형수는 부억간을 향해 밥상을 좀 봐내오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밥 소반이 챙여져 나왔고 밥상을 받기 바쁘게 아낙들은 걸신이 들린 사람들처럼 어느 음식도 마다치않고 아귀아귀 입안에 쓸어넣었다.
“많이들 먹어두라구. 시작하면 배가 고파도 중도에서 쉬거나 할순없으니까.”
아낙 하나가 손에 남은 찐빵 쪼각으로 접시바닥에 남은 반찬국물을 꾹꾹 찍어 입안에 걷어넣으며 동료들에게 충고를 했다. 일단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장아낙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길한복판에 차려놓은 제전상앞으로 걸어나가며 용캐도 무척이나 빨리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따꺼야(오라버니)! 어쩜 이리 간단말이우? 따꺼야, 너무 일찍 가시는구려!”
약속이나 한듯 부하들도 일제히 울음소리를 합류했다. 저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호곡을 하는데 그 소리가 조잡해서 가까이에서 들으니 까마귀떼가 울부짖는것 같았다.
이상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곡성이였든 곡성이 들리니 상가집 분위기가 제곬으로 들어서는상싶어 마음이 편해지는건 웬일일가? 돈을 주고 산 아낙들의 곡성이 마중물이 되여 드디여 내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살 연상의 형님장례에 한살 연하의 내가 유일한 상주가 되여 우두커니 서있다는게 더없이 처량하기만 했다.
“크게, 더 크게 울라구. 소리가 크면 돈을 덧얹어 줄테니까.”
검은완장을 두른 사람이 울음군 아낙들앞에 다가서서 자꾸자꾸 더 큰 울음소리를 주문하는 소리가 창너머로 들렸왔다. 옆방에서는 검은완장을 둘렀던 사람들이 완장은 고사하고 입었던 옷가지도 성가신듯 웃통들을 훌떠덕 벗어부치고 앉아 열심히 마작쪽을 버무리고 있었다. 버무릴때마다 참새가 우짓는듯한 조잡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마작이라고 불렀다는 중국사람들의 이 놀이는 요즘 손가진 사람들은 모두 즐겨 노는 도박놀이이다.
“두시간을 울었는데 어떻게 할갑쇼? 한판 더 하랍니까?”
금방까지 사설을 하며 팔자에도 없는 상주노릇을 열심히 하던 울음군 아낙하나가 제상앞에서 물러나 열려진 창너머로 머리를 들이밀고 마작을 놀고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까짓거 한판 더 하지뭐.”
“잘들 하라구. 열심히들 울어주면 부탁하지 않아도 다음번 일거리를 내가 알선 하리다.”
마작군들은 고개도 돌리지않고 저마끔 한마디씩 뇌까렸다.
시간당으로 계산되는 울음장사는 1분의 오차도 없이 꼬박 네시간을 울어주고는 울음값으로 주는 돈을 받아챙기기 바쁘게 내가 언제 울었더냐싶을 정도로 밝은 표정들이 되여 희희락락하며 물러들 갔다.

중앙툰학교를 다니면서 형님은 친구도 중앙툰의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였고 음식도 그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더 즐겨 먹었다. 설이 되면 우리어머니와 큰어머니는 몇날며칠 밤을 새워가며 식구들이 먹을 증편이며 시루떡이며 엿과자며 청주따위들을 일일이 손수 만들었다. 그러나 사촌형님은 그런것을 입에 대지도 않고 중앙툰으로 건너가 그사람들이 빚은 물만두며 쏸채볶음따위를 주문해 먹었다. 중앙툰사람들은 그믐날이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물만두만은 꼭 빚어먹는 철칙같은 관습이 있다. 물만두가 옛날의 은전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사람마다 그것을 먹어야 새해의 부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돼지뼈다귀를 토막쳐 넣고 신배추절임과 함께 오래오래 끓인 쏸채메뉴는 사촌형님이 특히 즐겨먹는 요리이다. 쏸채를 다 건져먹고 남은 뼈다귀에 다시 새 쏸채를 썰어넣고 또 끓이고 그러면서 몇끼씩 두고두고 우려먹는 중앙툰 사람들의 대표음식인 그것이 어떻게 되여 형님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던가 본다.
사촌형님은 생김생김은 깔밋하게 생겼어도 먹는 음식습관은 아주 소탈했다. 그것은 아마 자기 어머니를 닮지 않았나싶다. 우리큰어머니의 식성이 그렇게 까다롭질 않았었다. 큰아버지대신 동네 병자회진을 나가거나 접산을 나간 큰어머니를 중앙툰사람들은 구세주 모시듯 여간 대접을 잘해주지 않았다. 큰어머니는 처음엔 병자의 상처를 처치하거나 아기를 받느라고 손과 옷에 묻은 피냄새를 말리기위해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는 술재간이 늘어 나중엔 남편인 큰아버지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애주가가 되여버렸다. 술 한잔이 들어가면 큰어머니는 중앙툰사람들의 그 어떤 음식도 가리지않고 맛나게 먹었고 그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담소도 잘해서 중앙툰뿐만아니라 린근 부락에서들까지 찐제(김언니)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중앙툰사람들은 큰어머니에게 대접할 음식을 장만할때는 사뭇 위생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큰어머니가 쓸 젓가락이며 밥공기들을 부러 행주로 열심히 빡빡 닦기도 했는데 그들의 행주래야 원색을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검게 그을은 헝겊으로 되여있다. 죽고나면 살아있을때 쓴 물의 량만큼 고생을 겪고야 비로소 천당이란데를 간다고 믿고 있기에 중앙툰사람들은 물을 람용하지않는 습성이 생겼다고한다. 아무튼 사람마다 씻고 닦고 하는 일을 잘 하지않는것이 바로 중앙툰사람들이였다. 보기에도 구질구질한 그런 헝겊으로 식기를 쓱쓱 문질러 담아주는 음식도 큰어머님은 개의치않고 맛나게 먹었다. 면역력이 생겨나면 다 괜찮을 거라며 병자를 돌보는 사람답지않은 소탈한 메너로 슬쩍슬쩍 건너뛸줄도 알았다. 중앙툰치고 그런 행주래도 갖추고 사는 집은 그나마 괜찮은 집이다. 중앙툰사람들은 행주 대용으로 몽당빗자루를 많이 썼다. 씻으려는 식기를 물속에 넣고 손가락으로 식기를 빙글빙글 돌리고 다른 손에 든 몽당빗자루로 그릇을 쓸어 씻기에 애당초 행주따위가 필요없다. 옥수수전병떡을 먹을때는 더욱 가관이다. 미리 구워놓은 옥수수전병이 메말라서 먹기에 거북하면 누긋누긋하게 하는 방법으로 물을 뿌려 재웠다가 먹기도 하는데 바로 그 몽당빗자루끝에 물을 묻혀 분무를 했으니말이다.
사촌형님은 그렇게 보기에도 께름칙한 음식을 군소리 한마디 없이  얻어먹고는 그사람들과 어울려 주패나 마작을 놀군했다. 중앙툰사람들은 자기집에 온 손님에 대해서는 지극히 열정적이고도 극진하다. 그 뜨거운 열정에 형님의 구척신장이 매일 녹초가 되여 있었던게 아닌가싶다. 어쩌다 형님을 따라 놀러를 가보면 중앙툰사람들은 우리가 들어서자 바람으로 담배부터 권했다. 긴 장죽을 입에 넣고 뻐끔뻐끔 빨던 늙은이들도 자기가 피우던 대통에 잎담배를 다시 꽁꽁 쟁여 불까지 붙여 우리에게 넘겨주군했다. 마다하면 그렇게 내민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것이 된다며 사촌형님은 그걸 받아들고 제법 감칠맛있게 몇모금 빨고는 다시 주인장에게 넘겨주군했다. 그러나 나는 도통 그것을  내입에 넣을수가 없었다. 평생 치솔질 한번 하지않아 누런 치석이 꽉 낀 이발로 즈려물고 있던 그들의 그 댓찐투성이의 긴 장죽부리를 내 입속에 덥석 밀어넣을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섣달그믐날, 저녁밥이 끝나면 사촌형님은 일찌감치 중앙툰으로 달아나군했다. 굿구경을 간다고했다. 처음엔 난치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병자네 집에서부터 악귀를 몰아낸답시며 벌리군하던 푸닥거리였는데 구경거리가 별로 없던 그세월 그믐날 저녁이 되면 온마을사람들이 모여 오락처럼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구경을 하다보면 날이 새는줄도 몰라 사촌형님은 초하루날 아침 차례제를 지낼때까지도 집에 돌아오질않았다. 그래서 늘 우리더러 찾아다니게 했는데 찾아가 보면 형님은 매캐한 담배연기가 자오록한  방안에 다리를 틀고앉아 사만이라고 자칭하는 뚱뚱하고 살집이 좋은 아낙이 지절대고있는 이야기에 푹 빠져 우리가 들어서는것도 감감 모르고 있었다. 물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아낙은 방울을 주렁주렁 단 허리를 왈랑절랑 내흔들며 미친년처럼 봉당에서 춤을 추기도하고 손에 든 북을 투당투당 두드리며 지랄병하듯 방안을 휩쓸기도 하는데 입으로는 연신 포함을 내질렀다.
“네놈은 전생에 불여우였어! 여자로 태여났으면 열두명의 남자를 호리고도 남았을 놈이였는데 다행히 남자로 태여났구나! ”
그러면서 호랑이신이 내린 신부체가 되였다며 범처럼 날뛰면서 두팔을 쫙 벌리고 이사람 저사람을 덮치기도 하고 천정이 높다낮다하며 길길이 올리솟구치기도했다. 그렇게 신명이 나서 요동질을 할때마다 허연 허리군살이 짜른 옷깃밑으로 주체할수없이 흘러나와 구경군들의 눈을 부시게 했고 그러는 아낙을 바라보며 구경온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기도했다.
“네년은 채죽지않은 시아비를 내다 버렸어! 그 아비귀신이 널 찾아왔다.”
사만이 이번엔 문설주에 기대여서서 흥미진진하게 구경에 빠져있는 동네집 아낙의 면상을 삿대질하며 무섭게 호령을 했다. 그아낙은 갑자기 낯빛이 사색이 되여 흙봉당에 풍덩 주저앉았다. 
“이년아, 네년이 한짓을 네년이 더 잘 알겠다?”
이번엔 이상하게도 사만의 목소리는 고령의 로인같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바뀌여있었다.
“용서해주세요!”
동네집아낙이 두손을 싹싹 비비며 애걸을 했다.
“용서를 받고싶냐?!”
사만은 계속 허스키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죽을 죄를 졌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좋아! 그러면 돌아오는 귀신날 자정에 잊지말고 마을복판 네거리에서 곡을 하며 지전을 태워다구. 네년이 날 준비없이 저세상으로 쫓아냈기에 난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몸이 되였다. 억울하도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여인은 하라는데로 하겠노라고 연신 사만의 발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집안은 방금과 달리 숙연한 기분이 되였다.  
“형님, 빨리 가기오. 차례제 지낼시간이오.”
내가 불러도 사촌형님은 얼른 엉뎅이를 때지않고 미적대며 번마다 그 장소를 뜨기를 아쉬워하군했다. 차례제 시행절차는 언제나 그러하듯 큰아버지와 아버지 다음으로 사촌형님과 나를 비롯한 우리형제들의 순으로 이어졌다.
“우린 언제까지 이 제를 지내야하우? 저레 중앙툰 사람들처럼 종이돈이나 팍팍 태워주고 말기우. 간단하게스리.”
사촌형님은 자기순번을 기다리는 사이 큰어머님을 향해 늘 이렇게 구시렁거렸었다. 하긴 사촌형님과 내가 태여나기도전에 벌써 고인이 되여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님이시니 사촌형님이나 우리형제들 모두에게 별로 특별한 정이 없기는 매일반이였다.
중앙툰에는 사촌형님이 양어머니라고 부르는 과부가 있었다. 중앙툰사람치고 위생이 그중 깨끗한 여인이였는데 생김생김도 그랬지만 맘씨가 얼마나 후더운지 관음보살 같았다. 큰아버지네가 처음 이곳에 발을 붙일때 집이 없어 한동안 이 여인네 집 곁방을 빌려 있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큰어머니는 그 여인과 언니동생하며 무람없이 가깝게 굴었던 모양이였다. 설이 되면 큰어머니는 잊지않고 찰떡과 엿따위를 그 여인네 집에 한보자기씩 싸보내주었고 그러면 그 여인은 답례로 찰옥수수 찐빵이며 자기절로 심고 가꾸어낸 해바라기씨따위를 부대드리로 날라왔다. 가령 큰어머니가 잊고 먼저 보내지않아도 그여인은 절대 빼먹지않고 꼭꼭 보내올만큼 마음이 꾸준하고 토마토처럼 속이나 겉이나 늘 일매진 여인이였다.
사촌형님은 그집을 제집보다도 더 무람없이 드나들었다. 그집에는 쑈화라고 부르는 무남독녀 외딸이 있었는데 눈매가 얼마나 고운지 놀이감 인형같았다. 양쪽으로 갈라 땋아느린 두가닥 머리태는 잔등을 넘어 허리까지 치렁치렁했다. 어느날 사촌형님이 쑈화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두동네에 쫙 퍼졌다. 열아홉살 먹도록 아들의 방종을 수수방관만 하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급기야 사촌형님앞에 빨간 신호등을 추켜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빨간불로 거침없이 내닫던 사촌형님의 일상행보에 브레이크가 걸리며 금속과 금속이 마주 긁힐때처럼 아츠러운 소리를 냈다. 집안이 벌둥지같이 뒤집혔고 부모와 자식간에 의견 격돌이 생기며 서로 지지않으려고 마음속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또 싸웠다. 무기만 들지않았을 뿐이였지 집안은 매일 전쟁판같이 화약내가 진동을 했다.
결국 쑈화를 버리지않으면 부모자식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마지막 장훈쪽을 던져서야 우줅이기만 하던 사촌형님의 기세가 드디여 잠누룩해졌다. 큰아버지의 경제적 후둔이 없는 고립된 생활고를 헤쳐나갈수 있을만큼 사촌형님은 자립성도 없었고 근면한데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무풍지대에서 근심걱정 모르고 무위도식하며 살아온 생활습관을 일시에 내여버릴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였다. 적당한 부족과 극복할만한 가난이 오히려 사람을 빨리 철들게 하고 인간을 완성시키는 법인데 형님은 죽는날까지 부족이라는 낱말을 모르고 살았으니 그걸 보면 사촌형님은 분명 천생 부모복만은 타고난 사람같다.
사촌형님이 잠시 주춤해 있는 사이 집안에서는 사촌형님의 혼사를 서둘렀다. 더이상 천방지축 날뛰지 못하게 고삐를 맬 든든한 말뚝을 마련할 셈들인것같았다. 매파들이 나서고 집안 어른들이 모여 퍼즐 맞추듯 이리저리 재고 맞추고 상론한 결과가 동네안에 있는 농가집 처녀와 결혼을 시키는 쪽으로 합의가 났다. 처녀는 허리가 긴 반면에 다리가 좀 짜른것이 흠이면 흠이랄가 그래도 마을치고는 인물도 제일 환했고 친정집 또한 소박하고 무던한 집이여서 우리 박씨가문의 장손 며느리감으로는 안성맞춤인듯 했다.
사촌형님이 결혼하는 날 신립촌과 중앙툰사람들은 물론 린근마을사람들까지 결혼식을 구경하러들 와서 뜨락안이 터질지경이 되였던 기억이 난다. 축의금대신 들고 온 세수수건이며 양말이며 옷감따위가 안방에 차고넘쳤고 실탄자만해도 여덟개나 들어와서 동네아낙네들이 입을 딱 벌렸다. 중앙툰사람들은 콩기름이며 노루고기같은 방물을 들고왔고 큰어머니의 손을 빌어 해산을 했던 사람들은 보온병이며 거울같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치품이였던 물건들을 결혼선물로 사들고와서 전례없는 극성을 떨기도 했다.
결혼날 저녁 전례대로 동네 청년들이 모여 동네오락판을 벌렸는데 사회자가 신랑신부의 이인창을 주문하자 사촌형님이 선줄을 그어 불렀던 노래가 중앙툰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경극 한구절이였다. 그걸 맞추지 못해 새색시가 쩔쩔 맸던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다. 중앙툰사람들은 사촌형님의 노래를 들으며 잘한다고 연방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사촌형님은 그렇듯 어머니 아버지를 잘 만난덕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동네방네 만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그맘때는 아들까지 덜컥 낳았다. 번개불에 콩을 볶아낸 셈이였다. 형님이 결혼식을 올리던 날 사촌형님이 양어머니라고 부르던 여인은 딸 쑈화를 데리고 산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버렸다고한다.
쑈화도 눈앞에서 없어졌겠다, 형님도 결혼을 해 아들까지 보았겠다, 그로서 여지껏 전전긍긍하며 근심해왔던 일들이 다 완료된줄로 알았는데 문제는 사촌형님이 결혼이란걸 하고나서도 알게 모르게 안해아닌 다른 여자들을 많이 붙여다니는 그것이였다. 큰아버지를 닮아 이목구비가 출중한데다 키꼴도 훤칠해서 잘생긴 외모만 보고도 치정을 느끼는 그런 무게없는 여자들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달고 다녔다. 그렇게 달고다니는 여자들을 일일이 뜯어내고 뒷처리를 하느라고 큰어머니는 지네발에 신 신기기 식으로 쉴새없이 돌아쳐야 했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리는 여자들에게 위자료를 쥐어줄랴, 배속에 든 아기를 빌미로 거머리처럼 드러붙는 여자들을 설득해 아기를 지워주랴, 뗏돈을 노리고 야합을 하는 뜨내기들과 법원놀음을 하랴… …아무튼 중국말을 한족사람들 보다도 더 류창하게 구사할줄알뿐만 아니라 왠간한 남정 저리 가라할만큼 완력 또한 좋았던 우리큰어머니였기에 그런 일도 가능하지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촌형님의 생활태도는 그식이 장식이여서 도무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형님과 형수사이에는 부부싸움이 끊일날 없이 이어졌고 그러다 지친 형수가 백기를 들고 나가 떨어졌다. 속으로 낳은 아들도 내몰라라 내동댕이 치고 어느날 집을 나가버렸다. 얼굴처럼 마음도 여린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참고 기다리기에 너무나 지쳐버린 여자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다 풀지도 않은채 박씨가문의 종가집 며느리자리에 사표를 던져버린것이였다.
  그후에도 종가집 며느리 자리엔 여러명의 여자들이 육속 들어왔지만 붙박이로 버티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 여자나 사촌형님의 마지막 여자로 남을수 있을것같이 처음엔 작심들을 하고 들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여자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였다. 첫형수가 낳은 아들애는 그렇게 릴레이하듯 계주봉을 넘겨받고 잇달아 들어 온 여자들의 손에서 그럭저럭 동년을 보냈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못할 나이부터 아버지와 새엄마들의 시앗싸움을 밥먹듯 겪으며 자란 애는 학교공부도 다 마치지 못하고 제엄마처럼 집을 나갔다.
  아무런 기미도 없다가 슬그머니 나가버려 어딘가에서 남의집 가정보모로 일하고 있다는 자기 생모를 찾아갔나보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누군가 어느날 성소재지 어느 유흥주점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그애를 보았다는 소문을 내놓았다. 말그대로 시원섭섭한 소식이였다. 사전에 생각하나 들키우지않고 일을 도모했을만큼 자기의 행동반경에 치밀한 애였다면 유흥주점이 아니라 그보다 좀은 나은 어떤 곳에 있어야할줄로 알았는데 개구리가 뛰여봤자 논두렁안이라더니 기껏 갔다는 곳이 유흥주점이고 그곳에서도 한다는 노릇이 웨이터란말인가? 하긴 배운게 있어야 그보다 나은 삶도 찾든가 말든가 할게 아닌가?
 그래도 그나마 제아버지를 닮지않아 자기절로 제 밥벌이를 한답시고 세상밖으로 발을 내디뎠으니 그것만으로도 짜장 대견하다고 봐줘야하겠다. 그렇게 온 집안 식구들이 박씨문중의 유일한 대들보를 두고 애석해하면서도 한편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있을무렵 어느날 집으로 날아온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였다. 조카애가 살인을 했다는 것이였다. 법정 재판일과 재판집행 지점을 밝힌 고지서를 읽다가 큰아버지는 모로 쓰러져버렸다. 여섯시간의 구급치료에도 효험을 보지못하고 그날밤 큰아버지는 기어이 저세상으로 떠나가버렸다.
주점식구들에게 야료를 부리는 한무리의 깡패들속으로 조카애가 제잡담하고 식칼을 집어들고 돌진해 들어갔는데 재수가 없게도 그 칼끝에 한사람이 맞아 피를 과다하게 흘리고 죽어버렸단다. 죽은 사람도 재수가 옴붙은 놈이고 조카애 역시 재수가 없기는 매일반인 놈이였다. 그칼은 본디 사람을 죽이려고 든게 아니였다. 대방에게 겁만 주려고 주어들었던 것인데 재수없게도 그 칼끝으로 재수없는 놈이 둔중하게 비껴갔던 모양이다. 아무렴 용기와 담량이 있는 애였다면 주먹이나 힘으로 하지 칼을 집어들었으랴? 싸울때 쟁기나 몽둥이를 주어드는 놈만큼이나 나약하고 비겁한 놈이 있다던가? 으쌰으쌰 뒤에서 부채질을 하던 주점주인은 일이 그꼴로 되여버리자 내꼴 봐라하고 꽁무니를 내빼버렸고 어리숙하고 죄가 큰 조카애만 작은 그물코에 걸려버렸던것이다.
 조카애는 9년 징역에 떨어졌다. 그동안 의사노릇을 하며 적립해두었던 가산을 헐어 변호사를 사고 할수있는데까지는 다 해본 결과가 그것뿐이란다. 사람의 한생에 몇개의 9년이 있다던가? 징역을 다 살고나오면 조카애는 이립의 나이가 되는것이다. 인생길에서 마땅히 목표를 세우고 생활기반을 다져야하는 나이이다. 가뜩이나 짧기만한 인생행로에서 남들은 가지않는 그런 곳에 가서 그 아까운 묘령의 시간을 다 내던지고 빈주먹이 되여 돌아오면 조카애는 짜장 무슨뜻을 세울수있으며 무엇을 이룰수있을가? 그러나 조카애에겐 충동과 무지가 저지른 업보의 결과를 터득할수있는 보람있는  9년이 될지도 모른다. 충동과 무지가 빚은 악과가 그처럼 쓰겁다는것을 조카애는 9년동안 매일 가슴으로 느끼며 살아야할것이다. 


동쪽칸에서 마작쪽 섞어대는 소리는 자정이 지나도 지칠줄 모르고 들려왔다. 연속 하루밤 하루낮을 이어서 노는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요전번 뉴스에 72시간을 꼼짝않고 앉아 이어 놀기를 해서 마작력사상 최신기록을 냈다는 풍문도 들었다. 그만큼 마작은 놀면 놀수록 인이 오는 놀이이다.
다 버리고 엷은 백포 한자락만 덮고 누운 형님의 유체곁에 나는 제석을 깔고  마주앉았다. 하고싶은 말은 많았으나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마을에 초상집이 생기면 동네어른들은 륜번으로 건너와서 상주와 더불어 령구를 지켜주며 상가집 번을 들기도 했었다. 허나 요즘 어느 마을이나 다 그러하듯이 인젠 그렇게 상가집에 찾아와 상주의 슬픔을 나누어가지고 허전함을 말려주며 함께 조애를 할만한 이웃들도 없다. 이가 옮도록 다닥다닥 붙어살며 아기자기 한동네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모두 타향으로 떠나갔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 했지만 이렇게 상을 당하거나 서러운 날엔 그들도 지금 나처럼 무가내로 홀로 버티고 있을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기쁜일이 있을땐 함께 나누고 슬픈일이 있을땐 같이 슬퍼해주었던 그때가 짜장 사람사는것같은 좋은 세상이였던것같다. 그렇게 옛추억에 묻혀 침묵하고 앉아있는 내가 청승맞게 보였던지 형수되는 여자가 쪽걸상을 가져다놓고 다가앉았다.
“형님은 두달전까지만 해도 지팽이를 짚고서라도 중앙툰엘 마작놀이를 다녔다구요.”
형수가 말머리를 텄다.
“그런데 그후부터는 걸어갈 맥이 없다며 마작군들을 집으로 불러들였지요. 베개를 가져다 등을 뻗치고라도 마작을 손에서 놓지않았어요. 마작판에다 피를 토해가면서도 말이예요. 숨지기 며칠전은 거의 의식이 없었어요. 사경을 헤매는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헛소리를 하더라구요. 자기를 데리러 온 할아버지와 할머님이 그냥 저 문간에 대기하고 서있다는거예요. 그러면서 곧 따라갈테니 조르지말고 기다리라는둥, 눈만 감으면 삼촌이 가시몽둥이로 자기를 때리는데 그 가시가 온몸에 박혔다며 그걸 뽑아달라고 나를 붙잡고 애걸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요?”
“환각이였겠지요, 바늘이 있긴 어디에 있다구요? 그럴때마다 내가 온몸을 어루만지며 가시바늘을 뽑는 시늉을 열심히 했지요. 그러고 나면 얼마동안은 안정을 되찾으며 다시 잠이 들곤 했어요. 아마 온몸이 바늘로 찌르듯이 몹씨 아팠나봐요. 그런데 그것도 장구지책이 아니였어요. 후엔 바늘을 뽑는다고 아무리 어루만져도 계속 고통을 호소하는거예요.”
“그래서요?”
“그래서 나중엔 궂판을 벌렸어요. 어쩌겠어요? 될법하다싶은 일은 모두 다 해볼판이였지요. 왜 이전에 그믐날 저녁이면 하군하던 그 푸닥거리말이예요. 중앙툰에 아직도 그걸 할줄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하루밤에 백원씩 주고 숨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그 작단을 이어서 했지요.”
“그걸 하는 동안은 편해했나요?”
“녜. 희귀하게도 그걸 하는 동안은 심히 조용했어요. 우린 옆에서 덩달아  부산을 떠느라고 숨이 넘어가는것도 몰랐다니깐요. 정말 이상했어요.”
여자는 아주 먼 예날에 있었던 전설을 말하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뭔놈의 앓을 병이 없어서 폐병을 앓았을가? 중이 제머리를 못깎는다더니 남의 병은 곧잘 고쳐주던 큰아버지의 의술도 자식의 병앞에서는 무맥했으니 말이다. 폐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형님은 병을 고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질않았다. 나쁘다는 담배도 지골로 피워댔고 먹으라고 주는 약은 먹지도 않고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다. 소문이 밖으로 날가봐 온 집안이 쉬쉬했지만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개의치 않았을뿐더러 될수록 여자와 잠자리를 섞지말라는 큰어머니의 권유도 듣지않았다. 오히려 더 기승스레 여자를 밝혔다. 마치 그것만이 자기의 목숨을 연장해갈수있는 유일한 끈처럼 붙들고 놓을줄 몰랐다. 여자들은 형님의 병은 마다하지 않았지만 형님의 난봉은 참지못하고 육속 나가떨어졌다.
 “피를 어떻게 속이겠냐? 저 할에비도 폐병으로 죽었고 저 에비도 폐가 좋은 사람은 아니였네라. 신체소질만 닮은게 아니고 여자 붙여다니는것 아울러 어쩜 저렇게도 판박인지 모르겠다. 내가 시집와서 보니 네 할아버지도 할머니 아닌 딴 여자가 있더구나. 그래서 할머님이 무척 속을 끓였는데 그세월에 크게 행악질은 못하고 방안에서 당신혼자 할아버지의 목침을 다듬이 방망이로 막 두들겨 패는걸 내가 보았네라. 그래도 네 할아버지나 네 큰아버지는 조강지처 뜯어팽개치고 다닐 정도로 난봉을 부리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놈은 여자한테 환장한 귀신이 씌운게 분명해.”
큰어머니는 속상할때마다 술한잔을 마시고나서 이렇게 푸념을 한마당씩 널어놓군했었다. 중앙툰을 비롯한 아래웃동네까지 불려다니며 수많은 아이들의 접산을 맡았던 큰어머니는 그때마다 몸에 배인 피비린내를 가시기위해 배웠던 술로 타는 가슴을 적시며 많지도 않고 딱 하나인 아들의 일로 허구헌날 애면글면하더니 재작년에 역시 뇌출혈로 큰아버지뒤를 따라가셨다.
지금 이 여자는 큰어머니가 돌아간다음 맞아들인 여자였다. 같은 중앙툰 여자였지만 형님의 첫사랑 쑈화와는 완판 다른 타입의 여자였다. 큰아버지가 죽은후 진료소는 그만 접고 약방만을 경영하던 큰어머니가 약방 일군으로 들였던 처녀였는데 어느 사이에 두사람사이에 불이 붙어버린것이였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한낱 병자에 불과한 남자와 금방 몸에 물기가 오르기 시작한 처녀사이에 참된 애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믿기지않는다. 기껏해야 점점 사위여가는 주인집 병자에 대한 순진한 처녀의 련민같은것과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바람기 꽉 찬 로련한 남자의 집착이 한시점에서 만나 발화가 되였을뿐일것이다. 어쨌거나 여자가 사촌형님과 살을 섞으며 길지도 짧지도 않은 3년 세월을 살았으니 나에겐 형수님이고 박씨가문의 장손부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병때문에 많이 말라서 예전같은 미모도 없고 큰아버지가 죽은후로 가세도 많이 기울어 씀씀이나 위세가 전같지도 않은 사촌형님의 아내자리로 이 여자는 자진해 들어왔다. 결혼날 빨간수건을 머리우에 뒤집어 쓰고 새납곡에 맞춰 큰집 뜨락으로 사뿐사뿐 걸어들어왔다. 결혼식을 중앙툰사람들 식으로 했기에 우리처럼 폐백상도 차릴 필요가 없었고 예단놓고 인사따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전같은 성세도 없었고 하객도 많지 않았지만 새색시는 아주 만족하는 눈치였다. 기쁨을 노상 입가에 빼물고 아래웃방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하객들에게 담배불을 붙여주고 술을 따라주었던 여자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뻗친다고 돈많은자를 적대시하던 세월, 남의 눈을 겁내여 돈다발을 단지속에 넣어 뒤뜰에 묻어두고 살았을 만큼 비교적 유족한 살림을 살았던 큰아버지네의 과거이야기가 이 여자의 눈에는 그때까지도 지워지지않는 후광으로 남아 빛을 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사람은 죽고 못사는 그런 열열한 사랑을 전제로 결합이 된건 아니였다. 말리는 사람도 없겠다, 너 좋고 나 좋으니 한번 살아보자 하는 식으로 시작한 부부생활이 오늘까지 찢어지지않고 요행 이어져온것뿐이였다. 

크게 울어줄사람도 없는 사촌형님의 장례는 이튿날 화장으로 끝내버렸다. 현성 화장회사에 부탁한 운구차가 아침 일찌기도 찾아와 큰길가에서 빵빵 듣거로운 경적을 울리며 시간을 재촉했다. 곧 다른 상가집의 령구도 운송해야 되기에 단 일각도 늦출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바람에 되돌아올수없는 멀고도 먼길을 떠나는 형님령전에 발인제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사촌형님의 령구는 운구차에 실려져야했다. 실렸다기보다 집어넣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듯싶다. 차체 뒤쪽으로 난 문을 여니 도르레가 달린 철판이 나왔다. 령구를 합판우에 올려놓고 손으로 밀자 생각밖에 가볍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제문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없었다. 처량한 새납소리만 한동안 울리다가 운구차가 움쭉움쭉 시동을 걸자 그마저 시무룩히 잦아들었다. 상주들은 모두다 웃칸으로 난 문을 열고 차에 오르라고 했다. 맨 뒤자리에 올라 걸상에 앉으며 바로 내 발밑에 형님이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앉음앉음이 편치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볼라니 마을에 상사가 생기면 마을사람들은 짧아서 3일에서 길게는 7일장까지 치르며 죽은 사람에대한 배려를 해주었었다. 그리고 발인하는 날은 상여군을 불러 상여를 메여냈었다. 상여군들은 고인을 저세상으로 보내주기 애석한 마음을 두발 앞으로 내여딛고 한발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느린보법으로 표달하며 령구를 묘소로 정해진 곧까지 정중히 모셔가곤 했었던것같다. 그런데 지금, 막상 상여는 아니래도 발인행사가 이렇게 막되게 치르어지다니 망자에대한 례의가 아니다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또한 내마음뿐이였다.
쓰레기 소각을 하듯 형님의 화장은 빨리도 끝났다. 빠알간 천주머니에 담겨져 내손으로 건너온 형님의 유골은 그때까지도 따끈했다. 골회를 날리는 절차만은 내손으로 해주고싶어서 아니 사촌형님과의 마지막 고별을 나혼자 하고싶어서 형수되는 여자와 검은완장을 둘렀던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고 부두가 근처에서 할일없이 떠다니는 작은 고기배 한척을 세냈다. 별 볼일이 없었던지 고기배 주인은 두말없이 나의 주문대로 배를 부두가에서 1킬로쯤 상거한 한적한 곳으로 저어다 주었다. 물론 삯전은 푸짐히 주기로 약조를 하고말이다.
마를줄 모르는 깊은 강 밑바닥에서 고기밥이 될런지 륜회설대로 다시 그무엇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 환생을 할런지도 모를 사촌형님의 골회를 한줌한줌 배전으로 흘리면서 나는 맘놓고 가슴이 후련하도록 울었다. 형님은 짧은 생을 살다갈줄을 미리 알았기에 그래서 그렇게 방종을 일삼으며 살았던것이 아닐가? 마음만 먹었으면 타고난 총기와 재질로 많은 일을 해내고도 남음이 있었을만큼 똑똑했던 사촌형님이 아니였던가? 하느님은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은 그에 견주어 그생명의 길이를 잘라가 버린다고도 하더니 나의 사촌형님이 바로 그 일례가 아닌가싶기도 했다. 
오후해가 기울도록 나는 동으로 동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기슭에 앉아 형님의 전부를 묻어버린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큰아버지의 골회도 큰어머니의 골회도 그리고 우리아버지의 골회도 다 이 강에 뿌렸다. 이제 사촌형님도 비로소 그 죽음의 세계에 편입이 된것이로다. 어쩜 그들은 지금 어느 한곳에서 재회의 상봉을 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저 머나먼 곳을 찾아 다시 먼 려정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만 혼자 이곳에 남은것같아 갑자기 외로움이 혹독하게 갈마들었다. 해가 서산너머로 넘어가는줄도 모르고 나는 외로움을 만끽하며 강물을 넋놓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죽을 사람은 다 죽고 떠날사람은 이래저래 다 떠나버린 마을. 그마을 한복판에 큰아버지도 없고 큰어머니도 없고 이젠 유일한 살붙이였던 사촌형님마저 살아있지 않는 나의 큰집이 멋적게 남아있다. 아직도 그 어딘가에 돈단지가 숨겨져 있을거라고 생각했는지 검은 완장을 두르고 밤새 마작을 놀던 형수님의 친정쪽 떨레들이 형님의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집안 여기저기를 발칵 번져놓았다. 버릴것 따로 태울것 따로 한쪽에 무져놓은 유품들이 작히나 두무지나 되였다. 별로 하는일 없이 살아온 사람이라 사연깊은 유물같은것은 있을리 있겠냐만은 그래도 형님의 손을 거쳤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쳐다보니 만감이 교차되기도했다.
가장 값 나가는것은 렵총이였는데 큰처남된다는 작자가 벌써 맡아가졌고 가죽점퍼와 목긴 가죽구두는 둘째처남되는 자가 챙겨들고 가버린 뒤였다. 유일하게 남은 오토바이의 주권을 두고 막내처남과 형수님이 옥신각신 입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달라고 떼질 쓰는 사람이나 팔아서 돈을 챙겨야겠다고 고집을 꺾지않는 형수나 나의 존재따위는 언녕 안중에도 없었고 나 또한 그따위 일들엔 끼여들고 싶지도 않아서 큰어머니가 쓰던 동쪽방으로 건너와 버렸다.
오래동안 불을 넣지않았는지 구들장이 냉냉했다. 어느때 바른 것인지 누렇게 뜬 벽지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고 방안 구석구석엔 거미줄이 그물처럼 늘어져있었다. 퇴색한 사진액자 하나가 허섭쓰레기같은 옷가지에 휘말려 나뒹굴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주어들고 보니 설날아침이면 차례상우에 모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였다.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여기저기를 마구 뒤지는통에 한데 끼잡혀 나와 흘려진게 분명했다. 솜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와 앞가리마를 곧게 내여 깔끔하게 빗어붙인 머리를 한 할머니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있었다. 어렸을땐 차례제를 지내면서도 무섭다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진이였다. 그러다 후에 철이 들면서 차차 익숙해져 다시 정을 가지고 대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유일한 사진이였는데 이렇게 이곳에 흘려져 있을줄이야.
나는 메고 온 가방에 사진액자를 챙겨넣고 벌떡 일어섰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이제라도 출발하면 집으로 가는 막차를 잡을수있을것 같았다.    
  2008년 8월

박옥남 간력

1963년1월13일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출생

흑룡강성 오상조선족사범학원졸업

현재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교원

1981년 소소설로 문단활동 시작

제3회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수상

2007년 한국재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2007년 제1회 김학철문학상 우수상 수상.

[출처:조글로포럼 forum.zogl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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