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박병술은 감자 한 광주리를 다 비우고 나자 뒤미처 밀려드는  식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단잠이 들었다. 농부내외와 복금이가 상처를 씻고 오소리기름을 바르고 쑥뜸을 뜨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렇게 하루 낮, 하룻밤을 내처 자고 그 다음날 점심때에야 잠을 깼다. 주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건장한 장정 몇 사람이 자고 있는 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어깨의 계급장과 모표를 뗀, 인민군복을 입고 허리의 가죽혁대에 모젤권총을 찬 청년이 구둣발로 박병술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동무래 이동네 사람 아니디? 괴뢰군패잔병 아니야?”
 박병술은 어리둥절한 채 일단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긴 했지만 상황파악이 안 되어 대책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농부도 그의 아내도 복금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밭으로 나갔을까? 설마 그들이 날 인민군에 고자질했을까.
 문득 조병태라던 이름과 그가 민청위원장이고 시도 때도 없이 반동분자색출을 다닌다던 농부아내의 말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게다가 아직은 서툰 청년의 평안도말씨를 보아 이 지방 사람이 분명하다. 그제야 아차 잘못 걸려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위기를 모면하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모두들 전선원호사업에 동원되었는데 동무래 어디서 굴러든 사람인데 태평스레 집구석에 틀어박혀 낮잠만 쿨쿨 자고 있는 가 말이요?”
 “전 전라도에서 왔습니다. 이 집에 데릴사위로 왔지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다리를 상해서……”
 “거지뿌리래 하문 누가 모를 줄 알디. 당신 숨어있는 반동분자 틀림없지?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자백하라우.”
 “반동분자라니요. 아닙니다. 농사짓는 농부지라 예.”
 “이 자식! 그래도 거지뿌리야. 뭐하고 서있는 거야. 어서 이 반동새끼를 밖으로 끌어내라우!”
 박병술은 변명이나 저항할 사이도 없이 민청원들에게 질질 끌려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건물들과 골목의 벽체들에는 낯선 구호들이 가는 곳마다에 적혀있었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들에게!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이승만 괴뢰도당과 악질지주, 경찰, 괴뢰군,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자!
 인민군대는 인민의 군대이다! 무적의 강철대오 인민군대에게 영광이 있기를!
 조선로동당 만세!

 마을의 학교 앞 벽보판에는 남한지도가 걸려있고 그 위에 붉은 종이깃발을 꽂아 인민군대의 진격노선과 승전소식을 알리는 선전포스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옆의 포스터에는 인민군의 무쇠주먹에 분신쇄골이 되어 남해바다에 처박히는, 국군의 패전모습을 그린 만화가 붙어있다.
 천한는 변한 것이다.
 옛 경찰지서인 듯한 벽돌건물의 지붕에는 태극기 대신 공화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여기저기에 농민위원회, 여성동맹, 민주청년연맹이라는 간판도 눈에 띈다.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어딘가로 분망하게 오갔고 청년들도 반동분자색출작업에 동원된 모양 가택들을 수색하느라 소란을 피운다.
 박병술이 압송되어온 창고건물에는 벌써 일여덟 명의 사람들이 연행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냥 맨봉당에 여기저기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 표정들이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처럼 시커멓게 멍들어 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하는 기색들도 가끔 눈에 잡힌다.
 병술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오래잖아 곧 심문, 취조, 고문이 시작될 것이고, 농부를 불러들여 증언을 시킬 것이고, 국군병사임이 탄로나면 끌어내다 총살할 것이고…… 
 뒈지지 말란 말이야. 구역질이 나니까!
 소대장님.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이 바보, 등신은……
 “박만수 이리 나와!”
 커다란 널대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총을 든 민청원 한사람이 그의 이름을 호명한다. 만수는 농부가 그렇게 부르라고 임시로 지어준 가명이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그는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얼른 나오지 못해!”
 발목통증 때문에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데 민청원이 등을 와락 떠미는 바람에 그만 대문밖에 나뒹굴었다.
 “박 서방.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농부가 달려와 박병술을 부축해주었다. 농부의 아내와 딸 복금이도 불안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저만큼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선채 우들우들 떨고 있다.
 “이호남 동무. 이 사람이 정말 당신 데릴사위요?”
 “그렇다니까요. 위원장동무.”
 “거지뿌리래 했다간 그 후과가 어떤지 이호남 동무도 알지래. 반동분자를 비호하면 똑같이 엄벌을 받는다는 걸.”
 “알고말고요. 절대 거짓말이 아니지요. 어느 안전이라고 언감생심. 어서 집으로 돌아 가세나. 다리도 아픈데……”
 박병술의 손을 잡은 이호남의 팔이 후들후들 떨렸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거 복금이 동문 잠시 나 좀 보자우.”
 병태라고 짐작되는 민청위원장이 엄마 등 뒤에 숨어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이호남의 딸을 불러 세웠다. 복금이는 아예 엄마의 등 뒤에 몸을 감춰버린다.
 “여맹위원장 동무가 아까 찾던데. 인민군대원호사업에 참가하라고.”
 “얘가 요즘 몸살기가 좀 있어서. 며칠 뒤에 내보내면 안 될까요.”
 이호남의 아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통사정을 했다. 복금의 엄마를 깐깐히 훑어보는 병태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이호남의 우려가 이유 없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의 강력한 눈빛에서 처녀에 대한 점유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복금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아예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갈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21

 “그럼 모레부터는 내보내야 되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이 동무네 데릴사위가 틀림없소?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더니 언제……”
 “제가 감히 위원장동무를 속일라고요. 벌써 오래전부터 두 집 사이에 중매쟁이가 오고갔어요.”
 박병술의 얼굴에 화살처럼 박혀드는 병태의 시선에서 노골적인 적의가 번뜩였다. 게다가 의혹까지 엉겨 붙어 불 꼬챙이처럼 따갑다.
 “저 사람이 전쟁 전에는 매일이다시피 내 딸을 달라고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네. 딸을 주지 않으면 우리 집에 불이라도 지르겠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면서 말일세. 일하기는 싫어하고 허구 헌 날 빈둥거리며 동네 짐승은 다 훔쳐다 잡아먹고 싸움질이나 하고……”
 마을을 벗어나 외진 곳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야 이호남은 아까의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병태에 대한 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농부의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전전긍긍했다.
 “듣겠으면 들으라지. 내 딸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느 놈이 상관이야. 개를 줘도 제 놈 한 테는……”
 “정작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 뒤에서만 입이 살아가지고. 제발 좀 그 입 다물라니까 그래요.”
 농부의 아내는 참다못해 손으로 남편의 입을 틀어막는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 손 치워. 숨 막혀 죽겠다.”
 그러더니 이호남은 이번에는 박병술에게 화제를 돌린다.
 “보아하니 총각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내 딸이 맘에 드나?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아예 말이 난 김에……”
 “아버지.”
 복금의 얼굴은 붉다 못해 목까지 새빨개진다.
 박병술도 몸 둘 바를 몰라 복금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풀어왔다.
 “이 양반은 언제나 간수부터 친다니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인생의 대산데……”
 아내도 민망한지 농담절반 진담절반 어색한 분위기를 장난으로 슬쩍 넘겨버리려 한다.
 “내 병태 그놈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그래. 내 딸에게 임자가 생기면 야망을 버릴까 싶어서.”
 아무튼 박병술은 이호남의 덕분에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거의 되었을 무렵, 박병술은 한창 단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아랫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던지 잠을 깬 이호남은 저고리를 어깨에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박병술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이호남이 갑자기 달려 들어오며 다급하게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박병술은 잠도 채 깨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일어났다.
 “자네 어서 방으로 올라가게.”
 무작정 안방으로 등을 떠민다.
 “무슨 일이 생겼게요?”
 이호남의 아내도 눈등을 비비며 의아해한다.
 “내가 그놈이 갑자기 들이닥칠 줄을 알았어.”
 급박한 상황인데도 이호남은 귀신같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득의양양해한다.
 “그놈이라니 도대체 누구 말이에요?”
 “누군 누구야. 병태녀석이지. 이 사람이 정말 데릴사윈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급습한거지. 흥!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술수가 통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내가 제 놈의 계책에 넘어갈 것 같지. 뭐하고 있나. 어서 방으로 올라가라니까.”
 “어르신……이러면 전 정말 난감……”
 그제야 어렴풋이 영문을 알아차린 박병술은 사건의 급박함을 느꼈으나 또 그만큼이나 난감하기도 했다. 이호남이 떠미는 안방에는 복금이 혼자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망설이기만 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시간이 없네. 잔말 말고 어서 올라가게. 옷도 벗고.”
 “어르신……”
 “내 딸 좀 살려주게. 제발 부탁하네.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은 늑대 밥이 되고 만다네. 어서.”  
 어느새 어지러운 구둣발소리가 삽짝문밖에까지 당도했다.
 삐거덕 삽짝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당신 우선 밖에 나가 저들을 막고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고 자넨 제발 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박병술은 이호남이 시키는 대로 옷을 훌렁훌렁 벗고 안방으로 올라갔다. 이호남은 망설이는 그의 등을 떠밀어 무작정 딸애의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문득 어깨에 닿는 따스한 여체가 감촉되며 박병술은 촉한을 만난 사람처럼 전신이 화들화들 떨려났다.
 복금이도 벽 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옹송그린 채 육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호남이 사잇문을 닫고 안방에서 금방 나가자 앞뜰에서 병태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시오! 집안을 좀 조사할 것이 있어 왔으니 방해하지 마시오.”
 병태는 농부의 아내를 밀치고 무작정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박병술은 숨을 죽인 채 사랑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복금이 동무래 어디 있소?”
 “안방에서 잡니다. 위원장동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이호남의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사잇문이 벌컥 열렸다. 그 순간 복금은 급촉하게 몸을 돌이키더니 두 팔로 박병술의 목을 답삭 껴안았다. 그리고는 병아리새끼처럼 그의 품에 꼭 달라붙었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탄력 있는 처녀의 알몸은 박병술의 가슴에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을 지펴 올렸다. 긴장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심장의 박동이 쿵쿵 우렛소리처럼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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