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출근이 싫어진다.
 길 건너편의 그 화려한 『동양사진관』의 요란한 기염에 주눅이 들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윤정에게서 전염된 것인지 정도도 덩달아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일상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했다.
 윤정의 외할아버지의 경우처럼 사진관경영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 정당성이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선택한 생계수단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의며 신념이며 정당성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지. 그저 교묘한 구실이고 명분을 만들기 위한 현혹목적의 장치이고 남의 침해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상대방을 견제하는 방어선이고. 윤정이 정말 인생의 이 미묘한 그러나 너무나 서투른 비밀을 죄다 알아냈다면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오로지 하나 죽음, 삶은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라는 인생철리를 깨달은 윤정은 인제는 쉽게 인생의 화려한 유혹에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플라타너스가로수의 단풍잎은 붉다 못해 자줏빛을 띠고 있다. 보도와 차도에 두텁게 깔린 채 흐늘흐늘 느슨한 불길을 피워 올린다. 그 속에 드문드문 뿌려진 노란 은행잎은 화톳불에 구워진 토실토실한 감자 같다. 은행잎은 노랗다 못해 눈부시기까지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까지 노란 물을 들인다. 은행잎이 아무리 요염해고 뇌쇄적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윤정의 눈에는 무의미한 현혹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은행잎에 심취할 아무런 까닭도 없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은행잎일 따름이다. 게다가 그 은행잎들은 하나 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다. 윤정의 외할아버지처럼. 더구나 가슴 아픈 것은 죽음은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이 확인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확인하는 삶,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삶!
 그런데 붉은 색과 노란색은 색상계통에서 더운 이미지인데도 가을의 싸늘한 한기를 막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은 파랑이 아닐까?
 은파랑!
 윤정의 변한 모습이 단순하고 녹 쓸었던 정도의 사유에 기름을 붓고 가동을 걸었다면 느닷없이 기억 속에 떠오른 미모의 아가씨의 모습은 정도를 시들하게 만들던 권태를 축출하며 유혹한다.
 오늘따라 미경이 벌써 출근해있었다. 전에 없이 진열창과 출입문유리도 투명하게 닦여있고 마당의 낙엽도 깨끗이 쓸려있다.
 갑자기 웬일이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마음을 돌렸나보지. 진작 그럴 것이지. 계집애가 마음은 여려가지고. 
 사진관에 들어서는 순간 정도는 그동안 잊었던 파랑의 사진이 생각났다. 오늘은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반환해야 한다. 벌써 약속시간을 4일이나 밀렸다. 고목사진과 청석사진은 크게 확대하여 액자 속에 넣어주어야겠다.
 저도 모르게 맥이 빠졌던 육신에 기운이 들어오며 활기를 되찾았다. 산다는 건 바로 일을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어떤 아가씨가 필름을 이렇게 많이 맡겼어.”
 언제나 침울하고 수심에 잠겨있던 미경의 얼굴이 보름달이라도 돋은 듯 활짝 밝아있다. 과부들에게만 특유한, 불만이 가득 찬 그래서 험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늘은 말끔히 걷히고 첫사랑에 빠져든 소녀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명랑한 표정이 4월의 햇빛처럼 넘실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떤 아가씬데. 혹시 은파랑이라는 아가씨가 아니던?”
 “맞아. 오빠 그 아가씰 알아? 얼짱이던데. 그런데 무슨 이름이 그러냐. 파랑이? 노랑은 아니고. 웃겨.”
 대답대신 접수기록을 당겨보니 분명 은파랑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혀있다. 글자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금방 파랑의 예쁜 얼굴윤곽을 그려낸다. 이름마저도 그대로 파란 냇물이 되어 돌돌돌 흘러 내려갈 것 같다.
 “사진 달라고 안 하던?”
 “아니. 아무 말 없이 필름만 남겨두고 갔어.”
 “알았어. 모두 이리 줘.”
 정도는 그동안 쌓인 필름들을 한 아름 걷어 안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문을 열다말고 고개를 돌려 한마디 물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있었냐?”
 “오빠는, 무슨 일은.”
 수태를 머금으며 얼굴에 홍조까지 띤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정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하실계단을 내려갔다.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찍어줘. 날 부르지 말고.”
 정도는 암실에 내려오자 서둘러 작업준비를 하고 은파랑의 필름부터 현상하기 시작했다. 작업에 몰두하자 그는 아내와의 불쾌했던 일이며 방금 전의 지루한 사유에서 금방 해탈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반복되는 숙련된 동작들을 로봇처럼 유창하게 이어나갔다.
 밀착인화를 끝내자 사진의 모습이 현상되었다.
 정도는 확대경을 들고 사진들을 일일이 관찰했다. 역시 첫 번째의 사진들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첫 번째 사진에서 보았던 도선사나 청진사가 아닌 보문사, 마니산들이 나타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행적이 서울근교의 산악지대에서 강화도로 옮겨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은파랑은 그냥 자연이 좋아서 유람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어떤 목적에서?!……
 또다시 그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25

 “오빠. 그 아가씨가 오셨어. 사진 땜에.”
 민경의 목소리가 좁은 지하실통로를 타고 굴러 내려온다.
 그 아가씨라라니?!
 정도는 흠칫 놀라 작업을 멈추고 컴컴한 지하실 철문 쪽을 올려다보았다. 돋보기를 든 손이 저도 모르게 약간 떨렸다.
 “은파랑 씨 오셨어.”
 은파랑 씨!
 정도는 그만 돋보기를 테이블위에 털렁 떨어트렸다. 자신이 왜 이렇게 허둥지둥 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너무 민감한 반응이 아닌가.
 “올라간다. 금방 올라갈게.”
 그는 급히 손에 낀 흰 장갑을 벗고 옷매무시를 바로잡은 후 암실에서 나왔다.
 모직 원단의 커피색 투피스정장차림의 한 아가씨가 카운터를 가운데하고 미경이와 마주 서있었다. 미경이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몸매나 용모가 뛰어났지만 미모가 출중한 아가씨의 앞에서는 후줄근하고 초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문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도는 아가씨가 파랑임을 확인했다. 화장조차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지만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는 그녀의 용모를 조금도 손색이 가지 않도록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한두 가닥의 머리카락은 아가씨의 담담한 표정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미소가 없어도 단조롭지 않고 교태가 없어도 여성미가 넘치는 그 절제되고 가다듬어지고 분명한 이목구비의 절묘한 조화는 비너스의 조각상을 무색케 했다.
 “오셨습니까. 제가 그동안 집에 사연이 좀 있어서 작업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사진을 확대하여 액자에 넣어드리겠습니다. 내일이면……”
 “늦어도 상관없어요.”
 짧지만 모든 의미가 충분히 담겨있는 대답이다. 무표정한 것 같지만 여성의 모든 아름다운 표정을 죄다 담고 있는 그녀의 얼굴과 흡사하다.
 파랑의 앞에는 또 네 개의 필름이 놓여있다.
 “실례지만 풍경사진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네? 네.”
 의문과 수긍. 대답 또한 그녀처럼 신비하다. 도대체 긍정인가 부정인가.
 “저도 풍경사진을 좋아합니다.”
 출간된 화집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제 자랑이나 하는, 그것을 밑천으로 여자들을 유혹이나 하는 시시한 사람으로 비쳐질까봐 단념했다.
 “혹시 사용하시는 카메라가 어떤 기종인지요?”
 “캐논뭐라라든지? 잘 모르겠어요.”
 “성능이 우수한 카메라네요. 그런데 그런 카메라는 프로들에게는 적합하지만……모르긴 하겠으나 촬영에는 초보자이신 것 같은데.”
 “네.”
 “캐논수동카메라는 조작기능이 복잡해서 아마추어들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기종일겁니다. 카메라촬영기술에 대한 사전상식이나 공부가 필요하지요.”
 “예술사진을 찍을 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수고 부탁드려요.”
 은파랑은 고개를 숙여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나가려고 했다.
 “아가씨. 잠시 만요.”
 정도는 서둘러 서랍 안에서 자신이 보던 풍경사진촬영 기술서적 한권을 꺼내어 아가씨에게 건넸다.
 “혹시 도움이 되실는지. 제가 이전에 보던 책입니다. 예술사진은 아니더라도 기술을 장악하면 좀 더 보기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인사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예의에 그친 것이었다.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다.
 파랑이 사진관에서 나가자 실내는 갑자기 어둠 속에 잠긴 분위기다. 찬란하게 떠오르던 태양이 비구름에 가려진 기분이다. 사람에게는 분명 빛이 있다는 걸 그녀를 보면서 느꼈다.
 2백장에 박두하는 엄청난 숫자의 네거티브 중에서 건져낸 사진은 겨우 네 컷뿐이었다. 이번의 네 컷과 전번의 두 컷까지 합쳐 여섯 컷은 교정 작업을 거친 후 확대하여 액자에 넣었다. 물론 나머지 사진들도 모두 정상적인 인화를 했다. 그것이 은파랑에 대한 각별한 예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 같았으면 그것들은 모두 폐기처분했을 것이다.
 역광 속에서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는, 비록 구도가 기울기는 했지만 하이라이트부분과 그림자부분이 분리되어 입체감이 강조되었고 해변의 파도는 우연히 모노톤처리가 되어 카메라가 흔들려 좌측으로 피사체가 쏘아지는듯했지만 거대한 파워와 장엄함이 돋보였다. 하지만 하늘의 구름은 여전히 콘트라스트가 심해 무슨 괴물이나 도깨비 상을 하고 있다. 보문사로 향하는 가랑비 내리는 산길은 , 물론 우연이겠지만 흐린 날의 부드러운 광선작용으로 디테일묘사가 완벽했고 안정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앞 흐림 현상이 나타났는데 일주문은 지옥의 문처럼 기괴하게 구부러들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사진은 실패였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신비의 세계 그 자체였다. 자연은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 아름다움이 아니라 기괴함으로 둔갑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카메라렌즈조화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변할 수 있듯이 인간의 시각도 하나의 렌즈에 불과하다고 할 때 똑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녀의 사진에는 또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기와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 파랑색처럼 냉담하고 차갑고 침중한 이미지가……
 모든 작업이 끝나고 암실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미경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다. 밀린 작업 때문에 퇴근이 늦어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던 미경의 표정이 기억의 스크린에 재생된다.
 집으로 곧장 들어갔을까? 아니면 또 그 중국집배달 진남이한테로 갔을까? 혹시 미경의 그 밝은 표정이 어떤 쾌락의 만족에서 오는……
 우리 미경이가 그럴 리가 없어. 여자니까 아직 젊으니까 욕망도 있고 불륜도 넘볼 수 있을 테지만 사고까지 저지를 인격자는 아니야. 저 유명한 청백리, 정직한 도덕적 삶을 살아온, 참된 인생의 대명사인 아버지 윤도율의 딸이 아닌가. 8년간의 부장판사생활에서 한번도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살아오신 분이 아버지 윤도율이다. 10년 가까운 변호사생활에서도 직분에만 충직했던 아버지이다. 어떤 경우에도 피는 속일 수 없다. 아버지의 정직함과 청백함과 도덕적 삶의 참됨은 피를 통해서도 , 당신의 솔선수범을 통해서도 가정의 맥을 바르게 하고 흐름을 정제하는, 그대로가 신성한 법이나 다름없었다. 정도가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도 아버지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컸다. 아내의 외할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장가든 뒤의 일이었다. 
 
 윤정은 자지 않고 있었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 망부석처럼 까딱 않고 먼 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행낙엽이 밤바람에 펄펄 날리는 나무아래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윤정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날씨가 쌀쌀한데 왜 밖에 나와 앉아 있어?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
 벌써 연 며칠이나 식사를 거른 윤정의 얼굴은 기름기가 증발하고 뿌옇게 먼지가 껴있다. 전혀 낯선 사람처럼 보인다. 넋은 빠져나가고 육신만 남은 시체 그 자체이다. 이러다가 정말……
 “미미아빠.”
 낮으나 분명하게 들려오는 윤정의 육성에 정도는 처음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착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하다니?!
 “자기 금방 날 불렀어?”
 “나 절에 갈래요.”
 “뭐라고?”
 정도는 너무도 예상 밖의 말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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