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사진인데 뭘.”
 미경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네까짓 게 사진에 대해 뭘 안다고. 천재야. 천재! 천재가 아니고서는 며칠 사이에 사진기술을 이처럼 완벽하게 터득할 수가 없어. 미모도 출중할 뿐만 아니라 총명함도 비범한 아가씨야.”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찬탄을 연발했다.
 “피- 아가씨가 예쁘니까 사진도 예뻐 보이는 거겠지.”
 한가롭게 TV를 시청하던 미경이 입술을 한발이나 내민다.
 “너 지난밤에 또 진남이 녀석을 만났다며? 광혁이한테서 밤새 전화가 왔었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그 녀석을 직접 만나서 혼 좀 내줘야지.”
 “오빠.”
 미경은 금방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진다. 동생이 측은하다고 어느 때까지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대책을 세워 동생의 불륜을 막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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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는 또 하룻밤을 꼬박 잠을 설쳤다. 불면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불을 부둥켜안고 침대위에서 망질을 하며 잠을 청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의식은 점점 더 말똥말똥해진다. 육신의 어딘가에 억제할 수 없는 기운이 적치되면서 휴식을 취하려는 수면을 방해했다. 전신의 신경이 한 곬으로 쏠리며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 굉음과 진동과 부글거리는 용암 때문에 정신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시달린다. 눈자위에 짙은 핏물이 들도록 피곤이 적치되었지만, 풀길이 없었고 그럴수록 정신은 초조와 불안에 휩싸인다. 무언가를 왈칵 토해내고 싶다. 피라도 콸콸 토해내고 싶고 하신에 얼기설기 엉겨드는, 만재된 기운을 풍선을 터치 듯 송곳으로 구멍이라도 뚫어 바람을 빼내고 싶다. 뭔가가 가득하고 넘쳐나는 기분이지만 해소할 방법이 없어 몸부림이 쳐진다. 벌써 이불과 베개는 그의 몸부림에 짓눌려 엉망진창이 된지가 한참 된다.
 준범이 녀석처럼 콘돔을 사용할 수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정도야, 넌 몰라. 그 벌룩거리는 콘돔 속에 그들먹이 들어차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느끼는 불쾌한 기분! 아내와 몸을 섞었지만 그 엷은 비닐 막 때문에 그녀와 나 사이에는 영원히 격리되어 있단 말이야. 그건 섹스가 아니고 그냥 물리적이고 간접적인 마찰이고 융합이 아니라 분열이야. 거기엔 사랑은 고사하고 만족과 쾌락조차도 없어.”
 준범은 인젠 술 냄새만 맡아도 주정을 부린다. 그것은 그가 여는 화제의 전부 내용이었고 관심사의 전부였다.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몸매 관리래. 임신을 하면 몸매가 망가진다는 거지. 몸매관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애초에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냐. 몸매관리가 결혼보다, 남편보다, 아내의 책임보다, 가정의 수요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수 있어. 삶의 정당성이 집단이나 타인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사적 실리가 판단기준이 될 수도 있는 거냐고? 정도 넌 정당한 삶을 살기로 작정한 친구가 아니냐. 어디 말 좀 해봐.”
 탄식과 절규, 저주와 절망으로 전율하는 준범의 하소연에 정도는 침묵만 지켰을 뿐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내 인생의 척도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윤리와 정당성이 있다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천편일률적이고 획일화된 궤도를 달려온 건 아니다. 서로 다른 그런 인생의 결합이 결혼의 전제라고 할 때 불행은 진작부터 파종되어진 것이다.
 “나도 사람이야. 여자란 말이야!”
 사람은 동물이고 그래서 여자는 『수컷』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들리던 미경의 울분! 이런 식으로 추리한다면 어쩌면 결혼은 서로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절차이고 치사한 타협일 따름일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그런 수요가 만족되지 않을시 결혼은 사랑이요 윤리요 법적정당성이요 하는 가면을 벗어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정도는 준범이와 미경의 불만이 그들의 부정한 인생관이나 윤리관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윤리와 정당성이라는 것도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 한계를 초월하면 그것들은 죄다 영향력을 상실하고 권좌에서 배제되는 것이고.
 그럴 수가 없다. 아니, 설령 그럴 수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되도록 방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본능은 사특한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나 윤리와 정당성의 감독 하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성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또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윤정은 용천사로 입사한 뒤 아무런 소식도 없다. 전화도 편지도 인편 소식도 없었고 정도가 혹시 전화를 해도 통화가 안 되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 샘으로 연결하오니……”
 언제나 똑 같은 톤과 음색의 안내메시지가 아내의 차분한 음성을 대신한다. 윤정은 미리 녹음된 그 음성의 뒤로 안개처럼 소리 없이 증발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며칠이면 귀가하리라고 생각했었다. 남편은 몰라도 딸애 미미를 보고 싶어서라도. 그러나 그런 예측은 오산이었다. 윤정은 보름이 되도록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벌써 낙엽은 다 떨어져 가로수는 가지만 엉성하고 이따금 눈발까지 펄펄 날리는 겨울철이다.
 암자가 추울 텐데. 겨울옷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내려 올법한데.
 절에 다니는 사람 인편에 옷을 보내려고도 생각했지만 단념했다. 이미 절 사람이 된 공양주요 사미승이기도 한 아내는 승복차림일 테니 세속의 옷을 걸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들의 절밥을 짓고 사미계율沙彌戒律을 외우고 예불을 드리고……그것만이 윤정의 관심사이리라.
 옷차림에도 무척 신경을 쓰던 아내였다. 언제나 단정하면서도 깔끔하고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지적인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던 윤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일상과 취미를 포기하고 푸른 무명승복 한 벌에 만족해버린 아내! 아직도 윤정의 삶을 뒤바꿔 놓은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가 없었다.
 “왜 또.  아침밥도 안 먹고 나갈 거니?”
 아내 대신 미미를 보살피러 온 어머니 양진옥은 차려놓은 조반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을 나설 차비를 하는 아들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양진옥은 사법계의 유명한 부장판사출신이며 출중한 변호사남편을 모시는 귀부인답게 귀족적이고 세련된 품위를 갖춘 숙녀이다. 무게감과 절도가 있는 언행까지 받쳐주어 상류사교계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집에서는 현처양모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이를 보인다는 것이 민망했지만 정말이지 다시는 가정부 같은 걸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아이만큼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아들의 견해와 동감이었다.
 “엄마가 한번 용천사엘 다녀올까.”
 양진옥은 새 양말을 옷장서랍에서 꺼내놓으며 은근히 아들의 심중을 떠본다.
 “어머니가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뿐이 아니라 아들의 의사도 거부하거나 무시한 적이 없는 양진옥이다. 그녀에게 남편과 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네 아빠가 요즘 이상하셔. 식사양도 줄어드셨고 말씀도 통 없으신단다. 그냥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슨 생각인가 골똘하게 하시고. 건망증세까지 보이셔.”
 양복저고리를 옷장에서 벗겨 내리는 양진옥의 얼굴에 그늘이 길게 드리웠다. 아버지의 얼굴표정은 이전부터 온 집안의 기후를 좌우지하는 온도계 같은 작용을 했었기에 누구도 그분의 기색을 좌시할 수 없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은.”
 “어려운 안건변호를 맡으셨거나?”
 “어려운지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보름 전부터 춘천지방법원에 다니시긴 했는데. 무슨 살인안건변호를 맡으셨나 보더라.”
 양진옥은 종래로 남편의 사업에 간여한 적이 없었다. 모시고 챙겨주고 수발드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
 “변호가 힘드신가 보죠.”
 “글쎄. 제발 다른 일이 없고 그일 때문이라면 좋겠다만.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을까봐 은근히 걱정되는구나. 직감이 이상하다. 그냥 일 같지 않아.”
 “며칠 지나면 괜찮으실 거예요.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미미를……”
 “걱정 말아라. 미미엄마한테 전화라도 한번 하려무나.”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밖에는 팝콘 크기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가로수들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탐스러운 눈꽃들이 활짝 피어있다. 차량들은 눈이 쌓인 차도위에서 조심스럽게 운행했지만 어쩔 수 없이 썰매처럼 줄줄 미끄러지며 다닌다. 눈송이들이 어찌나 큰지 저마다 살이 보송보송 오른 모습들이다.
 “미미엄마가 왜 갑자기 절로 들어간 거니?”
 집을 나설 때 양진옥이 던져온 물음에 정도는 대답을 못했었다. 그의 마음에도 수많은 의혹이 함박눈송이처럼 펑펑 쏟아질 뿐이었다. 마음속에도 가로수가 있다면 눈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가지가 부러지고 동상을 입을 것이다.
 그녀가 출가한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 오직 윤정이 자신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윤정의 독단적 선택이 아내에게만 속한 사생활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셔터를 올리고 마당의 눈을 쓸어냈는데도 미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지난 밤 또 무슨 일이 생겼나보다. 오광혁이한테서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미경이가 귀가하지 않는다는 추적전화 때문에 전화통이 불이 날 번했었다. 언제나 그런 경우엔 미경의 전화는 꺼진 상태여서 행방을 추적할 수가 없었다. 이 계집애가 끝내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 말 작정인 것 같다. 오늘까지 달래보다가 그래도 안 되면 아버지한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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