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버지의 정신상태도 요즘 비정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는 어머니도 제 정신인 것 같지는 않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거실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동작을 멈추고 한 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군 했다. 꼭 마치 아내의 병이 급속하게 전염된 것 같은 집안분위기여서 저도 모르게 전신이 오슬오슬해진다.
 오기만 해봐라. 이 계집애! 두 번 다시 진남이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 전에는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눈이 와서 그런지 손님은 더구나 뜸하다. 사진 찍으러, 현상하러 찾아오는 단골도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훌쩍 줄어들었다. 추위 때문에 야외관광객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필름카메라는 아예 찬밥신세가 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이 추위와 눈과 겨울과 그리고 디지털카메라와도 상관없이 줄곧 야외풍경촬영을 변함없이 지속해온 손님이 있으니 그가 바로 파랑이었다. 그녀의 족적은 양평, 설악산, 강릉을 거쳐 이제는 대관령까지 내려가 황홀한 설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 중 몇 점은 정말 화첩을 출간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프로급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은파랑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카메라촬영에 집착하고 있을까? 겨울의 혹한마저도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자연에 혹해서?
 예술에 심취해서?!
 어쩐지 예술과 파랑의 촬영 집념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싶다. 처음부터 그녀는 사진을 예술작품화하려는 시도 같은 건 없었다. 파랑이 예술작품들을 촬영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 아니면 정도의 유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연에도 흥취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닥치는 대로 촬영한다는 느낌뿐이다. 예술에도 자연에도 흥취가 없는 촬영이라면 그건 단순한 시간낭비일 것이고 금전허비일 따름인데도 파랑은 무슨 여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무의미한 집념과 오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한가하게, 파랑이 촬영한 용평스키장의 풍경과 대관령설경사진을 감상했다. 그 사진들로 커다란 사진첩을 따로 만들어 놓고 한가할 때면 뒤적여보곤 했다. 그 사진첩만 펼치면 사진들에서 풍겨 나오는 이상한 매력이 불안하고 초조한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정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눈길이 자꾸 문 쪽으로 향함을 느꼈다. 벌겋게 달아오른 석유스토브의 열기 때문에 얼굴이 고추 빛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내가 왜 파랑을 기다리고 있지?
 그러고 보니 파랑이 나타나지 않는 날에는 자신의 마음이 공연히 불안해지고 짜증이 났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도 없이 미경이와 트집을 걸기가 일쑤였고 인화작업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신경질을 부리곤 했었다.
 문득 한 아가씨가 사진관문 앞을 지나갔다.
 은파랑!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가보았다. 그러나 그 아가씨는 낯선 여자였다.
 이건 나쁜 행동이야.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이건 외도와 불륜을 향한 불순한 마음이야. 미경의 불순을 질책하는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그러나 생각과 마음은 일치하지 않았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고 마음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일까.
 정도는 아예 문 쪽을 등지고 돌아앉았다. 사진첩도 버리고 대신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냉정해질 필요를 느꼈고 윤정의 부재로 흩어진 정서를 정리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불러들였다.
 문소리가 들렸다.
 이 계집애가 인제야 나오는구나. 오늘 어디 혼나봐라!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벽시계부터 흘끔 쳐다보았다. 11시 46분이다.
 “너 잘 왔다. 지난밤에 또……”
 화가 잔뜩 난 인상을 짓고 고개를 홱 돌리던 정도는 눈앞에 나타난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들어온 사람은 미경이 아니라 파랑이었다.
 “안녕하세요.”
 노란 양가죽코트를 입고 하얀 부츠를 신은 그녀의 미모는 함박눈보다도 더 눈부셨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성을 처음으로 느낀 열여섯 소년의 마음 같다.
 “오셨습니까. 사진이 참 잘 나왔습니다. 인젠 프로인 저도 무색할 만큼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나왔어요. 몇 점은 이렇게 크게 확대해서 액자에 넣었습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번마다 이렇게 잘 해주셔서 고마워요. 돈도 더 받지 않으시고... 제가 미안해서 어떡하죠.”
 “미안하긴요. 제가 좋아서 만든 건데요 뭐. 좋은 걸로 모아두었다가 기회가 있으면 사진첩을 만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아무튼 언제 인사드리겠어요.”
 은파랑은 사진액자를 받아들었지만 혼자서는 운반하기가 힘에 부친 듯 망설이고 있었다.
 “댁이 어딘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그런 수고까지……”
 “괜찮습니다. 오늘은 눈이 와서 손님도 없고 한가합니다.”
 정도는 선행善行보다는 이 기회를 틈타 그녀의 거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열정적으로 나섰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둬 개를 돌자 그녀는 어느 낡고 허름한 한옥집 앞에 멈춰 섰다.
 “이 집이?!……”
 “할머니가 사시는 집이에요. 할머니. 저 왔어요.”
 쪽문은 파랑이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낮고도 작았다. 파랑의 뒤를 따르던 정도는 방안에서 풍겨 나오는 고약한 악취에 저도 모르게 코를 움켜쥐었다. 방안은 동굴처럼 어두컴컴했고 한기가 썰렁했다.
 “조명을 켜고 계시라고 당부했는데도 왜 또 끄셨어요. 보일러도 끄셨네.”
 “돈 아끼려고.”
 어둠 속에서 이가 빠져 바람이 새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걱정은 하지 마시라 했잖아요. 그러잖아도 몸이 불편하신데 추위까지 더하면 어떡하시려고요.”
 파랑이 벽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자 방안에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들어왔다. 나지막한 천장 아래 손바닥만한 단간 방이 드러났고 추위를 덜려고 두텁게 이불을 깔고 누운 할머니 한분이 불빛에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엉거주춤 일어나 앉는다. 얼굴에 주름살이 어찌나 많고 굵은지 늙은 코끼리 가죽을 방불케 한다. 얼핏 보기에도 백세는 될 것 같다. 치아가 다 빠져 입술은 무슨 화산 분출구처럼 안으로 깊숙이 오므라들어가 있다.
 “할머니 또 자리에다 실수하셨네. 애들처럼. 저기 선생님. 잠시 밖에 나가 계실래요. 이걸 치울 동안 만요.”
 파랑은 재빠른 동작으로 가죽코트를 벗어 벽에 걸더니 할머니 옆에 쪼크리고 앉는다.
 정도는 파랑의 말에 얼핏 돌아서 밖으로 나오려다가 그만 발길을 멈췄다. 미모의 아가씨도 더러워하지 않는데 남자인 내가……
 몸을 돌이키는 순간 할머니의 사타구니에서 뽑아낸 기저귀에 누런 배설물이 가득 담긴 변을 보았다. 코를 틀어막으려다가 파랑이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받아내는 걸 보고는 도로 손을 내리웠다. 배설물에서는 증기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어머, 아직도 여기 계셨네요.”
 기저귀를 들고 일어서던 파랑이 문간에 엉거주춤 서있는 정도를 발견하고는 민망하여 어쩔 바를 몰라 한다.
 “이리주세요. 제가 밖의 화장실에 버릴게요.”
 정도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선생님더러……”
 “파랑 씨처럼 젊은 아가씨도 마다하지 않는데……친할머니신가 보죠?”
 “아니에요. 독거노인이세요. 돌보는 사람이 없더라니 제가. 저희 집은 이 뒤의 빌라 반 지하에 있거든요.”
 “아, 네, 그러셨군요. 어서 이리주세요.”
 미모뿐만 아니라 그 마음씨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파랑에게 한결 더 호감이 가게 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가끔씩 와서 대소변도 받아내고 빨래도 하고 진지도 지어 드리기는 하지만 어디 친자식에 비하겠어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표정에 변화가 생기며 발그레한 물기가 돌았다. 수태를 머금은 그 모습은 잘 익은 감 열매를 연상케 했다.
 손에 받아든 기저귀에서 뭉클뭉클 하는 감촉과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정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려고 애썼다.
 구식변기에 배설물을 버리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자 파랑은 어느새 마른 기저귀를 갈아 끼우고 좁은 주방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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