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사진관에 가보셔야 하잖아요.”
 파랑은 쌀을 일어 전기밥솥에 안치며 말했다. 붉은 셔츠소매를 걷어 올린 파랑의 팔목에는 포시시한 보슴털이 불빛 아래 부드러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여동생이 나왔을 겁니다.”
 “그럼 저기 설악산스키장사진과 대관령설경사진을 벽에 걸어주실래요.”
 “아니, 이 사진들은 파랑 씨의 집에 걸라고……”
 “그냥 걸어주세요. 전 가서 보기까지 했잖아요. 할머닌 앞뜰에도 나가시기가 힘들어요.”
 그제야 정도는 어둑어둑한 방 안벽에 파랑이 찍은 사진 여러 폭이 걸려 있음을 발견했다.
 “그럼 파랑 씬 할머니를 보이려고 풍경사진을……”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파랑은 말끝에 신비한 의문을 깊숙이 묻어둔다.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면 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가?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 신비함이 짙어만 가는 아가씨이다.
 파랑이 시키는 대로 사진액자를 벽에 걸었다. 액자가 커서 사진 두 폭을 걸자 한쪽 벽이 꽉 찬다.
 “어이구, 고맙기도 해라. 다 죽어가는 걸 위해서 이렇게들 고생하다니!”
 할머니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사이 파랑은 가까운 시장에 나가 물고기를 사다가 매운탕까지 끓여서 밥상을 차려 할머니에게 대접했다.
 “할머니. 어떠세요? 저 사진들이 보기 좋으세요?”
 파랑은 손가락으로 밥을 떠서 노인의 입에 넣어주며 인정어린 음성으로 말을 건넨다. 여느 때와는 달리 파랑의 표정은 부드럽고 밝았다. 친손녀처럼 천진해보였고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는 소녀처럼 명랑하기까지 했다.
 “그럼. 나도 한때는 강원도에서 살았었거든. 설악산에도 가보았고 대관령에도 가보았지. 그런데 이게 얼마만이냐. 늙어 꿰진 뒤로는 못가 보았으니. 30년 세월도 넘는 것 같아.”
 할머니의 식사대접이 끝나고서도 방안청소까지 말끔히 한 다음에야 파랑은 노인의 집을 나섰다. 한옥 집 옆을 돌아서자 5층짜리 빌라 한 채가 나타났다.
 “무거운 걸 집까지 들어다 주셔서 고마워요.”
 밖으로 나오자 파랑은 다시 절제되고 단정하고 무표정한, 본래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수도 적어졌고 모든 필요한 언행이 제거하고 남은 간단한 예의의 차원에서만 교제를 진행했다.
 그만 돌아가라는 암시다. 집안에까지는 청하고 싶지 않다는 완곡한 거절이다.
 “별 말씀을요. 그럼 들어가세요. 전 이만.”
 “들어가세요.”
 거의 매몰찰 정도로 그녀는 절도가 분명했다. 인정 때문에, 신세나 도움 같은 것 때문에 절도의 계선을 경망하게 넘나들지는 않았다. 우리들 사이는 이만큼이에요 하고 확실한 계선을 긋고 있었다.
 깊숙이 허리를 굽힌 파랑의 어깨위에는 윤기 도는 장발이 흘러내려 가슴 앞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굵은 눈발 속에 선 그녀의 자태는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눈꽃들이 머리카락에 내려앉으며 스르르 녹아 이슬방울로 맺히곤 한다.
 눈송이가 그녀를 녹이는지 그녀가 눈송이를 녹이는지 알 수가 없다.
 사진관으로 돌아왔지만 미경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영문 없는 불안과 초조감으로 살창 속에 갇힌 늑대 마냥 실내를 오락가락 했다. 할 일도 없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업이고 뭐고 다 뒤전으로 하고 문 닫아걸고 준범이 녀석을 불러내다가 폭탄주나 마실까. 날씨가 궂으니 술 마시기는 제격이다. 그러나 콘돔콤플렉스에 빠진 그 녀석의 푸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저리가 난다.
 그런데 오늘은 정도도 준범이 못지 않게 주사라도 부리고 싶은 울적한 기분이다.
 콘돔은 그래도 베개나 이불을 끌어안고 자는 것보다는 나아. 이놈아! 너 이불을 끌어안고 자는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해? 하고 한풀이를 하고 싶어진다.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꺼져있다.
 야외촬영중인가?
 방송국PD인 그는 가끔 야외촬영이 있을 때면 휴대폰작동을 끄곤 했다.
 아니면 어디서 술이 곤죽이 되어버렸을까? 술상에 마주앉으면 요리가 올라오기 전에 전화부터 끄는 게 준범의 습관이다.
 혼자서라도. 아니, 은파랑 씨를 불러내어?!
 자신이 없다. 그러기에는 아직 파랑과의 사이에 인연이 깊지 못했다.
 좌불안석하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정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서둘러 송수화기를 들었다. 어쩌면 그 전화 한통이 우울증에 빠진 그를 구해주는 유일한 탈출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대도 그만큼 컸다. 물론 그냥 고객의 전화일 수도 있지만.
 “네. 패밀립니다.”
 “빨리 와 봐요. 나 죽어요!”
 목 갈린 음성이, 마디마디 부서지고 긁히고 조각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붕붕거린다.
 “뭐라고요. 전화주신 분 누구신데……”
 “나 광혁이……광혁이라고요……”
 “광혁이. 왜, 미경이 땜에? 아직 가게에 출근하지도 않았어.”
 “어제 아침에 나간대로 아직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뭐라고! 그 계집애가 그럼 어딜 갔지?”  
 “나도 몰라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이고. 나 죽는다! 형. 제발 날 좀 살려줘……”
 갑자기 수화기 속의 말소리가 툭 끊어지더니 들리지 않는다. 손에서 송수화기를 떨어트린 것인지 찌르륵-찌르륵- 잡음만 전송되어온다.
 불길한 예감이 든 정도는 부랴부랴  사진관문을 닫아걸고 이슬람사원이 있는 언덕 위로 달려올라 갔다. 미경이네 집은 도깨비시장이 있는 그 언덕 위에 있었다.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미경이와 진남이 녀석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진작 아버지한테 알렸어야 했다. 인젠 다 쑨 죽이 되고 말았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냇물을 흐린다고 계집애 하나 때문에 집안에 오욕을 뒤집어쓰게 되다니.
 제발 그런 일만은 없기를 빌었다. 외박한다고 꼭 그런 이유일 수는 없지 않은가.
 가파른 콘크리트계단은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진 눈 때문에 몹시 미끄러웠다. 오르막길인데다 걷기마저 힘들어 금방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골목의 끝자락에 미경이네 집이 있었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광혁은 입에 허연 거품을 문채 방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침대위에서 굴러 떨어진 모양이다. 침대머리엔 소주병과 마른 고기안주가 지저분하게 널려져 있다. 빈 소주병 대여섯 개가 이리저리 나뒹군다.
 운신도 못하는 사람이 소주를 여섯 병이나 마시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안 마시던 술은 왜 갑자기 폭음하고 이래.”
 벌거벗은 광혁의 나신은 불구가 된 하체가 뼈만 앙상하게 비틀어져 보기조차 흉측하고 민망했다. 거뭇하나 이미 고갈되고 죽정이가 되고 곰팡이가 낀 성기는 초라하다 못해 마른 버섯처럼 조그마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죽는다고? 그럼 형은 내가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해? 난 죽은 지가 오랍니다. 살아있다 말 뿐이지 죽은 송장에 불과하다고요. 미경이가 왜 날 버리고 달아났는데요? 죽은 송장하고 살기가 싫어서 아니겠습니까. 불두덩이 성한 놈한테 가서 달라붙은 거라고요.”
 광혁은 또 술병을 들고 입가에 가져간다.
 “그만 마셔. 왜 자학을 하고 그래!”
 정도는 사정없이 광혁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되는대로 예측하지 마.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남자가 마음이 왜 그렇게 좁아. 밴댕이 속처럼 옹졸하게.”
 “내가 밴댕이 속처럼 옹졸하다고요. 나한테 남은 게 뭔데요. 집사람 하나밖에 있습니까. 그런데 미경이마저 날 버리고 도망가려 하잖아요. 이러고 살아서 뭐합니까. 차라리 죽고 말지. 눈 뻔히 뜨고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는 걸 목격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이름이 좋아 사내지. 난 사내가 아니라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하다고요.”
 그러고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상체를 움직이는 대로 죽은 송장에 불과한 하체가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정도가 보기에도 광혁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살아있다는 건 단지 생각하고 말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자신도 아내가 비워둔 커다란 침실의 공간에서 죽은 송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다. 방안에 충만하던 의미들은 윤정의 출가와 함께 순식간에 소실되고 남은 것은 기하학적이고 물리적인 공간뿐이었다.
 “내가 당장 나가서 미경이를 데리고 올 테니 진정하고 침대위에 가만히 누워 있어. 절대 나쁜 마음을 먹지 말고. 내가 장담하는데 미경은 그런 경망한 애가 아니야. 그건 내가 잘 알아.”
 정도는 광혁의 축 늘어진, 미역줄기 같은 육신을 부축해 침대위에 눕혔다. 광혁의 하체가 무슨 물주머니처럼 아래로 길게 드리워 출렁거렸다.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동생의 사생활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잖습니까. 미경은 미경이 멋대로 자기 인생을 사는 거라고요. 낳은 엄마라고 해도 다스릴 방법이 없지요.”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사람마다 독립적 존재라고는 하지만 가정과 사회 속의 일원인 만큼 자기 맘대로 살 수는 없는 거야. 사회적 제약을 받게 마련이지. 많건 적건 간에. 어디 그뿐인가. 도덕도 있고 양심도 있잖아.”
 “그런 건 형 같은 사람들이나 지키는 생활신조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미경은 이미 나한테서 마음이 떠나갔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라니까 그러네. 날 믿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그 계집앨 잡아다가 대령시킬 테니까.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거야.”
 “꿈이나 꿔요. 들어오기만 하면 내 그년의 종아리를 분질러 놓을 겁니다.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정도는 간신히 광혁을 안정시키고 집에서 나왔지만 어디부터 찾아봐야 할지 행방을 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오빠는 오빠이고 동생은 동생이었다. 미경은 동생이었지만 그녀의 생활방식은 오빠인 정도와 완전히 달랐다. 오빠의 생활방식이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인생은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정도는 굳게 확신했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을 목적으로 할 때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