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자신의 모든 본능을 억제하고 견디면서 사는 것이 과연 오빠가 말하는 참된 인생일까.
 사실 미경은 그런 심각한 인생문제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가끔씩 의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해답을 찾을 만큼의 집념을 해본 적은 없었다. 성격적으로 미경은 그런 진지하고 신중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유가 깊어지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파나곤 했다. 그래서 심사숙고보다는 한결 편리한, 기분이나 감정에 더 의존하는 타입이었다. 이른바 기분파이다.
 “사랑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모든 걸 죄다 버릴 순 없잖아요. 정절, 윤리, 양심 같은 것들이 밥을 먹여주느냐고 묻지만 그렇다고 사랑 역시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것은 진남이에 대한 설득이라기보다는 그녀 스스로에 대한 설득이었다. 그녀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오빠에게서 들은 말을 액면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거 뭐라더라. 어떤 놈한테서 들은 말인데 행복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인권이라더라 뭐라더라. 인생이 얼만데 차례지는 복을 버려. 천년을 살 것도 아닌데. 그건 바보, 등신, 병신이야. 재벌 놈들이고 정치하는 놈들이고 바르게 사는 게 몇인데. 다들 말로만 바르게 살뿐이지. 애완견이라고 개새끼가 아닐까. 그 개새끼가 그 개새끼지. 내버려둬 보라지 그놈도 배가 고프면 똥을 처먹지 않나.”
 진남이가 펼치는 화제는 용렬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별로 틀린 말도 아니다. 그냥 표현이 거칠 뿐이다.
 미경은 늘 아버지나 오빠에 비해 자신은 인생에 대한 태도가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남편이 사고를 치기 전까지 진지하지는 못하더라도 부정적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진남의 태도는 진지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때로는 사회와 주변사람들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적의와 불신이 미경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단지 이 사회와 사람들이 그에게 던진 적대감과 불신에 대한 대등한 환불일 따름이었다. 미경은 지금 오빠와 진남이가 구축한 인생의 두 보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도 호락호락 붕괴되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솔직히 미경은 진남의 성채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진남의 성채는 주변 성채들에 의해 비난과 포위공격을 받아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망설이게 한다.
 “시간이 없어. 기회를 놓치면 그때는 도망치고 싶어도 안 될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결단을 해.”
 탈출보다는 미경은 오늘의 외박이 가져온 후유증에 더 신경이 쓰인다. 밤이 지나가고 벌써 감방창문 같은 창구멍으로 한낮의 햇빛이 흘러들고 있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설령 이 사실을 모르더라도 그냥 하룻밤을 외박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광혁의 손에 죽어야 한다. 오빠도 더 이상 동생이라는 인연 때문에 그녀의 외도를 눈감아주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버지한테 일러바칠 것이고……그러면 실로 미경으로서는 감당 못할 만큼의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집으로 들어가지. 가게에 나가면 오빠가 가만 두지 않을 건데……아이, 난 몰라!”
 미경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과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도망치자는 거 아냐. 씨발! 울긴. 울면 일이 해결되기라도 해?”
 진남은 버럭 언성을 높이며 베개를 집어 들더니 방구석에 휙 내동댕이친다. 베개는 낡은 옷장에 가서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짓찧고는 옷가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방바닥에 털썩 나떨어졌다. 포연 같은 먼지가 풀썩 일며 창살 같은 햇빛을 반사한다.
 그와 동시에 밖에 누가 온 모양 느닷없이 출입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화가 잔뜩 난 김이라 진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시커멓게 탄 짜증이 발려 있다.
 인기척에 놀란 미경은 깜짝 놀라 들쥐처럼 이불 속으로 쏙 기어들어갔다.
 대답은 없고 또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급촉하면서도 거세다.
 “계량기 확인하러 왔나? 빌어먹을! 왔으면 용건을 밝혀야 할 것 아니야. 벙어린가.”
 진남은 투덜거리며 바지를 대충 허리춤에 걸치고는 문 쪽으로 다가가 도어 록을 비틀어준다.
 “미경아.”
 그런데 뜻밖에도 방안에 성큼 들어선 사람은 밑도끝도없이 그녀의 이름부터 부른다.
 호명을 당하고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던 미경은 들어온 사람이 오빠임을 확인하자 혼비백산하여 더욱 깊숙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지?
 인젠 모든 게 끝장이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불 안에 숨으면 누가 모를 줄 아니. 얼른 일어나 옷을 입지 못하겠니.”
 오빠의 추상같은 호령에 미경은 공포에 떨며 이불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기어 나왔다. 이불자락으로 가슴을 가린 채 침대아래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옷가지들을 주워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서 단추도 제대로 채울 수 없다.
 “아니, 이렇게 남의 집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뛰어들어도 되는 겁니까? 이건 무단 가택침입죄에 속하는 겁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그냥 순순히 돌아가세요.”
 어디서 주어들은 풍월인지 진남은 그답지 않게 제법 유식한 용어들을 구사하며 정면으로 대항한다. 그러나 그만한 시비에 기가 죽을 정도가 아니었다.
 “무단가택침입죄라니. 지금 당신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유부녀겁탈 죄로 신고당할까봐 두려운 적은 없었나요?”
 분노한 정도는 평소 점잖던 체통마저 망각하고 진남의 이마에 대고 손사래질까지 해댔다.
 “누구한테 손가락질입니까. 가르칠 거면 동생부터 가르칠 것이지. 당신 여동생이 좋아서 한 일인데 겁탈은 무슨 겁탈입니까.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당장 내 집에서 꺼져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평소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은 정도에게 쌓였던 분노가 일시에 터진 듯 진남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길이 이글거렸다.
 “아니, 이 사람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눈을 부라려! 잘못을 사과하기는커녕. 도둑이 매를 든다더니 내 원 기가 막혀서.”
 “당신한테 사과를 왜 해. 내가 미쳤어.”
 정도는 흥분을 이기지 못해 먼저 진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사람이!”
 “어쭈! 감히 내 멱살을 움켜잡아. 어디 해보자 이거지? 그래 좋아. 그러잖아도 네놈의 군자연하는 꼬락서니가 눈꼴시어 벼르던 차인데 잘 만났다. 어디 맛 좀 봐라.”
 진남은 손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공격태세를 취한다.
 다급해난 미경은 속옷 바람에 뛰어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무작정 팔에 매달렸다.
 “이러지들 마세요. 진남 씨, 오빠! 제발 이 손을 놔. 내가 잘못했으니까 때리고 싶으면 날 때려.”
 여자가 울고불고 늘어지자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한 걸음씩 물러서긴 했으나 서로 노려보며 분을 삭이지 못해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미경은 오빠의 저런 흐트러진 모습을 난생처음 본다. 여간해서는 언성도 높이지 않는, 성인군자처럼 부드럽고 유순하던 오빠였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럴까.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미경은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는 오빠의 등을 떠밀고 진남의 집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 두려워 할 것 없어. 내가 뒤에 있으니까.”
 문을 열고 저만큼 따라 나오며 진남은 큰소리를 떵떵 친다.
 “저 사람이!”
 정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섰지만 주변의 눈길을 의식한 듯 금시 표정관리를 하며 외면한다.
 “뭐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에라, 이 못난 계집애 같으니. 어디 남자가 없어서!”
 정도는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뒤를 졸랑졸랑 따라오는 미경을 무섭게 흘겨본다.
 “너 하나 때문에 가문에 먹칠을 한다, 먹칠을 해! 이 화근꺼리야. 그렇게 경고를 주었는데도 끝내 사고를 치고야 말았으니. 인젠 어떡할 거냐?”
 “그런데 오빠.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앞에서 폭풍우가 기다리는데도 미경은 그것이 궁금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넌 모르냐.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고. 중국집에 가서 물어보면 금방 탄로날거라는 것도 모르고 대낮까지 여기서……”
 안면 있는 사람이 지나가는 바람에 인사를 나누느라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광혁은 그 때까지도 자지 않고 있었다. 온밤을 뜬눈으로 밝히고 아침까지 기다린 것이 분명하다. 침대 옆에는 맥심커피와 설탕봉지가 놓여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다.
 겁에 질린 채 오빠의 뒤에 숨어 비실비실 방안으로 들어서는 미경을 그냥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욕설을 퍼붓거나 물건을 내던지거나 분통과 격노를 터트릴 거라는 미경의 예측을 깨트리며 묵묵히 쏘아보기만 했다. 그 눈길에 번뜩이는 서릿발이 비수처럼 뾰족해 미경은 공포감에 휩싸여 전율했다.
 “형. 자리 좀 피해줘요. 우리 부부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정도는 여동생에게 돌아올 폭행이 걱정스러운 듯 잠시 퇴장을 망설였으나 결국은 부부사이의 일이므로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모양 밖으로 나갔다.
 “오빠. 가지 마.”
 미경은 정도의 팔소매를 꼭 부여안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폭풍의 도래를 예감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방패를 찾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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