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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 큐!”
 PD인 석준범의 지령이 떨어지자 전 스태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돌아갔고 효과와 조명이 작동했고 배우들이 연기에 돌입한다. 준범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전체스태프가 일치하게 움직이는 이 지배욕 충족 때문에 PD라는 직업이 마음에 든다.
 벌써 며칠 전부터 미니시리즈 『인생에는 길이 없다』라는 드라마 옥외촬영이 진행 중이다. 겨우 세 번째 작품이고 여태껏 반향도 지지부진하였던지라 이번 만큼은 야심작을 제작해내고야 말리라는 결심이 크다.
 그런데 받아 쥔 시나리오부터가 시원치 않았다. 한 주부의 외도에 의한 가정파탄을 다룬 상투적 드라마다. 이런 상투적 드라마로는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인지 그것부터 미지수다.
 작품의 신선도를 높이려고 신인탤런트들에게 주역을 맡겼지만 그 역시 신통치 않은 선택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여주인공은 손에다 콘돔을 쥐고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며 깔깔 웃는다. 마냥 행복한 모습이다.
 콘돔!
 감독이 시키지도 않은 연기도구를 보는 순간 준범은 화가 버럭 났다.
 “스톱! 성란 씨. 콘돔은 왜 손에 들고 있는 겁니까? 버려요. 차라리 나뭇가지나 솔잎을 들고 있는 편이 낫지. 생뚱맞게 웬 콘돔이야!”
 스태프들은 감독이 별 일도 아닌데 흥분하는 모습이 이상한 듯 모두 어리둥절한 기색이다.
 아내의 콘돔이 알레르기반응으로 나타난 것일까? 내가 너무 민감했나.
 준범은 애써 표정관리에 신경 쓰며 다시 큐를 외쳤다.
 나뭇가지를 집어든 성란은 행복에 흠뻑 도취된 연인인양 명랑하게 웃는다. 세상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 철부지소녀 같다.
 “그만! 아니, 성란 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왜 실실 웃기만 해요? 그렇게 행복합니까?”
 “그럼 저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신인인 그녀는 PD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며 무슨 죄라도 지은 듯이 주눅이 들며 시무룩해진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지. 성란 씬 필경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가 아닙니까. 적어도 남편은 의식될 게 아니에요.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있을 거고요. 남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미리 해갖고 오라고 당부하지 않았나요. 남편을 둔 유부녀의 불륜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을 거잖아요. 한쪽으로는 늘 불안하고 남편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들 테고. 그래서 우려와 걱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겠지요. 한마디로 행복과 우려가 중첩된 이중적인 표정 그것이 이 캐릭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무려 열세번이나 반복시도를 했지만 끝내는 만족된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친 준범은 그만 중단하고 말았다. 점심식사를 한 다음 오후에 다시 시도해보기로 하고 일단 촬영을 접었다.
 무슨 제목이 이따윌까.
 인생에는 길이 없다고?
 인생에 길이 없다면, 정도 그 친구가 말하는 올바른 길이 없다면 인생이 지향하는 모든 길은 정당화 될 수밖에 없다. 그 저변에는 어떤 인생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암시가 앙금처럼 두텁게 깔려있다. 불륜마저도.
 『사랑은 행복이 아니다』로 제목을 바꾸는 건 어떨까? 그런데 사실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지긋지긋할 만큼 드라마전용단어여서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준범에게 사랑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콘돔과 이어져 구토증세까지 유발한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지. 보다 큰 스케일로 인생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그런 면에서는 가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인지 시나리오가 탐탁치가 않다. 주역, 보조역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실감 있게 재현하는 데는 그래도 경륜이 깊은 유명탤런트들이 나을 것 같다.  
 그렇게 하루 내내 분주를 떨었지만 목청이 쉬고 다리까지 시큰시큰 저려났지만 원만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모든 소원은 또다시 미지의 내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 정도를 불러내어 만취하도록 폭탄주나 마시고 싶다. 콘돔 만을 떠올리는 아내도 지겹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그런 아내 정실이와 함께 아버지 댁을 방문하기로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새엄마를 인사시킨다고 한다. 벌써 네 번째 새엄마다. 회사나 운영하는 사장들은 다 그런지. 어떤 새엄마가 들어왔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먼저 심드렁하다. 4~5년이 되지 않아 또 갈아 치울 거니까.
 준범이 촬영을 끝내고 아버지네 집에 당도하니 아내 정실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방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던 준범의 눈길이 우연히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은 낯선 여자와 마주쳤다. 의외에도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였다. 게다가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이다. 아내 정실이보다도 더 어려보이는 아주 앳된 소녀의 동안童顔이다. 그러나 준범이의 두 눈을 휘둥그렇게 만든 건 그런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는 얼마 전에 죽은 미혜의 동생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어서인지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저돌적인 그 표정 만은 잊을 수가 없다.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아가씨는 아니, 새엄마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천연덕스럽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미소는 포근하기는 커녕 냉소마저 깃들어 있다. 그녀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준범은 오늘에야 발견했고 그 때문에 그 미소가 호감을 준다기보다 당혹스럽기만 했다.
 “늦었네요. 어서 여기 와 앉으세요.”
 다른 사람에게 그 호칭과 표정은 너그러움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준범에게는 경멸과 조소로 보였다. 먼저 알은 체 인사를 건네는 아량에도 빈정거림 같은 것이 따끔거린다.
 “네 엄마 될 사람이다. 인사드려라.”
 아버지가 뒤늦은 소개를 했지만 웬일인지 말이 목구멍에 딱 걸려 나가지 않는다. 준범은 그냥 허리만 한 번 더 굽실하고 그녀가 가리키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우리 인젠 모자간이니까 내가 말을 놓아도 괜찮겠지. 나이는 내가 석주보다 어리지만 가문에는 서열이라는 게 있으니까.”
 만나자마자 치사하게 자신의 권리부터 챙기려 든다.
 “그럼. 부모자식간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아버지까지 그녀에게 명분을 실어준다.
 “온종일 촬영하느라 시장할 텐데 어서 먹어. 준범이가 좋아한다는 곱창전골도 특별히 만들었으니까.”
 새엄마가 권력을 행사하며 갑자기 선제공격을 해오자 준범이도 아내 정실이도 어리둥절한 나머지 좌불안석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야말로 망치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느낌이다.
 준범은 시선에 의미를 담아 그녀를 직시했다.
 “그예 나랑 한판 떠보자 이거지. 끝까지?”
 새엄마도 그가 보낸 무언의 메시지를 무난히 읽어낸 듯 가벼운 미소로 화답한다.
 “그래 무사할 줄 알았어. 넌 네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돼.”
 미소를 지은 새엄마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섬광이 번뜩였다.
 준범은 심장의 정곡을 찔린 듯 가슴이 섬뜩해났다. 그녀는 이미 시골에서 올라온 어수룩하던 지방대생이 아니었다. 서울물에 말쑥하게 닦여져 윤택하고 세련된 숙녀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녀가 거느린 분위기는 귀족적인데다 지적이기까지 하여 교양과 품위마저 넘쳐 흐른다. 게다가 엄마라는, 도전할 수없는 지고무상의 권력까지 아버지한테서 부여받아 아들인 그의 기염과 도발의지마저 무참하게 좌절시킨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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