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정실의 손길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오더니 준범의 허벅지를 쿡쿡 찔러왔다. 왜, 젊은 새엄마한테 반했어요? 하는 질투가 섞인 불만이 실려 있다. 여자들에게는 엄마를 포함한 모든 여성이 라이벌인 듯싶다.
 준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수그린 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기강과 법도가 있어야 돼. 어른을 모실 줄 알고 아랫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아버지는 자식들의 고충이나 민망함보다는 새엄마의 권의를 세워주기에 급급하여 서열규명부터 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새엄마를 구해주는 건 아버지의 자유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자신보다 훨씬 연하인 코흘리개를 엄마라고 부르라는 건가.
 거기까지는 아내 정실의 난감함이었다. 준범에게 그런 것쯤은 문제시 되지도 않았다. 새엄마가 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열다섯 미성년자였다고 해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새엄마가 죽은 미혜의 동생인가! 이 계집애가 호색한인 아버지의 인격적인 약점을 악용하여 준범이에 대한 복수를 위한 첫 번째 이용물로 선택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버지 역시 희생양에 불과한 것이다. 복수를 위해 거의 할아버지벌이 되는 늙은이에게마저 서슴없이 순결을 자진한 그녀의 지독한 집념에 준범은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제는 그녀가 좁혀오는 보복의 그물망에서 탈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그더러 공포에 전율하게 했다. 여인의 저주는 코브라의 독니 같고 오뉴월의 서리 같다고 하지 않는가. 한 마리의 독사가 드디어 그의 이불 속까지 기어든 것이다. 기어들어 그의 사지부터 꽁꽁 휘감기 시작한다.
 스푼을 든 손이 저도 모르게 가늘게 경련했다.
 “몹시 피로했나봐. 얼굴색이 영 좋지 않네.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줘야겠다. 나도 엄마 신고식을 해야 할 거잖아.”
 새엄마의 관심,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으로만 들렸을 말 속에 그들먹이 차있는 독기가 준범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여자들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남자들은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가정부 같은 것을 두기 싫어한다.
 준범은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커피를 마시며 나직한 음성으로 아버지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버지 저 여자가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아버지는 비록 중소가전기업을 운영하지만 몸집이나 스타일은 대기업회장을 방불케 하는 풍채가 도도하다. 그래서인지 자식 앞에서도 습관적으로 거창한 스케일의 폼을 잡고 배를 쑥 내밀고 거드름을 피운다. 허영심과 과대망상증은 아버지에게 성공의 기쁨을 향수할 기회를 주었지만 때로는 실패의 고배를 맛보게 하는 재앙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왜, 네가 아는 여자냐?”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 아닌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자식에게 아버지가 보여줄 모습은 오로지하나 위엄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분이다. 가정의 법도는 부모의 위엄에 의해 유지되는 서열관계이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끈끈한 정이라기보다는 계선이 분명한 지배와 복종이라고.
 “미혜 동생이잖습니까.”
 “미혜라고?”
 “벌써 잊으셨어요. 자살한 식당아가씨 말입니다. 저랑 말이 있던……”
 “그런데?”
 아버지는 놀라고 각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아들의 불손한 월권행위에 불쾌해하는 기색이다.
 “걔는 미혜라면서. 네 새엄마이름은 강복녀야.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강복녀?!
 웬일인지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이름이다. 한자풀이를 하면 전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강력한 복수를 준비하는 여자라는 의미로만 다가왔다.
 “이름 같은 건 고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여자가 언니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준범아. 너 지금 무슨 허튼소릴 하는 게냐. 새엄마를 첫날부터 무함하려드는 거냐? 아버지 면전에서 감히!”
 “그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시끄러. 그만해. 난 그 죽은 여자의 여동생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너의 새엄마를 그런 시골계집애들과 같은 취급을 하려는 너의 오만불손한 처사도 용납할 수 없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며 손에 들었던 커피 잔을 유리탁자위에 달깍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아버지가 벌써 젊은 여자의 미모에 넋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의 평생 재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호색이고 다른 하나는 돈벌이다. 아버지의 호색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전에도 막지 못했다. 아버지가 거쳐 온 여자는 부지기수인데 아들인 준범이가 아는 것만 해도 일여덟 명은 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스무 살 정도밖에 안되는 청순하고 앳된 풋병아리까지 낚아 들인 것이다.
 강복녀!
 그녀의 본명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좀 더 놀다 가지 않고 왜 벌써 일어나?”
 그녀의 파렴치한 반말에 정신이 다 아찔해진다. 게다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강복녀의 가식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웃음 속에 칼을 품었다는 표현은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할 것이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준범은 아버지를 향해서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정말이지 강복녀에게는, 나이가 아득하게 연하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경어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무슨 새엄마가 아니라 피투성이 되도록 생사판가름을 해야 할 숙적이었다.
 “아버님께서 혹시 환장하신 거 아니야? 손녀 같은 애송이를 아내로 맞아들이다니. 어머, 기가 막혀!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시나봐.”
 밖에 나오자마자 정실은 연신 비난을 쏟아낸다.
 “여자가 얼굴상이 보통여자가 아니야. 집안을 망칠 요귀상이라니까 전문 남자를 유혹하는 구미호 같아. 아버님께서 눈에 콩깍지가 끼셨지.”
 자식이 부모를 비난하는 건 불효야.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아내의 방종과 불경을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입에 담지 못할 온갖 험담을 다 늘어놓는 정실의 불손에 동조하고 싶었다.
 “그러게. 연세가 드실수록 호색도 더 도수가 높아가니 말이야. 자식들 체면도 좀 봐주셔야지.”
 강복녀의 등장은 그 첫날부터 이 가정에 말뚝처럼 견고하게 박혀있던 기강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당신 가문을 망하게 할 거야. 패가망신하게 하고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언니의 시신을 앞에 놓고 이를 갈던 강복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어 그 무시무시한 형상을 털어버렸다. 그러나 그 형상은 기억 속에서 뛰어나와 이번엔 시창에 달라붙어 알짱거린다.
 “자기 왜 그래? 중앙선을 월선했잖아!”
 아내의 경고에 준범은 다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비틀었다.
 “가로등…… 스톱, 스톱!”
 정실의 기겁한 외침소리에 준범은 허겁지겁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느새 인도위로 껑충 뛰어오른 차는 가로등 앞에서 간신히 정차했다.
 순식간에 전신에 식은땀이 쫙 내뱄다.
 “정말 새엄마한테 홀딱 반한 거 아냐?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다를 게 없겠지.”
 “자기가 운전해.”
 준범은 운전대를 정실에게 내주고 옆 좌석으로 옮겨 앉았다. 아내와의 신경공방전에 투입할 정신적 여유마저 없었다. 이 순간 자존심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 해보자. 내가 아무러면 너 같은 애송이 계집애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똥차! 언제면 나도 남들처럼 외제차를 굴려보려나.”
 차 욕심이 무던히도 많은 정실은 이제 겨우 주행시간이 2년밖에 안되는 아반테에 싫증이 난지 오래다. 눈만 뜨면 외제차 타령이다. 이번 드라마가 대박나면 한 대 뽑아줄 게 약속한 지도 벌써 2년, 그 사이 찍은 드라마가 두 편이나 되지만 대박은 고사하고 바닷물에 돌 던진 격이다. 지방방송에서마저도 제대로 방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올 들어 아버지의 회사마저 불황이 거듭되고 있다. 요즘은 기술특허품생산을 앞두고 아버지는 흥분해 있지만 그 역시 두고 봐야 흥망을 알 일이다.
 강복녀의 느닷없는 등장은 준범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분망한 드라마촬영 때문에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보름 뒤, 야외촬영을 마치고 오래간만에 집으로 귀가한 준범은 정원 잔디밭위에 세어진 혼다표외제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서 난 거지?
 마침 정실이 물통을 들고 세차하러 정원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여느 때 없이 밝은 표정이다. 누구 찬데 세차까지……게다가 세차장도 아닌 집에서……
 “왔어?”
 한마디 알은 체 할뿐 가방마저 받아주지 않는다. 정실의 눈길은 죄다  혼다에 쏠려 있었다. 물 찬 제비처럼 폴폴 날아다닌다. 춤이라도 당실당실 추는 듯싶다. 노래라도 라라라- 부르는 듯싶다.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뛴다.
 “누구 찬데?”
 “자기 맞쳐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손님이라도 오셨어?”
 “손님은 무슨 손님. 내 차지!”
 “당신 차라니?”
 “새엄마가 신고식을 한다며 사줬어.”
 “뭐라고! 누가 사준 거라고?”
 “새엄마 말이야. 새엄마가 아버님을 졸라 사준 거라고. 난 새엄마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인정도 깊고 사려도 깊은 분이시더라고……”
 “시끄러! 자기 입에서 새엄마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새엄마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새엄마야. 그년은 천년 묵은 구미호고 요귀이고……”
 “나도 첨엔 자기와 같은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내보니까 좋은 분이더라니까. 자기도 지내봐.”
 “지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건 자기가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 여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라 아주 지독하고 영악하고 독사 같은 년이란 말이야.”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새엄마랑 아는 사이였어?”
 정실의 갑작스런 질문에 준범은 허를 찔리며 속이 꿈틀했다. 그녀와의 내막이 탄로 나는 날이면 이 가정도 덩달아 풍비박산 날 것이다. 그 여파는 일파만파로 번져……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지. 사람이 꼭 지내봐야 알아. 얼굴에 다 씌어 있잖아. 자기도 나쁜 여자라고 그랬잖아.”
 강복녀의 마수는 어느새 나무뿌리처럼 준범의 집에까지 뻗쳐 내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를 정복하고 아내를 매수하고 그 다음 차례는 준범일 것이다. 그녀의 공세가 이처럼 신속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방비할 시간적 여유는 줘야 명실상부한, 당당한 대결이 될 것이 아닌가. 이건 급습이고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다.
 아니,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선전포고를 했었다. 어쩌면 선전포고를 무시하고 전쟁준비에 등한했던 건 준범이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냥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강복녀의 속전속결에 무너질 수는 없다. 무슨 상응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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