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나쁜 것의 표준이 뭔데. 나한테 좋게 대하면 좋은 사람이고 나쁘게 해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잖아. 그밖에 또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어.”
 알게 모르게 외제차 한 대로 이 가정에 심어놓은 불화의 불씨가 벌겋게 눈을 부릅뜬다. 외제차는 지금부터 아내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갈등과 반목의 장벽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버려. 당장 돌려줘. 내가 사줄 테니까. 집을 팔아서라도.”
 “집을 팔고는, 노숙자가 되려고?”
 “이번 드라마가 대박나면……”
 “드라마라면 듣기나 좋지.”
 어느새 준범은 아내에게도 별 볼일 없는, 시시하고 무능한 존재로 버림받고 있다.
 준범은 다음 날 또 촬영차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남편의 감독이 사라진 집에서 정실은 언제나 『자유부인』이었다. 준범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새엄마와 붙어서 헬스클럽, 찜질방, 도박장,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장을 전전한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오로지 촬영에 집념하여 야심작을 만들어내는 데만 골몰했다.
 한달하고도 일주일 만에 그가 다시 귀가했을 때는 이미 정실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주부가 아닌 귀부인, 사교계의 풍류 여인, 문자 그대로 『자유부인』이 되어 인생의 향락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남편 앞에서 담배까지 꼬나물고 빠끔거린다. 섹시한 옷차림은 남편의 시선마저 민망하게 만든다. 짙은 화장은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창녀를 방불케 한다.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가.
 “당장 그 강복녀와 발길을 끊어. 사람 다 버리겠어.”
 “왜. 자긴 내 남편이기는 하지만 내 사생활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어. 그건 인권침해야.”
 “그 말도 그 여자한테서 배운 거야?”
 “그래 어쩔 건데. 아내가 뭐 남편의 소유물인가. 나에게도 생활의 선택권이 있고 행복추구의 기본인권이 있어.”
 “인권 좋아하네. 놀지 말라면 놀지 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말리는 거라고.”
 “남도 아니고, 고부간에 친하게 지내는데 뭐가 나뻐. 가정화목을 위해서도 나쁠 게 없잖아. 자기는 당연히 가정화목을 도모하는 나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야 되는 게 아니야.”
 “글쎄 안 돼! 그리고 내 앞에서 그 여자를 시어머니니 새엄마니 하고 부르지 마. 구역질이 올라온단 말이야.”
 “웬일이지. 여자끼리 노는데도 질투가 나나봐.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한달씩 지방에서 들볶다보면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성욕이다. 남들은 밖에서 두루 해결한다는데 그것도 철저히 해소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런 해결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서 도리어 성욕을 더 자극하는 역작용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임시방편마저 거부한 준범은 그것을 참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만큼 헤어져 있었으면 아내도 남편이 그리웠을법한데 정실은 베개위에 머리를 박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생을 즐기느라 지친 모양이다. 강복녀라는 여자가 아예 아내를 탕녀로 탈바꿈시키기로, 그로 하여 부부관계가 깨지도록 유혹하기로 작심을 한 것 같다.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고 마음이 불안하다.
 속옷만 걸친, 임신 한 번 한적 없는 정실의 나신은 아직도 소녀처럼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고 통통 튕기는 탄력이 싱싱하고 맑고 투명한 피부가 은가루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준범은 적치된 성욕에 떠밀려 옷을 벗기가 바쁘게 아내의 나신을 품 안에 덥석 껴안았다. 손아귀가 벌도록 풍만한 젖가슴은 비옥했다. 탱탱한 둔부가 하체에 닿으며 불꽃이 팍팍 튕긴다.
 “왜 이래. 자지도 못하게.”
 푸시시 눈을 뜬 정실은 벌겋게 달아오른 남편의 얼굴을 한번 흘깃 쳐다보더니 쌀쌀하게 가슴을 떠밀어내고는 돌아누워 다시 눈을 감는다.
 “알았어. 콘돔 착용할게. 이놈의 신세 언제까지……60이 돼서도 몸 관리만 할 거야?”
 준범은 투덜거리며 서랍 안에 가득 찬 콘돔 하나를 꺼내어 사타구니에 착용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피부에 닿는 선뜩 하는 비닐표면의 느낌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 말라니까 그래. 좀 자게 내버려 둬.”
 정실은 콘돔을 착용했는데도 남편의 급박한 사정을 외면한다. 
 “웬일이야? 콘돔 착용했잖아.”
 “난 생각 없단 말이야. 피곤해.”
 “이유가 뭔데? 잘 시간이 없었어? 집에서 밤낮 놀기만 하잖아.”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이 과도했었나봐. 아니 졸려.”
 병든 닭처럼 금방 목이 꺾이며 폴싹하고 베개위에 꼬꾸라진다.
 “집 안이 망하려고 아주 궁상을 떤다, 떨어!”
 어디선가 은밀한 곳에 숨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강복녀가 승자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몸뚱이를 팔아 아버지를 유혹하더니 이번엔 금전으로 아내를 유혹하다니. 비열하고 유치하고 지독한 인간 같으니! 네가 발광한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준범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그녀가 이렇게 극단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도리어 준범이 쪽에서 먼저 참회했을 지도 모른다.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솔직하게 고충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면 생활비쯤은 넉넉하게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타협과 공존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한사코 전쟁을 도발해오고 있는 것이다.
 정실은 세상모르고 꿈나라로 들어갔고 준범은 한쪽에 소외된 채 담배를 붙여 물었다. 
 정말이지 인생에는 길이 없다. 지정된 노선도 포장된 도로도 없다. 그냥 아무데고 걸어가면 그 곳이 곧 길이다. 준범의 인생길도 어디로 이어졌는지 그 자신도 모른다. 강복녀와의 생사대결에서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로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승부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전쟁이다.
 향락을 추구하는 아내의 집념을 제지하려면 그녀 옆에서 자신도 떠나지 말고 지켜야 한다. 그러자면 직업도 사업도 버리고 자신의 인생도 포기해야만 한다. 준범은 내일 아침이면 또 지방촬영을 떠나야 한다.
 사람은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일을 하듯이 가정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대들보가 흔들리는 걸 눈 뻔히 뜨고 보면서도 대책 없이 떠나야만 하는 이것이 인생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 일에 쫒기다가 결국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문제는 전쟁이 강복녀와의 사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드라마와의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야심작의 추구와 강복녀의 복수. 어느 하나도 홀시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들이다.
 새벽에야 잠시 눈을 붙였다가 자명종소리에 놀라 깨어나 보니 정실은 벌써 어디로 튀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차고에 있어야 할 외제차도 사라졌다. 정실은 무엇인가의 강력한 유혹에 깊숙이 빠져든 게 틀림없다. 물론 그것은 강복녀의 의도적인 유혹일 것이다.
 그래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이대로 떠난다만 난 언젠가는 너랑 정면으로 도전할 테니 그 때까지 기다려라. 우리들의 격투에 제 3자를 끌어들이지 말라. 그게 정정당당한 결투일 것이다. 물론 그 결투는 힘의 대결이 아닌 지략의 대결일 테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이번의 촬영스케줄은 그의 뜻대로 제 시간에 끝마치고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방안은 썰렁했고 먼지만 두텁게 풀썩인다. 냉장고 안도 텅텅 비어 있고 주방에는 설거지를 기다리는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애완견은 먹이를 주지 않아 낑낑거렸고 구들바닥에 지저분하게 분비물을 배설해 놓았다.
 “이 사람이 이젠 아주 외박까지 하나보네.”
 아닌게 아니라 그날 밤 정실은 귀가하지 않았다. 아버지네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 곳에도 없단다.
 게다가 아버지의 목소리마저 심상치가 않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전화 끊어. 회사일이 엉망이라 귀찮아 죽겠는데……”
 회사일이 엉망이라고?!
 특허산품생산을 추진하며 밝은 전망을 자랑하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무언가 차질이 생긴 것 같다. 좀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남에게, 그 대상이 설령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실패자의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패자의 절망과 불안과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아버지의 회사에 무슨 불길한 일이 생겨도 이만저만 불길한 일이 아닌 게 틀림없다.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할 때 사연을 꼬치꼬치 캐묻다가는 벼락이 떨어지기 일쑤이니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갑자기 준범의 머리 속으로 강복녀의 미소 지은 얼굴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지독한 여자라지만 설마 아버지의 회사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들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러고 싶어도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강복녀의 생각을 기억 속에서 털어버리려고 했지만 엿가락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악독한 여자야. 가만 둬서는 안 돼.
 속이 답답했다. 술 생각이 간절하다.
 준범은 전화기에 매달려 버튼을 눌렀다.
 “정도냐. 나랑 술 마시자. 나와.”
 응대도 기다리지 않고 송수화기를 덜컥 내려놓았다. 자정이 거의 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정도와는 허락이고 뭐고 없었다. 그와는 무엇이나 무조건적이었다. 친구란 워낙 그런 것이 아닌가. 만나는 장소도 지정되어 있었다. 초저녁 따로 자정 따로 새벽 따로.
 정도는 어느새 나와 먼저 안주를 주문해 놓고 식탁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정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고 준범은 불러낸 이유를 구구히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냥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통했다. 그렇게 마주앉아 술 마셔주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게 산다는 거냐? 왜 복수를 당해야 되냐. 실수 한 번 했다고. 인생은 실수해서는 안 되는 거니?”
 결국 준범이쪽에서 먼저 침묵을 깼다. 인내성 겨룸에서 그는 정도의 적수가 못되었다.
 정도는 말없이 친구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아직 친구의 속내를 읽지 못했을 터이니 섣불리 견해를 피력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사코 참된 이생을 추구하는 친구라서 실토만 하면 그에게서 친구자격을 박탈당할 것만 같은 위기감 때문에 그 사실 하나만은 애써 숨겨 왔던 것이다. 그래서 테두리를 빙빙 에돌기만 했다.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드라마 찍는 놈, 사진 찍는 놈이 실패작을 내듯이 말이야. 그렇다고 그 노릇 그만두는 것도 아니잖아.”
 정도의 얼굴은 아내가 절로 올라간 뒤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말라간다. 남자를 마르게 하는 건 콘돔만은 아닌 것 같다.
 “실수할 수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시정하지 않고 반복하는 게 문제지. 콘돔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젠가 본데.”
 “절대 반복은 아니었어. 의도적인 것도 아니었어. 그냥 한 번 발을 빗디딘 건데. 이렇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대가지불이란 게 공정성보완을 위한 보조수단일 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등가적, 등질적이어야 하는 게 아니니. 그 때문에 공정성은 또 결여가 생길 테니까.”
 “드라마촬영이 잘 안 돼? 극본도 주연배우도 마음에 안 든다더니.”
 “인생이 드라마라면 얼마나 좋겠냐.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잖아. 극본을 쓰듯이.”
 “갑자기 자유가 부러워진 거니?”
 “너 혹시 그거 알아? 친구의 정직이 귀감보다는 늘 부담이 된다는 걸. 마치도 인생이란 정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마치도 삶은 정직이 쓰는 드라마인 것처럼 숨 막힌다는 사실을 아냐 말이야?”
 “정직은 평범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재생산기술 같은 거라고나 할까. 카메라촬영기술이 사진의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수단인 것처럼. 가치부여인 셈이지. 인생자체는 아니지만 인생자체에 못지 않을  만큼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직은 너무 잔인해. 혹독해. 관용과 포용력이 부족하단 말이야. 인생을 힘들게 하잖아.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고 광기나 다름없어.”
 더 이상의 토설은 금물이라고 생각하고 준범은 여느 때 없이 일찍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가 없는 집이 싫다. 아내가 있더라도 콘돔이 부부사이를 가로막는 침대가 싫다.
 준범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다행이도 전번에 만났던 탤런트지망생 아가씨의 전화번호가 입력된 채로다.
 “자식. 정직 좋아하네!”
 준범은 피식 웃으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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