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는 산산조각났지만 조선족들의 삶의 체온은 번들거리는 사기그릇에 아직도 고스란히 고여있는 듯하다

◇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용정

▲ '사이섬'기념비의 본래 모습.
용정은 조선족자치주인 연길에서 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연길에서 용정을 가다 보면 연변지역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떠오르는 모아산을 발견할 수 있다. 맞은 편으로는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을 끼고 비암산 중턱에 일송정이 우뚝 솟아있는 풍경 또한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용정은 일제치하 저항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 생가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용정에서 개산툰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역시 민족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심연수 시인의 무덤이 있는 골짜기가 보인다. 30분가량 곧장 가면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천평들이다. 이 천평들 끄트머리를 휘돌아 두만강이 흐른다. 천평들에서 수확되는 쌀은 품질이 우수하기로 이름나 있는데 어곡미(御穀米)라 부른다. 중국 청나라 황제께 바치던 쌀이라 해서 어곡미라 부르게 되었으며, 어곡전(御穀田)이라는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해마다 어곡전축제도 성대하게 열린다. 두만강 중류쯤 되는 이곳 천평들 어곡전을 가 본 것이 내게는 너무나 우연한 기회였다.


◇ 용정 강덕진료소 방문

▲ 중국 용정 오정묵 소장이 운영하는 강덕진료소.
보름 넘게 연길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일정 가운데 하나가 용정 강덕진료소 방문이었다. 연변시인협회 비서장이 동행했다. 연변당위에서 내어준 승용차를 타고 용정 강덕진료소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11시 반경이었다. 강덕진료소는 용정시가지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푸른 나무그늘 아래 대문 앞부터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었다. 마중 나와 있는 연변가사협회 황상박 회장의 안내로 1층 집무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오정묵 소장이 진료를 끝내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2층에서 진료를 막 끝내고 온 오 소장과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고 오 소장이 안내하는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오 소장은 연변의학원을 졸업해 WHO세계전통의학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용정의 강덕진료소 소장을 맡고 있는가 하면 '해란강여울소리'라는 연변가사신문 사장직을 맡고 있는 조선족시인이기도 했다.


◇ 개산툰진 천평들의 사이섬

오 소장의 승용차로 갈아타고 간 곳이 바로 개산툰진 천평들이었다. 이어 먼저 찾아간 곳이 사이섬이었다. 얕은 산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펼쳐져 있는 길을 따라 아마 끝간데 쯤 간 것 같은데 거기 길가에 승용차를 세우고 길 오른쪽 숲으로 접어들었다. 흰 띠를 두른 듯한 백양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숲길을 접어들어 가니 그곳에서 부서진 채로 널브러져 있는 돌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글로 '사이섬'이라 새겨 기념비처럼 세운 비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정체 모를 누군가에 의해 망가뜨려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산산조각나 그대로 쓰러져버린 처참한 몰골이었다. 조선족 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이섬 비석의 비애의 현장이었다. 2002년에 이곳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의 선구촌(船口村) 조선족 주민들이 '원조 간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세웠던 것이라 한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 가지는 /애타게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결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는 이곳 간도 조선이주민의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나는 노래 가사다. 몇 해 전 '비석이 어떻게 부서졌는가'하고 관광객이 물으니 주민들이 "한국 사람들이 와서 비석을 들여다보며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 하니까 '당국에서…'"라며 말을 흐렸다 한다.


◇ 우연히 발견한 조선의 체온, 사금파리

▲ 두만강변 사이섬(간도·間島)으로 이주해온 조선족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발을 주워들고 있는 필자.
필자는 한참을 사이섬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모래 속에 파묻혀 초승달모양으로 얼굴 내밀고 있는 사발 하나를 발견했다. 이는 분명 내동댕이쳐 버려진 헌 신발짝처럼 수십년을 방치되어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있다가 필자가 오니 그나마 자신을 알아줄 이 만났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듯 얼굴을 내민 것으로 생각되었다. 필자는 얼른 그 사발을 주워 묻어있는 모래를 털어내고 내 옷자락으로 곱게 닦고 닦아 두 손으로 감싸안아 보았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 걸 우리 '조선민족의 체온'이라 말해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이주해 와 정착해 살던 조선인들의 삶의 체온이 번들거리는 사기그릇 안에 고여있는 듯했다.

이렇게 두만강 사이섬 마을에 와 보니 한국의 여느 농촌처럼 비옥한 들판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다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족들의 비애를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정묵 소장은 비어있는 초가를 하나 둘 사들여 조선민족의 민속마을 공간으로 꾸민다고 했다. 또 용정시 개산툰진, 지금의 광소촌 하천평 이곳 마을주민들과 함께 한글로 새겨진 '어곡전'기념비를 세웠는가 하면, 중국 YBTV에서 '우리노래 대잔치' 순회노래자랑을 개최한 무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으로 말하면 KBS 전국노래자랑 지방순회공연 무대나 다름 아니었다.


◇ 어곡전과 간도의 유래

어곡전은 천혜의 땅으로 왼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국사령(國師領), 뒤로는 선구(船口)산성, 앞에는 군산(群山)이 펼쳐져 있어 풍수지리학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현무 주작이 골고루 갖춰진 지형이다.

사이섬 즉, 간도의 개념은 1860년대를 전후하여 두만강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사이섬에서 잉태되었지만 점차로 그 개념이 확대되어 만주를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그 뒤 어느덧 우리민족의 옛땅인 만주땅 전체를 아우르는 북방영토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간도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두만강 북쪽 땅을 '동간도' 즉, 간도라 부르며, 압록강 북쪽 땅을 '서간도'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두만강상의 섬으로 그 이름을 지키고 있다. 이곳 간도땅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터로 발해 멸망 후에는 여진족이 거주했던 곳이지만 조선 중기 청나라 건국과 함께 신성한 땅이라 해서 200년간 사람들의 거주가 금지되면서 국경이 모호해졌다. 하지만 조선후기 청나라 대표가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쓴 것에서도 확인되듯 분명한 조선영토인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부터 조선민족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이주하여 이 지역 미개지를 개간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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