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1.1. 제4절 교통운수

이주 초기 조선이주민은 떼목운수, 우마차운수, 썰매운수를 교통수단으로 삼았으나 후엔 철도개통으로 하여 도로, 철도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되었다.
두만강수상운수 명;청시기부터 두만강에서 중조 두 나라 백성들은 함께 고기잡이를 하였으며 나룻배가 오가면서 무역도 하고 친척방문도 하도록 건네어주었다. 청나라, 민국시기 훈춘 경내의 두만강에 양수천자-온성, 솔만자-훈융, 고려성-경원, 서위자-용당, 백석랍자-신아산, 벌동-하여평, 권하-아오지, 양관평-경흥 등 나루터가 있었다. 1910년 5월, 훈춘에 정식으로 부두를 꾸린 후부터 범선대는 훈춘시가지 남쪽의 홍기하부두에서 출항하여 서위자 함합화물창고부두를 지나 두만강에 들어선 다음 ‘토자비’를 거쳐 바다로 나아가 서남으로는 조선 웅기항 혹은 청진항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러시아의 모커위와 해삼위에 이르렀다. 「만주연감」에 따르면 1929-1931년 훈춘부두로 드나든 선박과 그 톤수는 입항선박이 2090척이고 출항선박이 1620척이며 수출입톤수는 6만 4343톤이다. 1935년 훈춘으로부터 조선 훈륭까지 경편철도가 정식으로 개통하였으며 훈춘으로부터 조선 경원으로 통하는 도로도 개통되어 두만강수상운수를 대체하게 되었다.
옛길 마을과 마을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면서 자연 최초의 길이 생겨났다. 옛길의 통행은 계절성이 심해서 통행기가 겨울철에 집중되었다. 엄동계절 옛길의 통행이 편리할 때면 조선개간민은 거개 조선 회녕에 다녀가서 소와 말로 꽁이, 천, 소금, 물고기 등을 바꿔온다. 지금 용정에는 두 갈래 옛길이 있다. 용정에서부터 유신촌, 모아산을 거쳐 남강으로 들어오는 길이 한 갈래이고 용정에서 신화촌, 덕신사를 거쳐 개산툰진에 이르는 길이 다른 한 갈래인데 조선 온성군 삼봉지구와 통하는 유일한 옛길이기도 하였다.
도로 1928년부터 용정은 도로건축에 나섰다. 그해 188.66원을 투자하여 연길에서 용정촌에 이르는 40리 길(너비 3장 6척)을 수축했고 또 61.34원을 투자해서 용정촌으로부터 투도구까지의 40리 길(너비 3장)을 수축하였다. 위만시기 이미 47갈래, 총길이 1445리 되는 도로를 끝냈다. 상세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연길-할바령(215리), 연길-길청령(70리), 연길-도문(110리), 연길-용정(40리), 용정-투도구(40리), 연길-팔도구(50리), 연길-마반산(25리), 의란구-위자구(15리), 연길-석인구(35리), 로투구-투도구(30리), 로투구-천보산(30리), 조양천-팔도구(30리), 투도구-이도구(23리), 투도구-장인강(60리), 투도구-복동촌(50리), 용정-동성용(15리), 용정-경안촌(17리), 경안촌-화검향(15리), 인의촌-송가촌(20리), 동성용-인의촌(10리), 용정-화룡현계(13리), 용정-제4구(투도구)지경(18리), 석정촌-백도하자(20리), 석정촌 -석건평(10리), 석정촌-평안향(10리), 석정촌-유림촌(15리), 석정촌-제1구(마반산)구계(15리), 석정촌-수풍촌(10리), 석정촌-종성동(7리), 묘구-명월구(20리), 태평촌-도안동(30리), 유수하자-명월구(20리), 차조구-경령(20리), 동불사-세린하(30리), 동불사-금불사(30리), 모아산-화룡현계(30리), 인의촌-고산촌(5리), 동불사-태평구(12리) 도로이다.

이상 도로는 부역방식으로 백성을 강박해서 수축한 것이다. 1932-1934년 3년간에 길닦이부역에 10여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었고 도구마저 자기 것을 휴대해야 했다. 킬로미터당 도로수축원가는 2000원도 안되었다.
도선장 대부분은 민간에서 운영하였으며 목선이 아니면 뗏목으로 행인과 물자를 실어 강물을 건넸다. 1935년 「만주자동차조사」에 따르면 해란강 유역의 도선장은 수남 나루터, 상장리 나루터, 중평리 나루터, 용정촌 나루터, 모아산 나루터, 유정 나루터, 상안촌 나루터 등 나루터 7개, 나룻배 9척이고 부르하통하 유역의 도선장들로는 토문자상촌 나루터, 차조구 나루터, 유수천 나루터, 백석라즈 나루터, 로투구 나루터, 로투구상촌 나루터, 소기촌 나루터, 대북구 나루터, 소북구 나루터, 마록구 나루터, 태양구 나루터, 곡구자 나루터, 연집강 나루터, 소영자 나루터 등 14개 나루터, 나룻배 17척이고 두만강 유역의 도선장으로는 소소동 나루터, 사동어구 나루터, 막기동 나루터, 대동 나루터, 마래동 나루터, 와사동 나루터, 소거리 나루터, 남치 나루터, 사기동 나루터, 비전동 나루터, 송동 나루터, 광덕봉 나루터, 대동 나루터, 사평 나루터, 산동 나루터, 가도 나루터, 구동 나루터, 향남동 나루터, 사동개문사 나루터, 학성개운사 나루터, 적와평 나루터, 병사평 나루터, 석건평 나루터, 학성평 나루터, 남양동 나루터 등 26개 나루터, 34척 나룻배가 있었다.
배사공은 경찰 측의 심사, 비준을 거쳐야 하며 한번 배 타고 강을 건너면 일본돈 3-8전을 받았다.
광복 후 절대다수의 도선장과 나룻배는 취소당하고 나루터 자리에 영구적인 다리를 수축하였다.
아래에 간도의 주요한 교량을 적어본다.
용문교는 1917년 목제구조로 수축되었고 1941년에는 콘크리트와 목제혼합구조로 세워졌는데 위만지폐 4000원이 투자되었다. 1969년 11월에 아치형돌다리로 바뀌어졌다. 투자액은 40만 원이다.
연길교는 시초에 너비 6미터인 목재구조였다. 1935년에 재건이 시작되어 이듬해 6월에 준공되었다. 총길이는 240미터고 너비는 12.9미터다. 다리의 윗부분 구조는 T형콘크리트 받침대이고 다리보는 20개로서 12미터 되는 횡단간마다 8개의 콘크리트 가름대로 이루어졌는데 간격은 1.58미터다. 총 투자액은 16.7만 원(위만지폐)이다.
개산툰국경철교는 조(양천)개(산툰)선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1920년 10월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이 간도를 침범할 때 바로 이곳에 나무 떼를 무어놓고 그 위에 레일을 펴서 운수작업을 했다. 1926년 10월 착공하여 이듬해 10월에 강철판가름대로 떠받드는 철교가 준공되었다. 투자액은 35만 엔(위만지폐)이다. 1934년, 다시 철교를 철도, 도로 양용교로 고쳤는데 총길이는 327.7미터, 다리보는 14개로서 횡단구간마다의 거리는 20미터, 다리 위의 순 너비는 6.9미터, 철길 너비가 3.3미터이고 인도로 너비가 3.6미터이며 적재량이 45톤, 조선쪽은 55톤, 다리 높이는 9.7미터였다. 광복 후 다리 한복판이 중조 두 나라의 국경선으로 되었는바 중국 측에서 165미터, 조선 측에서 162.7미터 구간을 각기 책임지게 되었다.
삼합국경교는 삼합촌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상거한 두만강에 가로놓여 있다. 1941년 7월, 처음으로 가설된 콘크리트 다리로서 길이 300미터, 다리보 14개, 매 다리보의 길이 24미터, 다리 위의 순 너비 6미터이다. 다리 밑 부분은 중력식 교각이고 윗부분은 T형 강철가름대가 놓여졌는데 다리 높이가 9미터이며 적재량은 10톤이다. 다리 옆에는 국가1급 세관과 통상구가 있다.
도문도로대교는 1941년 11월에 가설된 시멘트구조로서 다리보가 20개, 다리보 사이의 거리는 24미터, 설계수위는 94.71미터, 수로통항거리는 23미터, 통항고도는 1.93미터, 다리 위의 순 너비는 6미터, 총 길이는 493미터이다. 두만강 물줄기의 중심을 국경선으로 하여 중국 측이 98미터, 조선 측에서 395미터를 차지하고 있다.
도문철도국제교는 42만 엔을 투자하여 1932년 8월 6일에 착공해서 이듬해 6월 20일에 완공하였다. 다리는 강철트라스로 된 도로, 철도 양용교로서 총 길이는 432.96미터이고 20미터 되는 강철판구조의 가름대 21개로 다리보를 이었고 설계수위는 95.883미터, 두 교각 간의 통항간격은 18.5미터, 통항고도는 3.62미터이다.
팔엽교(八叶桥)는 도문 동북부, 도(문)우(란호트)선도로의 시발점에서 남북향으로 해란강(가야하) 위에 가로 놓여져 있다. 1940년에 가설된 시멘트다리로서 길이 386미터, 다리보 11개, 다리보마다의 길이 24미터, 차도의 너비 6미터이고 인도는 없다. 다리 밑 부분은 콘크리트교각이고 윗부분은 강철가름대를 얹은 시멘트다리바닥으로 높이가 10미터이다.
자동차운수업 1927년 1월, 맨 처음으로 용정거리에 나타난 자동차는 미국제 ‘포트’소형객차로서 운전수, 조수 외에 손님 여섯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발동기공률은 8마력이었다. 1930년 말, 6가구에 자동차 7대가 있었다. 이 차들은 주로 각 현 소재지와 그 부근의 철도연선역 사이를 오갔다. 1933년, 자동차를 소유한 집(기업소)은 15가구로 늘어났다. 1932년 7월 4일, 자동차 11대를 갖고 있는 용정 ‘신의양행’자동차부는 여객운수와 화물운수를 겸하였다. 주요 운수구간은 용정- 연길, 연길-배초구, 연길-회막동, 용정-상삼봉(조선의 삼봉)이다. 이 시기 용정에서 자동차운수업을 경영한 기업소를 소개하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로이께자동차부’, ‘미즈노야자동차부’, 조선이주민 조영송(赵永松) 씨가 경영하는 ‘삼우(三友)자동차수리부’, 조선이주민 조계흥(赵溪洪) 씨가 1932년 8월 12일에 개업한 ‘서울자동차부’와 중국인이 경영하는 ‘해동자동차부’, ‘등양자동차행’, ‘용정촌자동차부’, ‘영만(永满)상회자동차부’, ‘용회(龙会)자동차부’, ‘보한주식자동차행’ 등이 있다. 국자가에 ‘이와이자동차부’, ‘수수미사깐자동차부’, ‘연길장거리자동차조합’ 등 자동차운수업소가 있었다. 이밖에 도문에 일본인 부지이 시즈마가 1932년 8월 19일에 간도에서 개업한 ‘다아도자동차상회’가 있었다.
1936년, 위만당국은 용정의 15개 자동차운수기업소를 취체하여 ‘연길만철 분회사’에 예속시켰으며 따라서 용정에 ‘만철자동차영업소’가 세워졌다.
철도 천도경편철도는 두 구간으로 나누어 마무리 지었다. 첫 구간은 조선 상삼봉 대안의 개산툰에서 용정촌까지의 58.1킬로미터 되는 거리이다. 1923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두 번째 구간은 용정촌에서 로투구까지의 43.9킬로미터, 조양천에서 국자가까지의 10킬로미터, 도합 53.9킬로미터 거리이다. 1924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전반 공사의 투자액은 445만 8000여 엔이다.


돈도선 철도는 총 길이가 191.9킬로미터이다. 전반 부설공사는 1932년 5월에 착공되었으며 1932년 8월에 전부 끝났다. 전반 부설공사에 든 품은 242만 2100공수인데 중국인이 177만 8200공, 조선이주민이 58만 5300공, 일본인이 5만 8600공수였고 총 투자액은 1659만여 원이었다.

조(양천)개(산툰)선철도는 총 길이 5만 9466킬로미터, 1월에 착공해서 이듬해 3월에 전반 공사가 마무리 지었으며 4월 1일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총 투자액은 5만 6000여 원이고 든 품은 190만 6160공수이며 그중 중국인이 91만 5450공, 조선이주민이 93만 4590공 일본인이 5만 6120공수였다.
용청선(지금의 화룡선)철도는 총 길이 52.399킬로미터이다. 1938년 5월에 착공하여 1940년 6월에 완공했다. 총 투자액은 692만 5000원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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