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핏빛 석양

“벌써 열시잖아. 출근이 늦었어. 서둘러야겠어.”
준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하늘과 아침 정사를 즐기다보니 시간이 늦어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지난밤에도 아내는 귀가하지 않았고 빈 집을 지키기 싫어진 준범은 김하늘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왔었다.
하늘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준범이 지금 촬영중인『연적』에 잠간 나오는 단역만이라도 시켜달라는 것이다. 두 회만 나오는 가정부역인데 연기수준과는 관계가 없는,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역이었다.
“저도 PD님 차로 같이 가요.”
발가벗은 김하늘이 이불속에서 기어 나와 준범의 다리에 매달린다. 유난히도 큼지막한 젖가슴이 시선을 현혹하여 탄력 있게 흔들거린다. 또다시 일어나는 욕정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준범은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고는 침대위에서 내려섰다.
“안돼. 지하철을 타고 와.”
남들에게, 자신의 불륜과 부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금방 정실의 귀에 추문이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실의 앞에서 결백을 잃으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남편의 권리마저 상실하게 된다.
“저 혼자서요.”
“그래.”
“심심하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절대 내색을 내지 말아야 돼.”
“아침식사도 안하고 가요?”
“식사가 다 뭐야. 스태프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준범은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늦지 말고 빨리 와. 오늘은 하늘 씨의 신이 있는 날이니까. 차에서 미리 대본연습도 하고. 알았지.”
“전 몰라요. 절 혼자만 빼놓고 저들끼리만 가면서……”
오늘은 마침 실내촬영이어서 제작팀은 촬영세트장에 모여 준범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왔는지 하늘은 금방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하늘이 첫 등장을 하는 가정부신 촬영에 들어갔지만 NG가 반복되었다. 두 줄밖에 안 되는 대사가 틀리는가 하면 연기가 어색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날 출근을 하는 가장부가 주인공의 집에 나타나 인사하는 신이다. 그녀는 카메라공포증이 있는 사람처럼 리허설 때엔 잘하다가도 카메라만 작동하면 금방 대사를 까먹고 허둥지둥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이큐가 얼마기에 대사 두 토막도 외우지 못하는 거지.”
준범은 웬만하면 화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연이은 NG에 그만 저도 모르게 버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한 것이 부끄러운지 하늘은 금방 시무룩해지며 눈에 눈물까지 글썽해진다.
“이 신은 잠시 뒤에 다시 촬영하도록 하고 먼저 가정교사 신을 촬영하도록 합시다.”
준범은 하늘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튕겨 나올지 몰라 다급히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호주머니에서 띤-띠리리-띤 띠띠-하는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바빠 죽겠는데 누가 또 전화까지……예. 석준범입니다.”
“여긴 강남파출솝니다.”
“네! 파출소라니요?”
뜬금없이 파출소라는 말에 준범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출소에서 전화를 걸어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 판단하고 통화를 중단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다시 한번 준범을 경악시켰다.
“김정실 씨가 선생님의 부인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그건 왜 물으시죠? 제 아내가 무슨 불법행위라도……”
“지금 파출소로 오셔야겠습니다. 부인께서 파출소로 연행되었습니다.”
“연행되다니요? 우리 집 사람이 무슨 일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림을 느끼고 준범은 뒷말을 삼키며 슬그머니 세트장을 빠져 복도로 나왔다.
“오셔서 얘길 합시다.”
“지금 저 바쁘거든요. 드라마촬영중이라서……단속 이유나 말씀해 주시면……”
“마약 복용과 그룹 섹스 현장 신고로 단속되었습니다.”
“뭐, 뭐라고요?! 마약 복용과 그룹 섹스……”
“네. 여섯 명의 남녀가 호텔방에서……”
“알겠습니다. 제가 곧 그리로 갈게요.”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같다. 강복녀가 복수를 위하여 아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처럼 타락과 범죄의 구렁텅이에까지 떠밀어 넣을 줄은 몰랐다. 어디서 그냥 도박을 하거나 외도나 할줄 알았지 범죄행위까지 하다니?!
“지독한 여자야! 내 이 여자를……”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세트장에 들어온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조감독, 촬영감독. 나 급한 일이 있어 좀 나가볼 곳이 있으니 오전만 맡아 줘.”
말 한마디 남기고는 부랴부랴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아내 김정실은 고개를 푹 떨어트린 채 공범들과 나란히 길다란 파출소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준범이 나타나자 머리를 아예 무릎 사이에 묻어 버린다.
“당신 마약 복용하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사실이야?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봐.”
어깨를 잡아 흔들었지만 훌쩍훌쩍 울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이런 짓을 하느라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으로 쏘다닌 거야? 누구야?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구냐고? 말해 봐. 새엄마지? 강복녀라는 그 계집이지?”
그래도 대답이 없다. 두 손으로 아내의 턱을 받쳐 들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지만 정실의 두 눈은 꼭 감겨져 있었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만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마약중독 때문인지, 아직도 마약 효과가 작용 중인지 얼굴 근육이 파득파득 경련하고 있었다. 수면부족으로 초췌하고 수척해진 얼굴은 마치 폐인을 방불케 했다.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난 알아. 다 안다고. 틀림없이 강복녀의 수작이겠지. 당신을 구슬려 이런 곳에 끌어들였을 테지. 내가 그러게 애당초 뭐라고 했어. 그 여자와 상종하지 말라고 했잖아. 외제차 한 대에 그 여자의 음모에 걸려든거잖아.”
억울했다. 그러나 정실은 이미 불구속 입건이 된 상태였다. 구속은 면하더라도 벌과금은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벌과금쯤도 대수롭지 않다. 문제는 항간에 떠돌 추문이다. 아무개 아내가 마약중독자이고 그룹 섹스를 했다고 추문이 떠돌면 준범이더러 어떻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라는 말인가.
“집에서 좀 단속을 잘 해야겠습니다.”
경찰관의 말은 호의였지만 귀에 거슬린다.
당신이 아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냐. 남자구실을 좀 하라고. 아내를 만족시켜주란 말이야. 그러면 여자가 밖에 나가 음탕한 짓거릴 할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빈정거리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경찰관의 기분 나쁜 태도에 벌금 액수를 좀 더 부과하더라도 제발 추문만 밖으로 새지 않도록 막아달라고 부탁하려던 생각마저 단념했다. 사실은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게 몇 번째야!”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가면서 물었으나 정실은 며칠 밤을 자지 못한 듯 옆 좌석에 늘어져 어느새 잠이 들었다. 맥없이 아래로 떨어진 턱으로 침까지 줄줄 흘러 나왔다. 멀쩡하던 사람을, 단정하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강복녀에 대한 증오심이 저주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 나고 파산을 선고하고 차압 당한 것도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강복녀의 책동이었다는 심증은 분명했다. 그만하면 충분한 보복이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의 회사를 망쳐 놓고도 모자라 인젠 아내까지 폐인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다니.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다!
구미호보다도 더 교활한 여자다!
하이에나보다도 더 지독한 여자다!
복수할 사람은 난데 왜 아무 죄도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가.
차가 집에 도착했지만 정실은 깨어나지 않았다.
준범은 정실을 업고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눕혔으나 정실은 죽은 사람처럼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침대위에 내려 놓은 채로 축 늘어져 코까지 드렁드렁 곤다.
“완전히 폐인이야 폐인!”
맥없이 너부러진 아내의 모습을 보니 강복녀에 대한 적개심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이년을 만나야겠어. 만나서 담판을 해야겠어.”
휴대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의외에도 앙숙인 그녀의 전화번호는 머릿속에 정확하게 입력되어 있었다. 그러나 손의 경련으로 몇 번이나 번호를 틀리게 눌렀다. 네 번만에야 통화가 연결되었다.
“네.”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악행 같은 건 그녀와는 연관이 없는 듯이, 목소리만 들어서는 선량하고 착하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처럼 느껴질 만큼 강복녀의 목소리는 예의바르고 부드러웠다. 속에는 변질한 내용물을 감추고 겉만 금, 은도금이 번적거리는 화려한 포장을 한 가짜 상품에 사기당했을 때의 그런 기분이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능청스럽게도 배포 있는 인내와 만만한 여유까지 보인다. 남의 회사를 파산시키고 생생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최소한 불안감이나 초조함 같은 것은 보여야 정상적 인간의 심리일 것이다. 다시 한번 숙적의 지독한 내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어서 가슴 한 구석이 섬뜩 얼어든다. 라이벌치고는 만만치 않은 라이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끝을 보지 않고는 물러 설 기미가 아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전화를 끊습니다.”
화라는 말조차 모르는 성인군자 흉내를 내고 있다. 처음 강복녀를 본 순간부터 그녀가 거느린 분위기는 범상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손아귀에 휘둘리지 않을 강직함과 송죽 같은 오기와 당돌함이 엿보였었다. 그때 미리 강복녀의 병적인 집착을 간파하고 보복공격을 대비했어야 했었다. 그냥 연약한 여자라고 방심했던 게 화를 부른 연유가 될 줄이야.
“준범입니다.”
존칭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랬다. 아니, 그녀의 강공强攻에 얼어들고 공포에 질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자신도 여유 있고 당당한 모습이고 싶다.
“그래~ 우리 준범이가 웬일이지! 엄마한테 문안 전화 다 주고. 효도할 줄 다 알고. 인제야 어른이 되려나 봐.”
“자칭 엄마라는 말을 그토록 스스럼없이 입 밖에 흘릴 수가 있을까. 게다가 효도까지 운운하고?!
구토가 울컥 치밀었다.
“연극은 그만하고 인젠 막을 내리는 게 어때요? 그만하면 화도 풀렸을 법 한데.”
“막을 내리다니. 안 되지. 이제 겨우 서막일 뿐인데.”
“우리 잠간 만납시다.”
“데이트 신청이라면 말투가 부드러워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화내면 상대방이 놀래잖아.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신청해 봐. 엄마라고 부르고.”
그녀는 적수의 스트레스를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쌩쇼를 하고 있는 겁니까! 정말 이렇게 잔인할 줄까지는 몰랐습니다.”
“쌩쇼라니. 쌩쇼는 엄마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아들이 하는거잖아.”
“됐어요. 그쪽 집 아래 커피숍에서 기다릴 테니 얼른 나와요.”
준범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한마디만 더 대화를 연장했다가는 인내의 방선이 붕괴되고 머리통이 빠개지거나 그냥 확 휴대폰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거나 북받치는 화를 삭일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주 그냥 염장을 질러라, 질러. 독사 같은 년!”
어느새 목련꽃은 거의 지고 낙화의 계절을 맞고 있다. 눈꽃처럼 하얗게 눈부시던 꽃잎들이 비 내리듯 펄펄 날아 떨어지며 행인들의 구둣발과 차량들의 타이어에 짓이겨져 꺼멓게 죽어간다. 목련, 개나리, 산수유꽃이 진 흑백의 공간을 푸르고 노란 녹음이 짙은 채색으로 메우고 있다.
그러나 준범은 자연의 그런 황홀한 변화에도 흥취가 없다. 흥분과 긴장으로 그의 육신은 줄곧 경련이 발작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만나자 마자 일격에 쓰러트릴 전략전술은 없을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다시는 그 음흉하고 악착스러운 마수를 뻗쳐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방법은 없을까.
조종간을 잡은 손이 떨리며 차체가 심하게 머리를 흔든다.

다음에 계속 /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