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어 공포와 두려움에 전율하는 쪽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준범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죄 값을 치르자'면 도대체 어디까지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가. 파산, 타락을 이어 죽음까지……
강복녀는 약속한 커피숍에 나오지 않았다. 벌써 그녀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잔뜩 불어 넣은 기가 얼마쯤은 빠져 나간 느낌이다. 일부러 그녀가 동거하는 아버지의 집 근처 커피숍을 선택했는데도 준범이 차로 20분도 넘어 걸리는 거리를 달려 올 때까지 강복녀는 그의 기염을 꺾을 목적에서 의도적 시간 지연 전술을 택한 것이다. 치밀함과 노련함에서도 준범은 그녀보다 한 수 아래여야 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이러다가 시작부터 오늘 설전의 주도권은 강복녀에게 양도해야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해진다.
30분이나 더 기다리며 커피 두 잔을 비웠지만 강복녀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준범은 좌불안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설전에서의 승리는 둘째고 자존심 수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준범을 그 무슨 대등한 자격의 적수거나 유유상종이 아니라 엄마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강복녀는 준범의 기세를 압도할 만한 또 하나의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회사가 강복녀의 손에서 파산되었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젊은 아내의 요염한 미모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녀의 말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간다는 건 곧 기권이고 투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앉아 찬바람을 맞더라도 그녀를 담판석상에 불러내야 상실한 체면이나마 복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그마저 단념했다. 자신에게도 여유와 인내 같은 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컴퓨터게임에서조차도 인내성은 승리의 기본조건이고 조급함은 금물이라는 상식쯤은 어린애들도 알고 있다.
강복녀는 무려 1시간 36분이나 지나서야 유유히 커피숍에 나타났다. 서두르는 기색도 미안한 표정도 없이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홀 안에 들어섰다. 준범이 대기하고 있는 쪽을 거들떠 지도 않고 다방마담과 느긋한 인사수작을 나눈 뒤에야 이쪽으로 다가왔지만 사과 한마디 없다.
“이 다방은 언제 와 봐도 분위기 짱이야. 무르익은 봄 냄새가 물씬 풍기잖아. 싱그러운 정취와 여백미도 있고.”
준범은 그녀의 능청과 태연에 다시 한번 속이 발칵 뒤집혔다. 고의적인 무시와 조롱임을 알면서도 참아야만 했다. 욕설은 지성의 표현이 아니다. 상놈들이나 하는 추태이다. 더구나 그녀가 지금 잔뜩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자세를 짓는 목적이 준범의 화를 극도로 자극하여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놈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뻔하다. 그럴수록 그녀의 간교한 계책에 말려들지 말고 분노를 가다듬고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만들어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
“약속을 어기는 것도 복녀 씨의 미덕인가 보죠.”
“씨가 아니라 엄마지. 그리고 엄만 준범이와 약속 같은 거 한 적이 없어. 나랑 언제 시간을 정하기라도 했어……커피요. 설탕은 빼고요. 전 쓴 것이 도리어 달콤해요.”
그때 테이블로 다가온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하느라 그녀의 말이 잠간 중단되었다.
통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던 준범의 미숙함을 꼬집어 충동적인 경솔한 성격적 결함을 비웃고 있다. 게다가 준범이와의 만남을 쓴 커피에 비유하며 인격 자체를 평가절하 하는 아이러니까지 구사한다.
예를 갖추며 설전을 벌이다가는 효과적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도 실패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끄집어 내어 기습작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말고 속전속결로 승패를 갈라야 한다.
“도대체 바라는 게 뭡니까? 어디까지 갈 건데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너답지 않게 무슨 말이니. 엄마가 연약한 여자라는 걸 망각한 건 아니겠지.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 봐요. 커피 맛도 은은하게 향유하면서……”
강복녀가 여유를 부릴수록 준범은 초조해졌다. 그녀가 숙녀인 척 할수록 준범은 상놈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 결과가 바로 그녀가 바라는 효과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느긋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 집안에 피해를 줄 거냐고?”
준범의 손에서 커피잔이 흔들리며 스푼이 달그랑-달그랑- 소리를 냈다. 커피잔에서 피어 오르던 수증기가 준범이 토해내는 거친 입김에 허리가 부러지며 산산이 흩어진다.
“어머, 어머. 얠 좀 봐. 누구더러 너희 집안에 피해를 입힌다는 거니. 엄마가?”
“능청 좀 그만 떨어요. 가면을 벗으라고요.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당신은 알거잖아요. 아버지회사를 망치게 한 장본인도 댁이고 정실이를 폐인으로 만든 장본인도 그쪽이라는 걸.”
커피를 입가에 가져가다 말고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얼굴에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그 눈빛에 서릿발이 번뜩여 가슴이 섬뜩해진다. 그녀의 얼굴은 그처럼 교양 있고 품위 있고 지적인 세련미가 넘쳤지만, 심지어 부처님의 자애로움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 뒷면에 숨겨진 싸늘한 냉기를 준범이만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는 어쨌다는 거야. 소송이라도 걸겠다는 거야. 그래 맞아. 죄다 내가 한 짓이야. 그러나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죄가 성립되자면 증거가 있어야 된다는 걸 너도 알 테지.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지. 왜 그런지 알어. 그건 하느님은 공정하기 때문이야. 정의라는 게 있어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내리는 거지.”
“징벌을 받더라도 내가 받으면 될 거잖아. 왜 아버지와 아내까지 벌을 받아야 되냐고? 그들에게는 죄가 없잖아.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더 이상 남의 눈길 같은 것에 얽매어 내키지 않는 경어를 쓰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나더라도 품위는 잃지 마. 그건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너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댁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댁은 우리 아버지의 성격적 결함을 악용하고 사기 친 거지. 정당한 애정을 기초로 결혼한 새엄마가 아니잖아.”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정당함! 우린 법적으로 인정 받은 부부야. 정당함과 법이 꼭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난 인정 못해. 정당하지 못한 결혼은. 댁은 그 무슨 새엄마도 아니고 강복녀도 아니야. 죽은 미혜의 동생 미라라고. 그래 맞아. 미라. 인제야 댁의 이름이 생각나네. 언니의 복수를 하려고 우리 집안에 기어든 독사 같은 년이라고!”
“그래, 그래. 맞았어. 다 맞아. 인제야 내 이름을 기억해 냈구나. 알면 됐어. 죄를 졌으면 참회하고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내가 무슨 죄를 졌는데? 내가 취중실수로 댁 언니의 순결을 짓밟은 건 잘못된 행위이지만 실은 그녀도 자원했던 거라고.”
“아무튼 언니를 죽음에로 내몬 건 너야.”
“미혜의 죽음이 나랑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난 미혜를 죽으라고 핍박한 적도 내 손으로 살해한 적도 없어. 그녀 스스로 자진한거야.”
“자결은 왜 했지? 낙태하라고 강박한 건 누구였지? 집 근처에서 떠나라고 내쫓고 구타하고 가장집물 때려 부수고 돈을 주면서 회유한 건 누구였냐고?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니가 왜 자살을 해.”
“그건 아버지가 한 일이고 내가 강박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도 죄가 있다는 거야. 당연한 징벌을 받아야지.”
준범은 화가 치밀어 안절부절못해 의자에서 요란한 소리가 삐걱거렸지만 미라는 그림처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다.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내 아내는 왜 건드리는 거야?”
“아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남편을 외도하게 만들었잖아. 정실이가 아내의 책임을 다해 자기 남편을 모셨다면 우리 언니와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런 게 다 이유가 돼. 고만한 일 때문에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자신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어?”
“전혀. 미라는 벌써 언니와 함께 죽었어. 난 미라가 아니라 강복녀야. 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만 살아있는 거지. 이 세상에는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나의 실천으로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고야 말거야. 그래야 힘이 없는 약자들도 희망을 품고 살 거 아니야.”
“정의 좋아하네. 그건 네가 정의라는 허울 좋은 미명 하에 자신의 본능 속에 숨어 있던 잔인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는 걸 의미할 따름이야. 넌 천성적으로 지독한 여자야. 넌 생생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놓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코브라야. 그러지 말고 나랑 둘이서만 결투를 하자. 너의 도전을 받아들일 테니까.”
“받아들이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난 진작 선전포고를 했으니까. 그러잖아도 이번 차례는 준범이 너였어. 네가 원한다면 복수과정이나 구체적 계획을 알려줄 수도 있어.”
그녀의 당당함은 거의 준범의 인격과 지능을 저능아로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오만하고 당당한데. 일개 여자가. 난 정말 이해가 안돼. 난 이 자리에서도 한 주먹이면 댁을 보낼 수 있는 남자라고.”
“유감스럽게도 힘으로 승부를 결정하던 야만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어. 지능싸움에서는 아마 준범이가 내 상대가 안 될걸. 지혜는 정의의 편이니까. 그러니까 소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미라의 입가에 엷은 조소 한 가닥이 걸린다. 우아한 자세로 커피잔을 들어 나머지 커피를 유유히 마신다. 잔이 비워지는 쪼르륵- 소리가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제 할말은 끝났다는 무언의 암시일 것이다.
“알려 줘도 무방해. 도리어 그쪽이 더 스릴 있고 드라마틱할지도 모르니까. 댁은 오래지 않아 비리사건으로 방송국에서 축출당하게 될 것이고 절망과 좌절에 철저히 무너지고 말거야.”
비리사건이라는 말이 극심한 충격으로 의식을 강타했다. 비리라면 금품수수나 불륜에 관한 일일 것이다. 느닷없이 얼마 전에 계좌에 입금되었던 정체불명의 돈과 호텔침대위에서의 김하늘과의 불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 김하늘이 혹시 미라가 설치한 올가미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라가 아무리 교활하고 음흉한 여자라고 해도 그만큼 치밀하고 완벽한 여자는 아닐 거야.
“이걸 집에 갖고 가봐. 재미있을 거야.”
미라는 핸드백안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위에 내려놓는다.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알릴 듯 말 듯 스쳤다.
이걸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언뜻 결단을 내릴 수 없어 준범은 한동안 망설였다. 성냥곽보다 조금 더 큰 테이프 속에 과연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만한 엄청난 증거물이 확보되어 있을까.
“이 따위엔 난 관심도 없어. 두려울 것도 없고. 난 위법행위나 패덕행위를 한 적이 없으니까.”
준범은 그녀가 파놓은 수렁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번쩍 쳐들고 테이프에서 시선을 뗐다.
“그래? 그럼 좋아. 이 탁자에 그냥 놓아 두지 뭐. 누구라도 가져다가 보겠지. 내 수중엔 원본이 있으니까.”
미라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녀의 깊숙이 파인 셔츠 깃 속으로 잘 익은 가슴이 눈부셨다. 하얀 스커트 아래로 뻗어 내린 날씬한 두 다리는 현란한 유혹을 발산했다.
“잠깐만!”
준범은 가까스로 쌓아 올린 인내의 모랫둑이 무너지며 또다시 미지의 몽롱한 충동에 매달렸다.
“이 테이프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겼는데?”
“보면 알거 아냐.”
미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팔등신의 날씨한 몸매가 다방 안 남자들의 눈길을 일시에 끌어 모았다.
“혹시 김하늘이라는 아가씨가?”
“세상에 공짜라는 게 어디 있어. 다 우리 언니처럼 어눌할 줄 알았지?”
“그 애를 시켜서 날 궁지에 몰아넣은 거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등신은 아니네.”
“당신 정말 너절하고 용렬한 계집이구나!”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목청을 높였다. 그 바람에 실내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당신 회사에도 알리고 싶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잖아. 아직은 댁이 죽을 때가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죽게 할 순 없어. 언니처럼 고통을 받다가……”
“됐어! 그만 지껄여! 지독한 년!”
“그 말도 아직은 시기상조야. 준범이가 우리 언니처럼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날 그 말이 나와야 의미가 충분히 살아나겠지.”
미라는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홀을 빠져 나갔다. 손님들에게 이쪽저쪽 인사를 건네고 카운터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들의 음탕한 눈길이 그녀의 얼굴이며 가슴이며 엉덩이며 종아리며 파리떼처럼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독한 년! 난 안 죽어! 내가 왜 자살을 해. 누가 죽나 두고 보자.”
준범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운터에서 결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봄날이다. 철늦은 꽃들은 무르익은 향기를 그윽하게 풍기며 아름다움의 최후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준범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머리가 어지럽고 자꾸만 구토증세가 발작했다.
“응, 그래 해보자고. 빌어먹을 년! 미친년! 결국 죽는 건 네년일 거야. 기다려.”
시동을 걸면서도 연신 잇새로 독설을 퍼부었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