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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는 지난밤 지리산 행에서 늦게 귀경한 노독으로 늦잠을 잤다. 그동안 타고 다니던 승용차는 얼마 전에 석재수의 가택과 승용차 등 가산이 채권은행에 의해 차압되면서 고속버스교통편을 이용하느라 피로가 심했던 것이다.
“이 석재수가 아무리 죽게 되어도 복녀 하나만은 호강시켜 줄 수 있어. 걱정 마.”
호화주택에서 쫓겨나 어느 달동네의 월세방으로 옮기면서도 석 사장은 그녀에게만은 호텔방에 거처를 정해주었다. 회사는 망해도 사장 폼은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라도 여기 호텔에 그냥 남아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석재수와의 정략결혼을 정리하고 그와 갈라져야만 한다. 그와 갈라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석재수와 김정실에 대한 복수는 이 선에서 스톱을 할 때가 된 것이다.
프런트에서 전화가 왔다.
“강복녀 씨. 벌써 3일째나 호텔투숙비가 연체되었습니다.”
“석 사장님이 입금하기로 됐었잖아요.”
“입금도 안 되고 연락도 끊긴 지 한참 됩니다. 미안하지만 오늘 중으로 방을……”
“알았어요.”
카메라 촬영차 3일간 지리산 행을 하면서 휴대폰을 꺼놓고 있었기에 석재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헛일 삼아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불통이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빚쟁이들이 떼거리로 밀려들어 석 사장더러 빌려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공갈했었다.
혹시 그녀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사실 여기까지는 미라가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이다. 미라의 예측대로 일이 마무리되면 그녀의 시나리오에서 석재수의 역할은 종을 친다. 그러면 미라도 이곳을 떠나 다시 보광동의 그 반지하방으로 옮겨 제3회 종장제작에 착수할 것이다.
미라는 대충 화장을 끝내고 호텔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 타고 석재수가 일전에 알려준 주소지로 달렸다. 한낮의 무더위가 아스팔트도로를 고무처럼 노글노글 녹인다. 보도를 걸어가는 행인들의 얼굴에 땀이 번들거렸고 저만큼 앞의 차도위로 지열이 그물그물 피어오르며 아지랑이처럼 춤을 춘다. 그러나 다행이도 차내는 히터 작동 덕분에 오싹하는 냉기마저 감돌았다. 감기 걸리기가 십상이다.
반지하방은 동굴처럼 텅텅 비어 있다.
부서진 도자기며 뒤집어진 테이블이며 구석에 나뒹구는 선풍기며 옷가지들로 방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장판 바닥에는 구둣발자국이 지저분하게 찍혀 있고 핏자국도 군데군데 말라붙어있다.
“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구둣발로 마구 짓이기는데……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주인아줌마는 아직도 그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미라는 짐작은 갔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빚 받으러 온 사람들 같았어요. 빚을 갚지 않으면 죽인다면서 각목으로 머리를……어머. 무서워!”
“그 사람들이 이 집을 어떻게 찾아냈대요?”
“나야 모르죠.”
미라는 지리산으로 출발하며 사채꾼들에게 석 사장이 잠적한 처소를 슬쩍 흘렸던 것이다.
“내가 밖에 나가 가만히 경찰에 신고했으니 망정이지 나 아니면 석 사장님은 필시 그 사람들에게 매 맞아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에요? 따님인가요?”
“아니, 그냥 아는 사이에요. 애쓰셨어요. 이거라도.”
미라는 지갑에서 십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어 아줌마에게 건넸다.
“이걸 어떻게……”
그러면서도 여인은 돈을 받아 주머니에 슬쩍 질러 넣는다.
“그 분이 어딜 가신 거죠?”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제가 앰뷸런스까지 불렀거든요.”
“고마워요.”
모든 것이 그녀의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이로서 석재수와의 게임은 종료될 것이다. 아직도 석재수는 미라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회사를 망치고 백수가 되었으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입원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상을 밝히는 일만 남았다.
석재수의 병상 옆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머리와 눈, 팔과 가슴,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팔에 링거주사를 꽂고 병상에 길게 누워 있었다.
천하의 석 서장이 이런 꼴이 되다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꼭 이래야만 했던가.
준범이 말처럼 내가 너무 잔인했던 건 아닐까.
다른 환자들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도 그에게는 없다.
“사장님.”
미라는 나직이 불렀다.
그러자 죽은 듯이 감겨져 있던, 붕대를 감지 않은 그의 왼쪽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복녀야. 왔어.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물까지 눈시울에 그들먹이 고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미라 한 사람 뿐이다.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진작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진작부터라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석재수의 눈에 의혹의 그늘이 드리운다.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다고요. 사장님은 정말 하나도 눈치 채지 못했나요?”
“눈치 채다니? 뭘 말이야.”
“내가 누군지. 내가 정말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했을 거라고 믿었나요?”
“복녀.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사랑하지 않다니. 그럼 결혼은 왜 했어? 혹시 이 총무 말대로 우리 회사 개발제품 기밀을 누설한 게 너였어?”
“사장님 생각엔 어때요?”
“그럴 리가 없지.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복녀를 의심해도 나만은 복녀를 믿어. 방금 전에 이 총무가 다녀가면서 회사 기밀을 빼돌린 사람이 복녀라고 우겼지만 난 욕해서 쫓아 보냈어. 다시 내 앞에서 복녀에 대한 험담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어. 그치? 내 말이 맞지? 복녀가 그런 게 아니지.”
“맞아요. 이 총무의 판단이 아주 정확했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었어?”
“네.”
“무엇 때문에? 이유가 없잖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해도 은혜에 보답은 못할망정 악으로 대하다니. 왜냐고?”
“보답은 진작 했어요. 젊음과 순결을 가지고도 뭘 더 바라요.”
“그래. 그밖에 또 뭐가 있어? 왜 나를 망하게 했냐고? 이유 좀 말해 봐.”
“알고 싶다면 말해 줄게요. 난 강복녀가 아니라 미라에요. 당신이 죽인 은미혜의 여동생 은미라라고요. 언니 복수를 하려고 당신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거죠. 인젠 알겠죠.”
“은미라라고.? 은미혜는 또 누군데? 난 그딴 여자 몰라. 내가 아는 여자는 강복녀 뿐이야.”
“댁의 아들 체면만 중하고 다른 사람 목숨은 파리보다 못한가요. 사람을 죽음에로 내몰고도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다니요. 당신은 정말 잔인해요.”
“내가 누굴 죽음에로 내몰았다는 거야. 왜 생사람을 잡으려고 해.”
석재수가 흥분하여 육신을 꿈틀거리는 통에 침대가 삐거덕 삐거덕 부산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미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당신 아들 준범이가 임신시킨 여자를 핍박하여 죽인 일을 벌써 잊었나요?”
“아, 인제야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 자살했다던 여자 말이지. 그 애가 복녀 언니라고?”
“그래요. 언니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잖아요.”
“그 여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난 그냥 우리 집 근처에서 멀리 꺼지라고 했을 뿐이야.”
“댁이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 줄을 알고 내가 여기 언니가 죽기 전에 쓴 일기 몇 장을 갖고 왔어요. 당신한테 읽어줄 테니 어디 들어봐요.”

2003년 1월 8일

준범씨는 오늘도 날 만나 주지 않았다.
저녁에 준범씨의 부친 석 사장님이 보낸 사람들이 나타나 집도 사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줄테니 나더러 복중태아를 낙태하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난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복중태아는 나와 준범씨의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며 또한 우리 사랑의 결실이다.
준범씨는 나의 첫사랑이다.
난 준범씨를 사랑한다.
난 아기를 출산할 것이다.
준범씨가 낳아달라고 당부한 아기다.
그들은 일주일간 시간을 준다하고는 어디로가 뿔뿔이 사라졌다.

2003년 1월 11일

석 사장이 또 사람을 보내왔다. 낙태하기 싫으면 나더러 서울을 떠나 멀리 지방에 내려가 숨어 살라고 협박한다.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겠다고 구슬린다. 집도 사주겠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은 다시는 서울근처에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한다.
난 돈도 싫고 집도 싫다. 여기서 애만 출산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3일 내에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무슨 화가 미치더라도 자기들을 원망하지 밀라고 위협하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난 죄 지은 일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것도 죄인가.

2003년 1월 4일

이른 아침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깡패들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자기들이 이 집을 전세 냈으니 나더러 방을 빼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사람이 경우시비가 있어야지. 전세 맡은 건 좋지만 방을 빼는 사람한테 며칠 간의 시간은 줘야 할 게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불짐이며 옷가지들을 죄다 문밖에 활활 내던지더니 나까지 밖으로 내쫓았다.
난 이들이 석 사장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무법천지의 만행에 분통이 터졌지만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준범씨의 얼굴을 봐서.
갈 곳이 없다. 친척은 고사하고 지인조차 없다. 여관에 투숙할 만큼 지갑에 돈도 없다.
아니, 설사 갈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 준범씨를 만나기 전에는. 그이가 나랑 복중태아의 존재를 받아주기 전에는.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는. 엄동설한에 밖에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준범씨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난 그일 사랑하니까.

2003년 1월 29일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든다.
시장에 가서 텐트를 사다가 준범씨가 사는 집 근처의 좁은 골목길에 거처를 만들고 밖에서 풍찬노숙한 지가 벌써 보름이 넘는다. 두꺼운 이불 몇 채와 연료스토브 덕분에 얼어 죽지 않고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
배는 점점 불러온다. 4개월이 다 되어 온다. 그런데도 준범씨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무정한 사람!
그러나 출산을 하려는 나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 아이만 낳으면 준범씨의 마음도 돌아설 것이 틀림없다.
조금만 참자. 이 겨울만 넘기면……
날이 어두워 갈 무렵 한 패거리의 망나니들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텐트며 이불이며 식기들을 골목 여기저기에 내팽개치고는 도둑놈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뺑소니쳤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현기증까지 발작했지만 가까스로 진정하고 살림살이 도구들을 주워 모았다.
네놈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도 소용없어. 난 꼭 아이를 낳고 말거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세상에 사랑의 힘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

2003년 2월 23일

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죽고 싶다. 사글세방에서 추운 겨울의 길바닥에 쫓겨났을 때도, 망나니들이 나를 강제로 차에 싣고 병원에 끌어다가 낙태시키려고 했을 때도 난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수술대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의사의 팔을 이로 깨물어 낙태를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아이마저 유산했다. 붉은 핏덩이가 내 하신을 적시며 이불위에 쏟아져 나오는 순간 나는 생의 욕구를 상실하고 말았다. 귀축 같은 야만인들이 어두운 밤 골목길에서 임신한 나를……나를……윤간했다!!
그들은 도깨비나 괴물로만 보였을 뿐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아- 준범씨와 우리 아기와 함께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유람하는 게 나의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마저 이루지 못하고……
한 놈은 내 입을 틀어막고 한 놈은 나의 두 팔을 위로 벌려 무릎으로 누르고 다른 한 놈은 다리를 벌려 발목을 잡고 또 한 놈은 내 옷을 벗기고 나를 능욕하고 유린했다. 그렇게 번갈아가면서……
분노와 원통과 절망감으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괴한들은 사라졌고 내 하신은 피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붉은 핏덩이가 털렁 돌덩이처럼 이불위에 떨어지며……
난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과 인간들을 증오하고 저주한다. 사랑이 무슨 죄이기에 이런 폭행과 유린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에 도대체 정의란 것이 있는가? 정의란 것이 있다면 저 천인공노할 귀축 같은 만행을 저지른 죄악에 찬 놈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놈들을 시켜 나에게 능욕을 들씌운 석 사장더러 다리 뻗고 잠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하다!
하느님께 저 악귀 같은 사탄의 무리들에게 벌을 내려주십사 기도를 드릴뿐이다.
……

병상이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잠이 들었는지 석재수의 왼쪽 눈은 꼭 감겨져 있다.
미라의 눈에는 어느덧 이슬이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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