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61

“이 일기는 언니가 죽기 전에 나한테 편지로 우송한거예요. 여기서 끝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언니는 죽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당신이 사람들을 시켜 시신을 안치한 텐트를 골목에서 치우라고 했잖아요. 강제로 텐트를 철거했고 시신마저 병원으로 실어가려고 했어요. 경찰까지 불러왔던 걸 기억하죠. 내가 끝까지 그곳에서 버티니까 할 수 없이 준범이가 조문을 왔더군요. 사람을 죽음에로 내몰고도 사과한마디 하지 않는 지독한 인간들! 그때 내가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사실의 전모를 밝히고 이 일기를 경찰에 제시했어도 당신들은 법적 처벌을 받았을거예요. 그러나 난 그런 처벌로는 언니가 받은 수모와 굴욕을 설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이나 법의 힘을 빌지 않고 내 손으로 죄인들을 징벌하기로 마음먹었던거예요.”
“난 복녀가 그 여자의 여동생일 줄은 정말 몰랐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날 용서해 줘.”
석재수는 눈을 비스듬히 뜨더니 간절한 표정을 짓고 미라를 쳐다본다.
“당신이 저지른 죄악은 이미 언니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졌어요. 언니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용서를 빌 자격조차도 없어요.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어요. 다른 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미라는 조용히 입원실에서 나왔다.
“강복녀.”
석재수의 애절한 부름소리가 발목을 잡았지만 미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복도에 나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불쑥 안에서 꽃다발을 든 준범이가 나왔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무슨 일로 병원에까지 들락거려? 기어이 숨이 떨어지는 걸 보고야 시름 놓을 작정이야. 우리 둘만의 전쟁이라고 그랬잖아.”
“그래 오늘부로 선전포고를 할게.”
미라는 한마디 남기고는 오연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직도 자신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왜 울었지? 승자는 난데.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의 얼굴 어딘가에 새파란 독기가 서려 있다. 그래서 그녀는 냉담한 느낌의 파란색을 좋아한다. 서울에 올라 오자 이름을 파랑이라고 고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파란 색은 투명하고 순수하면서도 싸늘하고 섬뜩한 독기가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윤정도는 그녀만 보면 사춘기의 소년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일이 이상하다. 그의 눈에는 내 얼굴의 이런 광기가 보이지 않을까?
호텔에서 나왔으니 인젠 거처를 정해야 한다. 소지품이라 해 보았자 트렁크 두 개뿐이다. 택시에 실으면 그만이다.
다시 돌아 올 예산을 하고 보광동 반지하방의 전세를 빼지 않고 있었다.
방 안에는 열기와 함께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석재수의 호화주택이나 호텔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근함과 평온함이 가득했다.
낯익은 건물들과 골목들을 보니 윤정도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그 중에서도 윤정도는 각별한 존재이다. 그가 처자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윤정도는 미라의 가슴에 이성으로 다가왔다. 자신은 사랑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다고 진작 포기했었다. 자신의 목숨은 언니를 위한 만큼만 살아 있는 것이라는 체념에서 사랑의 조건과 자격이 될 순결마저도 선 듯 석재수에게 팔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정도와의 만남에서 만은 자신의 더럽혀진 순결의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건 웬일일까. 그에게 애정이라도 느낀 것일까.
되지도 않을 소리다. 난 이미 사랑과는 담을 쌓았다. 내 몸은 이미 창녀와 다를 바 없는 더러운 걸레짝 같은 존재일 뿐이다. 어떤 이성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한 여자다. 언니는 순결 만을 위해 여자로서 결백함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비참한 죽음까지 당했다. 더러움과 결백의 전쟁에서 이기는 쪽이 더러움이라면 그 더러움을 택해서라도 준범이와의 게임에서 이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순결, 결백 같은 단어는 작가들의 글에서나 즐겨 써먹는 사치품일 뿐 생활 속에서는 어떠한 작용도 실용성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니다. 솔직히 그녀가 준범이와의 게임에서, 부정과의 전쟁에서 내댈 밑천은 오로지 하나 몸뚱이뿐이었다. 서울 땅에 와서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튼 미라는 결국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저녁 무렵에는 『패밀리사진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방문 구실은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서였지만 솔직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진관은 길 건너편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요즘 촬영한 많은 필름들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언니의 소원을 풀어 주자면 전국을 한 바퀴 정도는 순회해야 할 것이다.
사진관 문 앞에 이르자 미라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얼굴을 붉히며 첫사랑에 들뜬 소녀처럼 허둥지둥할 윤정도의 표정이 벌써부터 그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내가 왜 이러지?
미라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느라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는 카운터아가씨만 있고 윤정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아가씨가 윤정도의 여동생이라는 사실도 미라는 알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파랑 씨. 오랜만이네요.”
손님이 없는지 한가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던 미경이 일어나서 반겨 맞는다.
미라가 백에서 필름을 꺼내 주자 미경은 일일이 카드에 기록했다.
“이번엔 현상이 좀 늦어질 것 같아요. 오빠가 요즘 스튜디오에 나오지 못하시거든요. 아가씨가 맡기는 필름은 오빠가 직접 현상하는지라……저더러는 손도 못 대게 해요.”
미라의 관심이 오빠에게 있어서인지 오빠의 관심이 파랑에게 있어서인지 미경은 자신의 존재를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 슬쩍 빼 버린다.
“출장 가셨나 보죠?”
미라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냥 슬쩍 의문 한마디를 던졌다.
“조카애가 앓아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수발 들 사람이 없어서.”
“따님이 앓는다고요? 무슨 병인데 입원까지.”
“백혈병이래요.”
“네?!”
미라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었던 필름을 카운터에 털렁 떨어트렸다. 그 말은 오래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어 충격도 그만큼 컸다.
“아이 어머니는 안 계신가 보죠?”
미라는 저도 모르게 불쑥 튕겨나간 질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때를 놓칠세라 미경의 풀기 있는, 호기심이 발린 시선이 미라의 얼굴에 날아 들었다. 미라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아직 모르고 계셨나 봐요?”
“뭘 말이죠?”
“미미엄마가 집 나간 사실 말이에요.”
“사모님께서 집을 나가셨다고요!”
“출가했어요. 이런 말을 해야 되나 모르겠네요. 전 오빠가 파랑 씨한테는 말한 줄 알았는데……”
“출가라니요! 어디로요?”
“용천사라는 절에 들어갔어요. 벌써 6개월이나 돼요.”
“설마 비구니가 되신 건 아니겠지요?”
“비구니가 되셨어요.”
“그랬었군요!”
윤정도의 눈에 늘 짙게 비껴 있던 수심의 그늘이 무슨 연유에서였던가를 알 것 같았다.
“왜요? 남편과 따님을 두신 분이.”
“저도 모르겠어요. 오빠도 그 이유를 모르고 계세요.”
더 이상 묻는다는 건 결례였다.
“조카가 입원했다는 병원이 어딘지 혹시……”
다시 한번 얼굴이 화끈해 났지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호기심에 떠밀렸다.
“□□□병원이에요.”
미라는 밖으로 나오자 마자 사진관 앞에서 택시를 불렀다. 승차하면서 보려니 스튜디오의 유리창으로 미경이 얼굴을 붙이고 그녀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삼거리에 나가서 불렀을 걸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내가 왜 병원엔 찾아가야 하지?
병문안하러 가는 거지. 아는 사이니까.
그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가지 않는다 한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다. 자식이 앓는다고 병문안하러 갈 만큼 정도와 절친한 사이도 아니다. 아직도 그들의 관계는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러나 백혈병이라 하지 않는가. 어린 나이에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어 간다는데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는 건 인사불성이다. 막역지우거나 연인은 아니더라도 사진 때문에 인연이 맺어진 사이가 아닌가.
환자인 정도의 딸애는 정작 잠들어있었다.
그 옆에서 딸애를 보살피던 정도는 미라의 느닷없는 등장에 경악과 기쁨을 금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조금 전에야 알았어요. 아가씨한테서.”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의 음성도 입을 열자 마자 물기에 젖는다. 눈물을 보이기가 민망한 듯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다.
“로비로 나갑시다.”
“혼자서……교대해 줄 사람이 없으면 힘드실 텐데……”
미라는 정작 병원에 오고 보니 적당한 위안의 말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제가 힘든 건 문제가 아닌데 미미의 병만 호전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백혈병이라고 해서 반드시 최악의 결과만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저도 완쾌 되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디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겁니까. 현대의학이 부족한 만큼은 죽음이 그 자리에 군림하고 있을 거잖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납덩이처럼 무겁다. 누구든 입만 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미라는 걸상에서 일어나 로비에 비치된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았다.
“보광동으로 다시 이사 왔어요.”
“그래요. 언제요?”
그늘진 정도의 얼굴에 잠시 햇빛이 반짝인다.
“오늘요.”
“잘하셨습니다. 저희 사진관에도 인젠 자주 들러 주십시오.”
커피를 받으며 정도는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근심 걱정이 밀려나간 그의 표정은 잠시나마 밝아 보인다. 그러나 며칠 밤을 자지 못한 듯 눈에는 피가 지고 얼굴은 텁수룩한 수염 때문에 수척해 보였다.
“제가 바꿔 드릴 테니 집에 가서 좀 휴식하세요. 당분간은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그런 신세까지……”
“괜찮아요. 환자 병간호하는 데는 제가 선생님보다 아마 선배일 거예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돌아가신 독거노인할머니를 돌보시는 걸 제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저한테 시간이 있을 때만 도와드릴게요.”
정도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울음을 참으며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느라 목젖이 아래위로 급히 이동한다.
“집사람이 절에 들어간 지 반년이 넘습니다.”
잠시 후 정도는 뜬금없이 지금껏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속심을 털어놓는다. 이제는 그녀를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확실한 정표를 제공하는 듯싶다. 아무것도 속일 것이 없는 친구, 어쩌면 그 속엔 모름지기 감추어진 애정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알아요.”
“아니, 그 사실을 파랑 씨가 어떻게……”
“아가씨한테서 들었어요.”
“아무튼 걔는 입이 가벼운 게 탈이라니까요. 비밀이라고 없습니다.”
“저한테 알리고 싶지 않으셨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파랑 씨께 제 의도가 곡해되어 전달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지금도요?”
“지금은 그런 우려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인이 출가승이 되었는지 선생님께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계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남편한테도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보죠?”
“부끄럽습니다. 우리 사이엔 아마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가 봅니다.”
“사랑의 전부가 믿음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미라는 더 이상 정도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딸애의 불행만으로도 지탱하기 힘든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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