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통일이 당금 눈 앞에 당도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박병술에게는 어느 날 운 좋게도 뜻밖의 지프차 한 대가 생겼다. 행군 도중 길가에 버려진 인민군의 지프를 발견했던 것이다. 고장 난 데도 없는 멀쩡한 차를 휘발유가 떨어져 버리고 간 것이었다. 군용트럭의 기름을 뽑아 지프에 주입하자 엔진이 금방 작동했다.
“효자 놈들이야. 어른들을 타라고 지프까지 가져다 바치니 말이야. 빨갱이 놈들 덕분에 우리도 호강 한 번 해 보게 됐어. 빌어먹을.”
민병기 중대장은 박병술의 엉덩이를 떠밀어 지프에 올려 태운다. 중대장도 며칠 전에 지프 한 대가 생겼던 것이다.
“전 이런 걸 탈 팔자가 아닌데요.”
박병술은 기쁘기도 했지만 그 먼저 자신에게는 분에 넘치는 호강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팔자가 뭐 따로 있어. 개, 돼지 같은 팔자인 나한테도 차례졌거늘. 등신 같은 놈!”
박병술은 그렇게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별이 그려진 소련제 지프를 타고 입에는 화랑권연을 피워 물고 나들이 나온 부자처럼 여유 만만하게 북진을 계속했다. 인민군은 어디가 다 죽었는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간혹 소규모의 조우전을 치르고는 급급히 뺑소니를 치지 않으면 순순히 총을 내려 놓고 투항했을 뿐이다.
성천부근의 어디에서 인민군패잔병들이 산골마을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소대는 밤의 어둠을 타 동네를 급습하여 적들을 일망타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저항이 극심해 전투는 날이 거의 밝을 무렵에야 끝났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잔존한 두세 명의 적들은 마을을 벗어나 뒷산으로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박병술은 그중 한 놈을 추격하여 뒷산으로 쫓아갔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적병은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절뚝 간신히 비탈을 톺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거리는 갈수록 좁혀졌다. 더 이상 추격을 따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적은 달음박질을 멈추고 몸을 돌이켜 그를 마주섰다. 박병술이도 발길을 멈추고 부상병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고 소리쳤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줄 테다!”
그러나 군인은 아무 말도 없이 총구를 자신의 가슴에 돌려대더니 땅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특무장 동무! 특무장 동무!”
간호원이 쓰러지려는 군인의 상체를 받아 안으려고 애썼지만 끝내는 버티지 못하고 함께 땅바닥에 넘어진다. 가까이에 다가가 보니 간호원은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였다. 질겁한 것인지 아니면 분통해서인지 엉엉 울며 가슴에서 솟구치는 피를 막아 보려고 필사적으로 관통상에 붕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나 피는 걷잡을 수 없이 붕대를 들이 대는 대로 푹푹 젖어버린다.
“죽었습니다.”
그제야 아가씨는 군인의 상체에서 손을 흠칫 떼고는 일어섰다.
적군의 몸에서 보풀이 인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펼쳐 보니 그 안에는 연필로 또박또박 적은 글 몇 줄이 삐뚤삐뚤하게 적혀 있었다.

난 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해야 하는가? 내가 죽인 적군은 나랑 똑 같은 얼굴의 청년이고 같은 말을 하는 조선 사람이다. 집에서는 부모님들이 애지중지하는 자식이고 가난한 백성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가?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남이고 북이고 공산주의고 자본주의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영애하고 자그마한 오막살이 한 채를 짓고 오순도순 사는 게 나의 최대의 소원이다.
나는 이 피비린 전쟁이 싫다. 멀리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도망가면 우리 집 식구들과 영애에게 화가 미칠까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아아. 사람을 꽁꽁 얽매는 오라줄 같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제도……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전쟁에서 적군을 죽여 본 군인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문제이다.
간호사를 소대의 위생병으로 대용하여 행군에 동행시켰다. 뜻밖에도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한때는 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해 주다가 지금은 국군 부상병을 위해 일하는데 아무런 거부감도 없다는 사실에 박병술은 도리어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한테는 국군이고 인민군이고 다 환자일 따름이에요. 군인의 직업은 적을 죽이는 거지만 의사의 직업은 사람을 구하는 거잖아요.”
박병술의 의혹에 준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스님을 이어 또 한번 이념의 장벽을 넘은 사람이다.
사단은 불안한 나날 속에서도 승리의 신심을 잃지 않고 진격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10월 말에는 순천, 개천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희천, 온정, 고장을 향해 곧장 북상했다.
박병술이 속한 대대는 연대의 선봉이 되어 벽동을 목표로 온정리 서북쪽 13km의 옥수동 부근의 험준한 산길을 강행군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진격 속도가 빨라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군량, 탄환, 포탄, 연료 부족이 문제시 되었으나 개천 점령 후 인민군 군수차량을 노획하여 현지 보충을 한 뒤여서 부대의 사기는 여전히 충천했다. 승리는 이미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된 거야. 네놈이 북괴군복장을 입으니 너무 잘 어울리니 말이다. 길에서 모르고 맞닥뜨리면 적인 줄 오해하고 총이라도 갈렸겠다. 그런데 너 이 개자식! 정말 인민군이었던 건 아니야. 씨발! 너무 비슷하잖아.”
민병기 중대장의 농담에 박병술은 가슴이 섬찟했다. 내 몸의 어딘가에 인민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흔적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북쪽 산악지대의 날씨는 이제 겨우 10월 말인데도 벌써부터 영하 10~30도로 급강하하며 하늘에서 굵은 눈발이 풀풀 날리는 혹한이 시작되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도로는 트럭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 좁고 울퉁불퉁하여 부대의 행군에 어려움을 조성했다.
혹한 때문에 트럭의 고장이 잦았고 라디에이터가 터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차가 고장 나면 골짜기 아래로 밀어 던져 폐기처분하면서 행군을 해야만 했다.
눈썹에 하얗게 성에가 불렸고 콧수염에는 기다란 고드름들이 맺혀 절렁거렸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에 손바닥피부가 총의 쇠붙이에 닿으면 살갗이 쩍쩍 일어날 지경이었다.
대대주력이 동림산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28일 밤이었다.
느닷없이 밤의 정적을 깨트리며 전후좌우의 무명고지위에서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적의 매복공격에 걸려든 것이 틀림없었다.
골짜기는 개활지대여서 마땅한 은폐물조차도 없었다.
대대행렬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트럭과 포차와 군인들이 뒤범벅이 되었다. 지휘관들은 소속부대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응사격을 조직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죄다 허사였다. 장병들은 전투대형마저 이루지 못하고 트럭 밑이며 도로변의 웅덩이며 숨을 만한 곳으로 죄다 은폐한 지가 오래었다.
조용하던 골짜기는 소총소리와 박격포탄 폭발음, 기관총사격소리와 수류탄이 작렬하는 폭음으로 귀청이 멍해질 정도로 떠들썩했다. 계곡을 향해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져 머리조차 쳐들 수 없었다.
“개새끼들아! 쥐새끼들처럼 숨을 궁리만 하지 말고 사격을 해.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민병기 중대장은 지프 뒤에 몸을 은신한 채 고지를 향해 입을 악물고 사격을 가했다.
“야. 이놈아, 저건 무슨 소리야? 물귀신 소리 같은 거 말이야.”
고지위에서 만세의 함성소리와 함께 이상한 악기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소리, 호루라기소리에다 징소리, 염불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굿하는 거 아냐? 그리고 저것들이 씨부렁대는 말은 또 어느 나라 말이고. 뭐라고 지껄여대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 소리가 무슨 소린지, 저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박병술이만은 알고 있었다. 김성철 대대장한테서 늘 중국전쟁 때 써온 인민해방군의 전쟁담을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전화나 서류 또는 구두명령체계로 움직이는 국군과는 달리 취침, 기상, 돌격, 퇴각명령을 신호나팔의 신호로 지휘한다고 한다.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전투 중에 직접 문예선동원들이 현장에서 격려와 고무의 문예공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개의 자그마한 나뭇조각을 부딪쳐 소리 내는『콰이발』이라는 중국전통악기와 소고, 해금, 태평소, 피리, 징 등 휴대하기 간편한 악기들을 연주하며 시를 읊듯 전사들을 고무하는 선전문을 고창함으로서 부대의 전투사기를 높인다고 한다.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국군의 귀에는 물귀신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것인가!
그러면 승패는 어떻게 되는가?
승리를 확신하던 국군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맹렬한 화력이 빗발치는데다 어둠 속이고 한파까지 덮쳐 부대는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해 본 채 지휘관의 명령이 하달되기도 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 둘 살길을 찾아 뿔뿔이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던 도중 눈 먼 총탄이나 수류탄 파편을 맞고 개활지에 푹푹 거꾸러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느 순간엔가 부상병의 상처를 처치하던 위생병아가씨는 적탄을 맞고 맥없이 스르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쪽으로 기어가 보니 이미 그녀의 가슴은 질퍽하게 내번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봐요. 엄마, 아빠 이름이라도 대봐요. 집에다 알려줄 테니……”
인민군에서도 그녀는 변절자라고 저주받을 것이고 국군에서도 인민군간호사였던 그녀를 우대해 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녀가 생명의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었다는 사실만은 가히 존중받을 만 하다고 생각되었다.
“제 이……이름은 애……애자……애자……”
애자는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알았어. 애자. 애자씨! 아가씨 이름은 내가 영원히 기억해 줄테니 시름 놓고 눈을 감아. 아가씨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걸 내가 기억해 줄거라고.”
아가씨의 눈을 감겨주는 그의 손이 저모 모르게 떨렸고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굴러 떨어졌다. 사람을 구해주고도 아무에게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박병술이도 어둠을 타 트럭 밑을 엉금엉금 기어 나와 구사일생으로 도로에서 벗어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모든 것을 짓밟으며 의식의 하늘에 군림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생존욕구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배낭이며 철모며 탄띠도 어디 달아났는지 몰랐다. 죽을둥 살둥 산속을 향해 경황없이 달렸다.
애자. 애자.
입으로는 연신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혹시 급한 김에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두려워서였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마저 그녀의 이름이 망각되면 그녀의 존재는 영영 없어지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속에서나마 그녀의 존재를 존속시키고 싶었다. 별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아가씨! 사람이라는 게 그저 다 그런 게 아니겠는가.
한동안 달리다가 숨을 돌리느라 걸음을 멈추고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군용트럭들과 중장비들에 불이 달려 계곡은 검붉은 불바다 속에 잠겨버렸다. 그 속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살아났구나!”
안도의 숨을 돌리는데 누군가 어둠 속에서 한마디 불쑥 내던진 말이 박병술의 청각에 잡힌다.
“중대장님께서 다리에 부상을 당해 골짜기에 남았습니다.”
“뭐라고. 중대장님께서?!”
“간호원인지 한 여자가 다리를 잡고 놓아 주지 않는 통에……”
중대부에서도 북쪽 병원에서 일하던 아가씨 한 명을 위생병으로 대용하고 있었다.
박병술은 두말 제하고 발길을 돌이켜 오던 길로 다시 달려 내려갔다.
뜨거운 불길이 활활 치솟는 중화기들 사이를 헤집고 이리저리 몸을 은폐하며 중대장이 있던 지프를 향해 달려갔다. 달리다가는 기고 기다가는 달리고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총탄이 귀뿌리를 쌩쌩 스쳤고 얼굴에 불똥이 튕겨 따가웠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포복 전진했다. 트럭이며 포차며 배낭이며 무기며 모두 계곡에 버려진 채 불타고 있었다.
다행이도 민병기중대장은 아직도 불타는 지프 밑에 은폐하여 고지를 향해 대응사격을 하고 있었다. 간호원은 언제 죽었는지 중대장의 옆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중대장님. 어서 제 등에 업히시오.”
“야. 이 등신아! 그냥 도망칠 거지 뭘 하려고 이 불구덩이에 다시 뛰어들었어. 한 놈이라도 살아야지. 둘 다 뒈지려고? 바보! 병신! 개새끼! 날 여기 버려두고 어서 썩 꺼져! 가란 말이야. 가! 난 저놈들과 같이 싸우다가 여기서 죽을 거란 말아야. 귓구멍이 멀었어. 개자식!”
“저놈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중공군입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축지법에 능하다는 중국군대라고요.”
“뭐야! 중공군이라고? 그것들이 왜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박병술은 대답 대신 무작정 중대장을 등에 업고 불길 속으로 달려 나왔다. 머리카락이고 눈썹이고 죄다 불에 탔지만 따가운 줄도 몰랐다.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확확 풍겨오는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숨이 콱 막혔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멈춤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대대는 적의 기습공격에 완전히 분쇄되어 뿔뿔이 청천강 쪽으로 패주했다. 장교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병사복장을 한 채 패주병들 속에 섞여 있었고 지휘체계는 완전히 마비되어 제 기능을 상실했다. 욕설과 구타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저마다 자기만 살겠다고 엎치락뒤치락 추태를 보였다.
그러나 청천강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은 그나마 행운아였다. 수많은 장병들이 살상되고 실종되었다.
“네놈이 날 살려냈어. 개보다 못한 네놈이!”
민병기 중대장의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리며 볼 위의 두터운 먼지에 굵다란 곬을 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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