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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분위기는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장교들의 비상 교체를 거친 연대는 사창리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불타는 전의로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불과 26일 전 사단은 중공군 20군과 13병단의 40군 일부의 포위공격으로 온정리전투에 이어 두 번째로 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6사단방어선이 뚫리고 무질서한 철퇴를 함으로서 애써 구축한 춘천 북방의 캔사스선이 붕괴되었다. 장병들은 중장비와 개인화기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파손 또는 포기한 군용트럭 87대, 곡사포, 박격포, 대전차포, 2.36인치로켓포 도합 123문, 자동화기 168정, 소총 2263정이라는 막대한 병기 손실과 6천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박병술도 패잔병들 속에 끼어 허둥지둥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다. 철모도 소총도 배낭도 모두 내버린 채 맨몸으로 살길을 찾아 죽을 둥 살 둥 뺑소니쳤다. 좁은 산간도로위에는 남루한 행색의 국군장병들과 미 해병 1사단 군인들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다행이도 그들의 철퇴는 가평방어에 투입된 영국군 27여단의 성공적인 엄호로 섬멸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중대장 민병기는 3일 만에야 낙오자 십여 명을 이끌고 사단으로 복귀했다.
“이놈아. 네 목숨도 참 질기다. 우리 죽지 않고 또 만났으니 말이다 개자식!”
자기만 살겠다고 중대장의 생사 같은 데는 관심마저 없었던 일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그런 도망병을 벌줄 대신 사단에서는 박병술에게 소위소대장계급으로 승진발령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민병기 중대장은 같은 대대에 남았다.
“더 이상 물러서서도 패배해서도 안돼. 죽어도 용문산에서 죽고 살아도 용문산에서 살 각오들을 단단히 하란 말이야. 우리 사단이 어떤 사단인데. 개전 초기 북괴군 놈들의 도발공격을 사흘씩이나 저지했고 적 12사단주력을 섬멸한 무적의 사단이란 말이야. 온정리, 사창리참패를 만회하고 반드시 사단의 치욕을 씻고 설욕해야 돼. 모두들 뒈질 각오를 해!”
이마에 『결사』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중대원들을 훈시하는 민병기 중대장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사단의 운명과 연대의 명예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사단을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죽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군인의 천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훈시가 끝나자 민병기 중대장은 슬그머니 박병술에게로 다가오더니 주먹으로 어깨를 쿡 쥐어박는다.
“네놈만은 살아야 돼. 뒈지지 말고. 우리 중대에서 네놈마저 뒈지면 싸울 놈이 없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거야. 알았지. 등신 같은 놈!”
대대는 연대의 좌전방인 381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병력손실이 엄청난 6사단은 중공군의 주 타격대상이 되었기에 그들의 집중공격을 저지하고 돌파구를 차단해야 하는 간고한 중임을 떠맡아야만 했다.

죽음으로 6사단의 명예를 수호하자!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고지를 사수하자!

재무장을 한 연대는 정신적으로도 결사의 의지를 굳혔다.
5월 18일 낮부터 시작된 중공군 63군의 북한강 도하 시도는 공격과 격퇴를 거듭하면서 밤까지 계속되다가 자정 무렵이 되어서는 도하에 성공한 일부 선두부대가 고지를 돌격해 올라와 백병전까지 벌어졌다. 군단지원부대인 다섯 개의 포병대대화력은 적군의 후속부대와 선두부대와의 연계를 차단해 중과부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대대는 치열한 육박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적아를 식별하기도 힘들 만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악악거리는 비명소리와 총창 부딪치는 쇳소리만 툭탁툭탁 들렸다. 어디서 뿜겨 나온 피인지는 모르나 박병술은 어느새 얼굴과 군복 전체가 비릿하고 뜨끈뜨끈한 핏물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악악소리가 터져 나갔고 사지의 근육이 무섭게 푸들푸들 경련했다. 눈앞에 무엇이라도 언뜻하면 무작정 총창을 내질렀다. 그럴 때마다 온 몸의 힘을 팔에 주입해 식은땀이 쫙 흘렀다.
나무도 적군으로 보였고 바위도 적군으로 보였고 심지어는 어둠마저도 적군으로 착각되었다. 상대방을 죽여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누군가의 총창이 자신의 등을 향해 박혀들거나 가슴을 관통하기 전에 먼저 선손을 써서 적을 죽여버려야 한다는 집념 하나 뿐이었다.
한 번인가 두 번인가는 총창 끝이 무언가에 깊이 박혀들며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헉!
하는 나직하나 웅글진 신음소리와 함께 창끝이 저절로 위로 번쩍 쳐들렸다. 창을 비틀어 빼는 순간 뜨거운 액체가 얼굴에 확 뿜겨 나오며 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적을 죽였다는 생각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갈마들었다. 옆에 넘어진 시체에서 피가 솟구치는 소리가 꿀렁꿀렁 들려왔다.
박병술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공포가 파도처럼 덮쳐들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냥 허우적대기만 했다. 손과 발은 두뇌의 지령을 떠나 본능적으로, 제멋대로 움직였다.
“개새끼들아! 죽여라, 죽여!”
박병술은 미친 듯이 고함쳤다. 미친 듯이 날뛰었다. 총창으로 찌르고 총개머리로 후려치고 발길로 차고……
자기 기운에 떠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섰다. 적군이 백병전을 대비해 자기편을 구별하려고 팔에 두른 흰 천조박이 도리어 적아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이 되어 주었다. 흰 천조박만 눈앞에 얼씬하면 무작정 공격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날뛰는데 느닷없이 탕!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모위로 무거운 쇠망치가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돌아서려고 했지만 몸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 그냥 맥없이 앞으로 폭삭 꼬꾸라지며 땅바닥에 무릎을 풀썩 꿇었다.
“싸-아!”
귀청을 찢는 듯한,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외국말이 등 뒤로 날아들었다. 하늘높이 쳐들린 예리한 총창이 자신의 등을 향해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모습이 상상의 스크린에 언뜻 스쳤다.
끝장이구나!
드디어 죽는구나!
박병술은 땅에 엎드린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어차피 죽을 걸 부질없이……
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분명 들렸다.
박병술은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누군가의 몸뚱이가 그의 등 뒤에 와 포개지며 털썩 맥을 버리고 늘어졌다. 금시 잔등이 질벅하게 젖어들었다.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야. 이 등신아!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어떡해. 뒈지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빌어먹을!”
민병기 중대장의 목소리다.
“중대장님.”
어찌된 영문인지를 알자 목이 꽉 메었다.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불쑥 치밀어 오르더니 목구멍을 덜컥 가로막는다.
“냉큼 일어나. 병신 같은 놈. 어서 일어……헉!”
등 뒤에 쓰러진 적군 시체를 밀어내고 박병술을 부축하느라 허리를 굽혔던 민병기 중대장이 갑자기 신음소리를 토하더니 상체를 번쩍 편다. 그러나 끝내는 육신을 가누지 못하고 맥없이 무릎을 꿇고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두 팔로 복부를 그러안고 상체를 웅크린다. 골뱅이처럼.
박병술은 자신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모른다. 사자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총창을 꼬나들고는 아직도 사람을 죽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후들후들 떨고 있는 앳된 적군의 가슴팍을 향해 총창을 힘껏 들이박았다. 호박을 찌른 듯 소리 하나 없이 창끝이 푹 꽂힌다. 어찌나 팔에 힘을 주었던지 창끝이 복부를 관통하여 잔등 밖에까지 쑥 꿰고 나갔다.
“야-아아-아악!”
총창을 마구 비틀어대며 목청이 터져라고 오래도록 고함을 질렀다. 뽑아서 다시 찌르려고 했지만 뽑히지가 않는다. 적군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선 채 총창을 꽉 부여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입을 딱 벌린 모습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만 같다.
겁이 더럭 났다.
문득 고함을 멈추고 총을 버린 채 화들화들 떨리는 육신을 간신히 움직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죽어. 뒤지란 말이야! 개자식! 등신, 바보, 괴물! 더러운 빨갱이 자식!”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무엇인가에 발이 걸채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한참을 지나서야 적군은 총창을 손에 거머쥔 채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중대장이 생각났다.
박병술은 어둠 속을 간신히 더듬으며 민병기 중대장이 쓰러진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전신이 촉한을 만났을 때처럼 화들화들 떨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저만큼 앞에서 넘어진 적군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최후의 몸부림으로 사지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민병기 중대장은 두 손으로 배를 그러안은 채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바닥에 박고 있었다. 그의 육신은 세차게 경련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죽지 말아요. 죽으면 안 됩니다. 저더러는 뒈지지 말라고 하고는 중대장님께서 먼저 죽으면 됩니까.”
어깨를 감싸 안았으나 중대장의 상체는 맥없이 옆으로 넘어갔다.
“어디, 어디를……”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고 엉엉 통곡이 터져 나갔다.
“일소대장. 내 말 들어. 개자식. 빌어먹을 놈! 그만 울고 내 말 좀 들으라고. 네깐 놈이 다 군인이냐. 계집년처럼 빌빌 울기만 하는 놈이.”
말을 하느라 배에 힘을 줄 때마다 창끝에 구멍이 뚫린 상처에서 피가 샘처럼 콸콸 솟구쳐 올랐다. 벌써 민병기 중대장이 쓰러진 땅바닥은 핏물이 질퍽하다.
“이걸, 이걸. 어떻게 합니까? 저 때문에……저 때문에……”
손으로 상처 부위를 틀어막아 보았지만 피는 손가락 사이를 뚫고 걷잡을 수 없이 콸콸 솟아나왔다. 두 손으로 막아도 멈출 길이 없었다. 군복상의를 벗어 틀어막으려 했지만 옷이 금방 물자루처럼 흥건하게 젖어버린다.
“가만 나둬. 소용없어.”
“어서 제 등에 업히세요. 야전병원으로……”
“네놈이 보기엔 내가 야전병원에 갈 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을 것 같냐. 미치고 창 빠진 놈!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니까 그런다. 빌어먹을!”
“죽게 내버려 두라니요. 안 됩니다. 똥 무지위에 뒹굴어도 뒈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네놈을 두고 한 소리고 ……적군이다. 적군! 빨리빨리. 이 자식아.……”
박병술은 등 뒤로 벼락같이 달려드는 적군을 맞아 대적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중대장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새끼들아! 다 덤벼들어라. 중대장님의 원수를 갚을 테다. 야-아아!”
총창을 들고 불사신처럼 돌격해 나갔다. 총대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어쩌다가 당황한 김에 총을 손에서 떨어트린 박병술은 적군의 목을 와락 껴안고 길게 늘어졌다. 적군은 죽기내기로 매달리는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두 사람은 엎치락 덮치락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엇갈아 위에서 목을 조르기도 하고 밑에서 목을 졸리기도 했다. 바로 그들 옆의 풀숲에서 중상을 입은 국군병사 한 명이 죽음을 앞에 둔 듯 애처롭게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엄마. 날 살려줘. 제발 살려주세요. 난 죽고 싶지 않아요! 투항할 테니 목숨만……”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의 울음 섞인 애원소리가 뚝 그쳤다. 적군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병사의 이마빡에 박혀 들었고 박살난 두개골 밖으로 뇌수가 흘러나왔다.
박병술은 코를 찌르는 비린내를 참으며 젖 먹던 기운까지 다해 적군의 목을 옥죄였다. 울대가 뿌지직 함몰되는 소리와 함께 적군의 몸에서 점차 맥이 빠져나가는 듯싶더니 어느 순간엔가 그의 팔목을 부여잡았던 두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며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백병전이 끝나고 중대장에게로 갔을 때는 이미 민병기는 중대지휘소에 옮겨져 있었다.
“박소대장이 언제 오나 눈깔이 빠지게 기다렸어. 말 한마디 남기고 죽으려고”
민병기 중대장은 임종을 앞둔 마지막 날숨만 가쁘게 톺고 있었다.
“뒈지지 말고 살아야 돼. 내 몫까지 싸워줘……그리고……이건 내 여동생 복희를 찾아서 전해줘……복희를 네놈한테 맡긴다. 네놈한테 맡기면 시름 놓고 죽을 것 같아 그래. 뒈지지 말고 짜식!……”
민병기 중대장은 유언도 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대장님!”
목이 메어 울음도 더 나가지 않았다. 눈물도 말랐는지 나오지 않는다.
자고 싶다. 그 자리에 푹 꼬꾸라져 하루고 이틀이고 자고 싶다. 탈진으로 인한 피로가 파도처럼 육신의 방파제를 들부순다.
민병기 중대장이 여동생 복희한테 전해달라던 유물은 가족사진 한 장과 편지었다.
여동생을 나한테 맡긴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나더러 여동생과 결혼이라도……
박병술은 생각의 기슭에도 이르지 못한 채 참호바닥에 그대로 너부러져 잠이 들었다.
19일. 중공군은 지칠 대로 지친 국군이 휴식할 틈도 주지 않고 새벽이 되자 또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187사단과 188사단주력은 미사리일대를 포위공격하고 8사단, 9사단주력은 대대방어진지인 381고지를 집중 공격했다.
적의 강유력한 공격앞에서 열세에 처한 대대는 항공과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여 후방의 427고지로 방어선을 옮겼으나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20일 새벽에는 반공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일방적인 공격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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