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14장 꿈과 현실

1

거리는 차량들이 일제히 내뿜는 배기가스로 인해 아침부터 후끈후끈 달아 올랐다. 빵처럼 노면을 노글노글하게 만들며 피어 오르는 지열이 차 밑바닥을 꿰뚫고 발바닥에까지 화끈하게 전달된다.
기상예보에 따르면 오늘 낮 최고기온이 35도라고 한다. 8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더위는 조금도 꺾일 기미가 없다. 사람들은 이런 이상기후를 지구온난화현상이라고 한다.
히트를 틀어 엄습하는 더위는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호흡이 불편해지며 가슴이 답답하다.
정도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단추도 끌렀다. 아직 감기가 채 완쾌되지 않아 히터의 냉기가 몸에 나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몰려드는 더위를 참을 수 없었다.
그날 싸리골을 내려오면서 소낙비를 맞고 독감에 걸렸었다. 전신이 오돌오돌 떨리며 오한이 발작하는가 싶더니 약을 먹고 침대에 눕자마자 불덩이처럼 신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지럼증과 구토와 두통까지 겹쳤고 삭신이 물러나듯 욱신욱신 쑤셨다. 천군만마처럼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진을 치고 밀려드는 비구름을 등지고 아들을 바래주던 아버지의 표정에서 정도는, 그분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심중의 독백을 읽을 수 있었다.

네 삶은 네 자신이 스스로 영위해야 한다. 누구도 널 대신할 수 없단다. 넌 네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방식을 모방하려고 하지 마라. 삶에는 노선이 없단다. 네가 사는 삶이 바로 네 인생의 궤도야. 그 궤도로는 너라는 열차만 달릴 수 있어.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꼭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지 정도 자신도 모른다. 어쩌면 이 충고는 아버지가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수도 있다. 정직이라는 바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열차도 아버지를 이어 그 길 위에서 달리기로 했었다.
교통체증 때문에 사거리에서 한동안 신호등을 대기하고 있어야 할 때면 정도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아스팔트길은 평탄하지만 차량들이 붐벼 늘 막힌다. 시골길은 평탄하지는 않아도 막히는 법은 없다. 쾌속주행을 휘해 만들어진 포장도로에서는 막히고 만속운행에 대비한 비포장도로에서는 막힘이 없다. 길이 좋다고 해서 꼭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길로 달리던 목적지는 하나일 것이다.
싸리골행으로 하루, 독감 때문에 하루 도합 이 주야나 파랑에게 미미를 맡긴 셈이다. 고맙기 전에 미안하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주방에 조반상을 차려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아버지한테로 찾아가신 걸까?
“뭐라고 하시던?”
맥을 탁 버리고 집 안에 들어서는 정도를 본 양진옥은 벌써 모든 것을 간파한 듯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만족하실 대답이 정도에게는 없었다. 더구나 그 대답은 한두 마디로 설명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진옥은 더 이상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를 길러준 양모 양진옥일 따름이다.
갑작스러운 관계 변화가 정도는 물론 양진옥이까지 어색하게 만들었다. 모자 간에는 정면 눈길이 교환되지 않았다.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 걸 보아 양진옥은 자신의 토설을 벌써 후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진실을 밝힌다고 하여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관계가 훨씬 무난하고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자식과 모자정만 상실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정도는 거의 혼절상태의 몽롱한, 독감을 앓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가. 아버지는 당신이 상실한 결백을 복구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인 양심에의 부채상환은 그분의 생활신조였던 법조목과 순서들로 인해 다른 하나의 결백이 손상 받는 대가를 지불해야 만 했다. 순서와 조항에 의해 분리된 진리 또는 정의는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띠며 아버지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혼란에 빠트렸다.
결백의 구축은 결백의 파괴와 공존한다는 진리의 이율배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아버지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정도도 진리의 반쪽 측면 즉 비 진리에 설 수 만은 없다. 그건 외발로 서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 진리는 두 다리로 설 때에만 확고한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낮과 밤처럼 서로 다른 두 개의 대립점이 하나의 진리를 구성한다. 정직하게 산다는 건 이런 이치에서 보면 진리의 반쪽에만 편향한 불완전한 삶인지도 모른다. 거울은 비 반사면인 배면背面이 없으면 기능을 상실한다. 결국 거울의 반사기능은 비 반사기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직함도 같은 이치가 아닐지.
아버지의 인생이 정도에게 시사하는 바는 대략 이러한 의미였다.
거리 주변의 콘크리트구조물들이 벌써부터 흡수된 열기를 지글지글 토해내기 시작했다. 플라타너스가로수 잎들은 무더위에 축 늘어져 혀를 길게 빼물고 있다. 그래도 은행잎들은 맥을 잃지 않고 더위 속에 잘 버티고 서있다.
병원 쪽으로 좌회전을 해서야 차량들의 운행이 좀 뜸해졌다. 가속폐달을 지그시 밟자 차체가 노글노글 녹아버린 아스팔트노면에 찰싹 가라앉으며 짜르륵- 기분 좋게 달렸다. 딸애도 보고 싶고 파랑 씨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파문처럼 번지며 윤정의 외조부에게까지 팽창된다.
진리가 이중적이라면 양면적인 삶도 부정하다고 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정의 외조부 박병술노인이 영웅이라고 해서 반드시 용감하고 시종일관 정의만을 견지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분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애착을 가진 인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영웅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비겁하고 양면적인 인격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배신자라고 저주하며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박병술노인의 회고록을 다시 찾아 내어 읽었던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 살았던 인간이 아니라 삶으로서 정의를 창조해 낸 인간의 진면모를 보고 싶었다. 워낙 삶이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삶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 지도 모른다. 진리나 정의란 없고 오로지 삶만 있을 뿐이고. 그런 삶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킬 때 정의며 정직은 탄생하는 것이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미리 정해진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재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을 재는 데에 척도를 맞춘 잣대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궤변일 수도 있다. 아니, 나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의 혼돈의 표현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미리 정해져 있고 인생은 노선버스처럼 그 정해진 노선을 따라 반복 운행되는 코스인 지도 모르지 않는가. 도덕이라는 노선, 법이라는 노선 관습이라는 노선, 진리라는 노선……
그러나 실수가 없는 오류가 없듯이 오류가 배제된 순수한 정직도 존재하지는 못할 것이다. 진리의 내용은 비 진리이고 실수의 집합(비 진리의 집합)이 곧 진리이며 정당성이고 정직이라는 가설도 궤변일 수도 있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생각 만은 아닐 것이다.
완전함은 불완전함이 제공하는 여백 속에서만 가능하고……
박병술노인은 자신의 실수로 영웅의 삶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저런 잡념에 부대끼고 있는 사이 차는 드디어 병원 정문 앞에 당도했다.
정도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 곧장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회전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무심결에 시선을 자극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들고 보니 중머리를 하고 승복을 입은 비구니였다.
병원에 웬 승려가?
고개를 숙였으나 회전문유리를 사이 두고 언뜻 마주쳤던 시선이 너무 익숙하여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이미 비구니가 회전문에서 막 몸을 빼내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마침 비구니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의 눈길과 마주치자 다급히 외면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누렇게 뜨고 이끼가 돋고 수척한 얼굴모습이었지만, 이마의 살갗은 터지고 입술은 바짝 말라들었지만 정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비구니는 분명 아내 윤정이었다.
“자기야.”
정도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부르며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윤정은 벌써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나 좀 봐.”
허망지망 윤정을 향해 달려갔지만 택시는 구릿한 배기만 한 아름 뿜어내고는 부르릉- 자리를 떴다.
“자기. 가지 말고 나 좀 봐. 병원까지 왔다가 그냥 갈 거야”
차의 꽁무니를 쫓아가며 간절히 호소했지만 택시는 멈춰 서지 않고 병원구내를 벗어났다.
정도는 망연자실한 채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는 택시만 멍하니 바라볼 뿐 별 수가 없었다.
돌아서서 터벅터벅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발길에 자꾸만 방금 전 아내의 초췌한 모습이 밟힌다. 마지막으로 산사를 찾아갔을 때만 하여도 윤정은 삭발을 하지 않은 장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핼쑥하고 파리하지도 않았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사람의 몰골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망막에 이슬이 핑 돌며 시야가 흐려왔다.
저렇게 될 때까지 자신을 자학하다니! 절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한사코 산사에 묻혀 지낸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병실에는 파랑과 함께 어머니 아니, 양진옥여사도 있었다. 정작 환자 본인은 잠들어 있고 두 사람은 병상 앞에 마주앉아 무슨 이야기인가를 소곤소손 주고받는다.
먼저 정도를 알아 본건 파랑이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인다.
“오셨어요. 편찮으시다더니 하루 더 쉬시지 않고 나오셨어요. 무리하시다가……”
그녀의 얼굴에 피로가 이끼처럼 두텁게 깔려 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틀씩이나.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무심결에 양진옥여사와 눈길이 마주쳤다. 정도는 영문도 없이 가슴이 꿈틀했다. 양진옥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길에 평소와 다른 불쾌감이나 불경이 실리지나 않았을까 미리부터 두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양짐옥의 눈길에서 종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다급히 양진옥의 눈길을 외면했다. 생모와 친자親子가 아니라는 관계변화가 어느 만큼이라도 표정의 변화에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도 변할 수 있는 인간관계!
“오늘은 둘 다 집에 가서 쉬거라. 미미는 내가 볼 테니.”
“그게 좋겠네요. 그럼 어머님께서 오늘 하루만 수고해 주세요. 내일은 저나 선생님께서 교대해 드릴 테니까요. 선생님 우린 그만 나가요.”
파랑이 정도 대신 양진옥의 제의를 수락하며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랑 씬 먼저 가십시오.”
정도는 딸애 옆에 남으려고 했지만 파랑이 기어이 팔소매를 잡아당긴다.
“독감은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돼요. 버티시면 더 하거든요. 오늘 하루만 더 쉬세요.”
파랑에게 등을 떠밀려 병실에서 나왔다. 솔직히 정도는 양진옥이와 함께 해야 할 시간들이 생각만 해도 거북스럽고 민망했었다.
“저의 어머니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정도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건넴과 동시에 파랑도 아까 오신……하고 말꼭지를 떼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먼저 말씀하세요.”
파랑이 양보한다.
“아니, 파랑 씨가 먼저.”
“선생님께서 주인이시잖아요.”
“저희 어머님께서도 그녀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때 어머님께서는 간호사실에 약 지으러 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었던 것도 그거예요. 아까 병원에 오셨던 비구니가 설마 사모님……”
정도는 대답은 고사하고 눈길을 어디에다 둬야 할 지 몰라 난감했다. 아내를 이 지경에까지 내몬 책임을 많건 적건 간에 남편이 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기에 너무 민망했어요.”
“저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길을 걷도록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 집사람 스스로로의 선택이었죠.”
변명처럼 들렸을 거고 비겁한 책임 회피로 들렸을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긴 옆 사람들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말이죠. 행복이란 건 객관적 기준이 없다고 봐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지요.”
정도는 자꾸만 어지럼증이 발작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갈라지신지 오래 된다고 하셨죠?”
그녀가 날짜를 확인하는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정도에게는 질문 자체가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래서 무언으로 확인을 대신했다.
“힘드셨겠네요.”
무슨 뜻인가?
아내의 부재로 인한 삶의 힘듦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자의 몫인 가무를 떠맡게 된 남성의 스트레스? 성적 쾌감의 대상을 상실한 성욕의 불만?
웬일인지 그 동정 속에는 민감한 감정을 건드리는 그 무엇이 느껴진다.
병신이 아닌 이상 성욕을 참기가 어려웠을 텐데 라는 직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1층 로비에 내려와서는 끝내 조반 먹은 걸 죄다 토해버렸다. 식사 때부터 음식이 목에 걸렸었다.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 음식이 세상 제일인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오늘 조반식사만은 양진옥여사의 손길이 스쳤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음식물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먹어요. 식당음식은 속에 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어머님께서 그러시는데 선생님께서 어제 온종일 식사하시지 않았다던데요. 그러니까 음식거부증상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이럴 땐 맛있는 음식을 지어 마비된 식욕을 자극해야 돼요.”
파랑 씨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는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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