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2

전화벨소리가 처음에는 꿈속에서 들렸다. 그러나 청각이 꿈의 계곡을 지나 의식을 유인하여 나온 곳은 현실이었다.
정도는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지난밤 병원에서 늦게 귀가해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던 것이다. 셔터처럼 무겁게 드리운 눈꺼풀은 떠지지 않았고 흐릿한 의식에도 안개가 자옥하다.
“네∼”
“형. 나 광혁입니다.”
수화기 안이 삽시에 폭탄이라도 작렬하듯 떠들썩하다. 사람은 병신인데 목청만은 더 거칠어지고 힘이 들어가 있다. 육신의 맥이 죄다 목소리에 실린 것 같다.
“왜?”
짜증이 나고 귀찮았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요즘은 또 미경이 때문에 복잡하다.
“미경이 또 실종됐다고요.”
“그러니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림자처럼 그 애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수도 없잖아. 언제 없어졌는데?”
“초저녁엔 자리에 있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니 없어졌어요. 내가 잠든 사이 빠져 나갔나 봐요. 망할 년이!”
“조깅이나 아니면 장보러 갔거나 했겠지. 좀 기다려 봐.”
정도는 자꾸만 졸려 어서 전화를 끊고 싶을 뿐이다.
“아닙니다. 휴대폰도 갖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통화는 안 되고. 틀림없이 그 씨발새끼랑 만나러 나간 거라니까요. 형, 좀 찾아줘요. 다리만 성하면 내가 이 년을 직접 나가서 잡아들이는 건데……”
“알았어.”
“지금 당장 찾아 봐요.”
정도는 수화기를 덜컥 내려 놓고는 다시 이불 속에 몸뚱이를 들이 밀었다. 자신의 번뇌만 해도 인내하기가 버거운데 여동생마저 붙는 불에 기름을 붓는다.
“에이, 짜증 나!”
정도는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기는 다 글렀다. 이제부터 광혁의 독촉과 상황 확인 전화가 빗발칠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양진옥은 지난밤 그를 교대하여 병원에 나가 있었다. 그녀는 인젠 아버지의 귀가에 대한 기대를 아예 포기한 것 같다. 일산으로 돌아가 차분한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중단했던 화장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옷차림과 표정관리, 이미지관리, 품위보존에도 신경 쓴다. 요즘은 아버지에 대한 화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오로지 관심의 방향을 손녀 미미에게만 쏟고 있다. 운명과 타협하고 수긍한 것일까?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공포한 뒤 역시 친손녀가 아닌 미미에게 관심을 돌리려는 아픔도 있을 터인데 그 아픔을 딛고 거연히 일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돋보인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만 반드시 어머니인 것은 아니다. 양육의 책임을 떠맡았던 양모도 어머니인 것이다.
어머니와 정도 사이에 감돌았던 어색한 분위기도 점차 가셔지고 있었다.
주방에 나가 냉장고를 열어 보니 식사준비가 다 되어 있다. 데우기만 하면 식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식욕이 부진하다. 양진옥이 만들어 놓은 음식이라는 이유 뿐 만은 아니었다. 그냥 거식증세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
대충 얼굴만 씻고 집을 나섰다.
삼거리에 나섰으나 잠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최진남이네 집으로.
곰처럼 미련한 놈이 아니라면 이미 발각된 전과前過장소를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부근의 여관들을 차례로 수색해야 하는가?
다른 때 같았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깨끗한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불효막심한 미경이를 찾아내어 단단히 혼내주었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너 같은 패륜아를 용납할 수 없어. 남편을 퍼렇게 살려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그런 불륜은 허용할 수 없다고……
이런 식으로 훈계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망설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파랑이 사는 뒷골목 빌라 쪽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쏠리고 있는, 자신의 흠결이 생긴 결백에 신심이 없었다. 그녀와의 정사가 있은 뒤 정도는 파랑의 시선을 마주볼 용기를 잃고 말았다. 아내에게도 늘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파랑은 언제 그런 불륜이 벌어졌냐는 듯 태연한 표정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무심한 태도로 그들의 관계를 원상 복귀시켰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후회하는 기색도 갈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예나 다름없이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었고 얼굴도 무표정하다. 정도를 대하는 태도 역시 예의의 영역 만큼만 풀어 놓는다.
혹시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내가 꿈을 꾸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들 사이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무리 즐기기만 했기로서니 어찌 조그마한 여운이나 파문 같은 것마저도 없을 수가 있는가.
단 하루 만의 사랑!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단 한번 만의 육체적 결합!
과연 파랑이 바라는 그런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당연히 파랑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만큼 그들의 관계는 절정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파랑은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일 따름이다. 그러한 신비가 바로 파랑의 매력이기도 하다.
정도는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육신을 실어 놓았다. 미미의 병세가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담당의사의 검진결과가 정도의 긴장을 얼마간 풀어주어 조금은 여유마저 느껴진다.
“뜻밖에도 환자의 관해유도가 완벽합니다. 관해유도치료와 중추신경계 재발방지치료를 통해 환자의 백혈병세포가 1010개 이하의 모세포로 줄어드는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백혈병세포가 완전 관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1010 정도의 leukemic cell burease가 남아 있기 때문에 공고요법과 유지화학요법의 추가치료를 진행해야 합니다. 1~2개월 뒤에 재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미미의 병세는 호전 희망이 보인다. 미미자신의 생에 대한 욕구가 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파랑이까지 도와준 성의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드렸을 윤정의 덕분인지……
그런 게 뭐 다 중요하랴. 중요한 건 미미의 병이 어서 빨리 완쾌되는 것뿐이다.
불쑥 정도의 눈앞에 사진관이 나타났다. 그의 발길은 본능적으로 주인을 사진관 앞으로 싣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셔터는 닫혀있는데 자물쇠가 보이지 않는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아니면 안에 사람이라도 있나?
셔터를 쳐들자 드르릉- 저절로 처마위로 말려 올라간다.
갑자기 안에서 우당탕- 퉁탕- 하는 소리가 부산스레 들려왔다.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구야?”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잠겨 있었다.
키를 꺼내어 자물쇠를 따고 문고리를 당겼다.
그러자 한 사내가 날렵하게 문틈으로 비집고 나와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 나갔다. 허둥지둥 도망치면서도 허리띠를 매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최진남이었다.
정도는 불러 세우려다가 단념했다. 가슴 어딘가가 질리는 곳이 있었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제 불륜은 비난의 대상이거나 다른 사람의 일 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불결을 꾸짖을 만한 결백이 없었다.
스튜디오 안에는 윤미경 혼자만 있었다.
아직도 옷을 주워 입느라고 부산을 떨고 있다. 오빠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미경은 아예 방바닥에 무릎을 폴싹 꿇어버린다.
“제발 한번 만 눈감아줘. 날 그 물귀신한테 보내지 말아줘. 죽인대도 난 그 사람이랑 못 살겠단 말이야. 나 좀 살려줘. 광혁이 날 어떻게 폭행한다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
눈물, 콧물범벅이 되어 정도의 팔목에 매달려 애걸복걸했다.
정도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한동안 미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광혁이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집에 가 봐.”
“싫어. 난 안가. 차라리 날 여기서 죽여줘. 오빠도 알잖아. 나 겨우 서른 살밖에 안됐어. 허구헌 날 어떻게 살라고. 죽은 나무토막 같은 남자랑. 제발 나 좀 봐주라.”
“어떻게 하면 살려주는 건데? 지금처럼 이렇게 살도록 눈감아달라는 거냐. 사진관이 니들이 숨어서 이런 짓거리나 하는 장소더냐. 어서 집에 돌아가.”
“싫어. 난 안 들어가. 난 도망칠 거야. 진남 씨랑……”
“뭐라고? 도망치겠다고!”
동동 매달리는 미경의 팔을 뿌리치고 저만큼 안으로 들어가던 정도는 흠칫 놀라며 돌아섰다.
“그래 도망칠 거야. 멀리, 아주 멀리.”
“그럼 광혁이는 어떡하고?”
“나도 몰라. 제 인생 제가 알아서 살겠지 뭐. 난 내 인생 살기도 힘들어.”
“결혼서약은?”
“이혼해주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이혼해주면 누가 이런대.”
“넌 양심도……”
또다시 정도의 목구멍에 돌덩이 같은 것이 꽉 막혔다.
양심!
내가 양심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광혁은 성불구라서 미경의 외도에 구차한 빌미라도 제공해주지만 그의 아내 윤정은 털끝 하나 만큼도 흠집이 없는 정상적인 육체적 기능을 소유하고 있다. 갈라진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정도는 터벅터벅 맥없이 지하실로 걸어 내려갔다. 가끔씩 들러서 현상작업을 하다가 버려둔 작업대에 마주앉았다. 인화만 해놓고 블리칭bleachiing을 하지 않은 파랑의 사진 몇 점을 당겨놓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중 두 컷은 다시 봐도 신비한 느낌이 든다.
한 컷은 장미를 촬영한 것이고 한 컷은 무궁화를 담은 사진이었다. 구도도 특이하고 초점거리와 노출조절도 심상치 않다. 두 컷 다 색상의 재현만을 고려한 순광順光선의 빛을 선택하긴 했지만 그래서 투명감도 원근감도 부족하고 심도도 깊지 못했지만 대신 지독하리만치 색채의 사실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주역인 꽃송이는 사진의 구도중심부가 아닌 상단에서도 귀퉁이에 몰고 조역을 중심에 부각시킴으로서 이미지의 서열을 분쇄시켰다. 붉은 백단심의 핏빛 빗살무늬는 선명하다 못해 손가락에 물감이 묻어날 것만 같다. 그런데도 사진의 근경을 독점한 가시는 꽃잎보다 더 선명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굵고 뾰족한 가시는 그 단단한 육질을 느낄 수 있도록 촉감까지 자극한다. 꽃잎보다 가시가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궁화꽃잎도 초점거리 밖의 원경으로 밀려나 유곽만 드러난데 반해 꽃대와 가지를 완전히 덮어버린 진디물의 존재를 근경으로 잡아 생동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가?
작자의 미학적 고뇌가 엿보이는 수작이어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름다움은 추악함이 또는 더러움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것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은 추악함이요 더러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추악함과 더러움은 아름다움의 다른 한 측면이다. 그들은 분리하려 해도 분리할 수 없는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미학이 아니라 추학醜學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더러움을 더러움으로만 보고 아름답다고 보지 못하는데도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파랑의 사진작품들은 단순하고 빈약하고 국부적이고 천박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의 중요한 구성부분인 추함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추함마저 아름답게 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자체만으로는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자신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추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도는 파랑의 촬영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한 기초위에서 작품을 완성품으로 만들기 위해 정밀교정 작업에 착수했다. 사진들을 정착액에 몇 분 담근 뒤 다시 꺼내어 청산제 2철염을 사용하여 원하지 않는 디테일들을 제거시키는 표백처리다. 표백할 부분을 휴지로 닦은 다음 붓을 이용하여 가장 약하게 희석시킨 표백제로부터 순서대로 발라 나갔다. 다른 부분에 번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15분쯤 지나서 다시 사진을 정착액에 넣어 표백을 정지시킨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다음으로는 염료를 발라 사진의 스파트부분을 주위의 톤과 비슷하게 수정하는 스파팅작업을 해야 한다. 연필, 붓, 포스터컬러물감 등을 준비했다. 스파팅에 이어 계속되는 에칭작업에 필요한 면도칼도 준비했다. 품을 들여서라도 촬영 작품집에 수록될 사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오빠, 둘째 오빠가 회사에서 해고당했대.”
위층에서 미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그녀의 어조에는 생기마저 넘친다. 오빠의 유례없는 관용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미경은 중요한 정보 하나를 제공해준 것이다.
“누구라고?”
“준범이 오빠 말이야.”
“준범이가 어쨌다고?”
“회사에서 잘렸다니까.”
“뭐라고! 너 방금 뭐라 했어?”
정도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걸상이 콘크리트바닥에 긁히며 귀 따가운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한달음에 지하실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 말 어디서 들었어?”
“어제 식당에서 만났었어. 술에 녹초가 되었는데 묻기도 전에 회사서 해고당했다고 그러는 거야.”
“왜. 무슨 이유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잖아도 준범이와 있었던 전번 날의 불쾌한 만남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아무리 실수를 해도 그렇지 그래도 친구가 아닌가. 질책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파랑과의 정사가 있고나서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없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게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잖아. 발을 빗디뎌 넘어질 수도 있고' 라고 하던 준범의 불평이 새삼스럽게 귀전에 재생되기도 했다. 한번 불러내어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그 손바닥 만한 자존심이 정도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 녀석이 방송국에서 여태 잘 버텨나가더니 갑자기 해고되다니 웬일이지?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챙길 경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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