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열차서 만난 한족 여대생, 한국청년에 반해 얼떨결에 '가족 맞선'

◇ 위기감 감도는 조선족 사회

▲ 만주 최동북단 삼강평원 가는 길의 가목사역 전경.
흑룡강 최상류 북극촌에서 다시 동강시로 내려와 능강을 거쳐 간 곳은 흑하시, 여기서 흑룡강 하류를 가는 길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2시간 소요되는 하행하는 하얼빈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도록 완행열차는 달려 이튿날 아침 수화(綏化)라는 곳에 도착했다. 흑룡강 최하류 삼강평원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가목사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뜬눈으로 왔기에 먼저 식당을 찾았다. 택시기사에게 수첩을 꺼내 한자로 써보이며 역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족식당을 안내해 달라해 간곳이 금명조선구육관(金明朝鮮拘肉館)이었다.

조선족식당 남자주인은 한국에서 온 우리일행을 반기며 금세 우리는 같은 동족이라 친해질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한국때문에 중국조선족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몰려있다고 한다. 한국 가서 돈벌이 하는 것은 조선족에게 윤택한 삶을 보장해 주었으나 갈수록 악순환이 거듭되고있다는 말이었다. 만주땅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 돈 벌러 들어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과 이런 지방도시에도 조선족 젊은층들 모두 한국으로 가버렸으니 가정이나 가족개념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식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부인과 딸도 한국에 돈 벌러 갔는데 돈도 보내오지 않고 아예 이제는 한국에 눌러 붙었는지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국인 한국이 잘 살게 된 것이 처음에는 기쁘고 반가운 일로 받아 들여졌으나,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한국행이니 자신들이 지켜온 땅이 텅 비어있는 현실이며, 누가 이 땅을 지킬지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현실로 다가온 만큼 조선족사회가 무너지지나 않나 하는 위기감마저 느낀다는 것이었다.

◇ 캠코더에 빠진 중국 여승무원들

▲ 가목사행 장거리 열차속에서 만난 한족 여대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필자 일행.
우리 일행은 시간에 맞춰 다시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장장 8시간을 가야 가목사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만주벌판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초가을이라 벼들이 누렇게 들판을 수놓고 있었는데, 가목사까지 가는 긴 시간의 열차속에서 일어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객실은 텅 비어 승객은 몇 안되었지만 캠코더로 비디오 영상을 촬영하는데 승무언들이 지나가며 일제히 몰려드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곱여덟 칸이나 되는 이 열차의 차장은 여성이었는데 앞에 오더니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각 칸마다 승무원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고 일제히 보이지 않기에 와 보니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 속에 둘려싸여있지 않은가.

다름아닌 캠코더로 비디오영상을 촬영하는게 그들에겐 처음 있는 보는 것으로 신기해 하며 자릴뜨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여러 남자승무원들이 다 모여 열차속에서 집회를 하듯 웅성거리고 있었으니까 말인데 말이 통하지 않아도 행위로 보여주며 서로 웃고 떠들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는데 이게 바로 문명의 발달 차이에서 오는 격차를 말해주었다.

이런 와중에 이뻐장한 젊은 아가씨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물어보니 하얼빈사범대학 영문과 4학년 중국한족 학생이었다. 그녀는 고향 가목사로 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가목사를 가고 있으니 좋은 여행동지가 되었다. 한국과 다름없이 그녀의 꿈도 고향은 시골도시 가목사이지만 하얼빈에서 대학을 졸업하면 북경이나 상해 같은 큰 도시로 나가 꿈을 펼쳐보는게 소원이라 했다.

열차가 가목사역에 도착할 즈음 서서히 해는 지기 시작했는데 하얼빈에서 흘러온 송화강 강물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노을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하얼빈사범대학 영문과에 다닌다는 중국한족 대학생과 재회를 약속하고 우리는 가목사역 맞은 편 허름한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끝내고는 만나기로 한 송화강공원으로 갔다.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이 밤하늘에 솟아있었는데 이는 북한의 주체사상탑과 그 위용이 흡사했다. 북한의 주체사상탑 꼭대기엔 횟불인데 비해 이곳은 별이 꼭대기에서 네온싸인장식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며 벽면에는 혁명 전투열사들의 환호장면들이 새겨져있었는데 한국으로 말하면 독립운동 벽면조각상 같았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에 온 것임을 실감케 해 주는 장면이었다.

◇ 송화강변에 울려퍼진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 가목사시 송화강공원에 있는 중국 전투열사기념탑.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잠시 후 이변이 벌어졌다. 하얼빈사범대학 영문과에 다니는 중국한족 대학생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여동생과 함께 온 것이다. 조금 있으려니 그녀의 어머니, 삼촌부부, 사촌언니부부까지 나타난 것이었다. 인사가 끝나자 그녀의 어머나는 우리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사절하고 송화강변 라이브카페로 갔을 때는 그녀 여동생과 어머니가 동참했다. 알고 보니 열차속에서도 동행항 내 제자 백민군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하더니 그 한족대학생이 가목사에 와서 부모친지를 모두 불러내어 선을 보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국경을 초월해 일어났으니 말인데 이역시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시기우(城市奇遇)’라는 라이브카페 상호가 '우연한 만남'이듯 한국인들이 왔는 것을 알고는 남자통키타 가수가 한국말은 못하지만 한국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흔쾨히 좋다했는데 최진희 노래 사랑의 미로가 이 머나먼 만주땅 최동북단 가목사시 송화강변에 울려퍼졌으니 말인데 역시 노래도 국경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바람난 동요가수 이춘호씨가 생각났다. 답답한 분지로 갖혀있는 대구에서 맨날 아는 사람들 앞에서만 목청 돋굴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한 광개토기질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나는 제의가 들어와서 키타 반주속에 한국의 엘비스플레스리로 통하는 남진의 노래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불렀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하얼빈사범대학에 재학중인 중국한족 그 여학생이 백합꽃다발을 무대로 나와 선사하는 것이었다. 역시 국경을 초월한 이런 일들이 만주땅에서 연출되었는데 그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

자무쓰 즉 가목사(佳木斯, Chia-mu-ssu)는 중국 북동부 흑룡강성(黑龍江省) 북동부 송화강(松花江) 하류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18세기까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한다. 한족(漢族)과 만주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가목사는 동흥진(東興鎭)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교역지로 성장했으며,1931~1932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기 시작한 후 가목사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행정중심지이자 삼강성(三江省)의 성도가 되었다. 이무렵 북대황(北大荒)이라 부르던 경상북도 크기만한 미개간지인 황무지가 삼강평원이라는 거대한 평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