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박사의 퓨전 로드맵

나의 인생은 황량한 중국의 동북에서 새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땅은 늘 나에게 배움의 터전이요 개척의 현장이요 미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소통과 화합의 의지를 나타내며 서로를 포용하는 우정의 관계가 생겼다.
이른바 ‘함께하는 정신’이다. 이런 관계속에서 어제의 나를 잊고 미래를 향해 뛸 수 있도록 이끌어준 수많은 스승들이 있다. 그래서 그 곳은 내게 선구자의 땅이요, 거듭남의 땅이다.


민박회 사람들

북경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1990년 10월 초, 북경에서 우연한 기회에 김진경 총장님을 만나 뵙고 난 이후 그에게 감동을 받아 연변과학기술 대학 사역에 동참 해 온지 올해로 18년째다. 내 인생의 후반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사역 기간을 통하여 중국 인민과 조선족 사회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김 총장님의 권면과 집사람의 내조에 힘입어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박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 2003년 9월이었다. 나는 기업인이었고 더군다나 5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면학 분위기를 익히고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주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화시키고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으로 배움의 길을 택하게 된 셈이다.

중앙민족대학 사회학학원은 민족학계와 사회학계로 분류된다. 나는 민족학계 부문을 전공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변경지역 이중문화 형성 및 변천 과정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 입주한 한민족 이민들의 토지 개척사로부터 항일 독립투쟁 및 중국 공민(조선족)으로의 전환, 1978년 개혁개방 후 국내대도시 진출 및 해외 노무진출에 따른 조선족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붕괴현상에 이르는 일련의 사회문화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흔히 ‘변연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동북아 정세의 시대 변화에 따라 단련되고 축적된 조선족 사회의 문화적 특질을 오늘날 정보화·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적응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열린 민족주의 차원에서의 접근을 연구 테마로 삼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동북아 국제협력시대 조선족사회문화기능 연구」 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졸업 1년 후인 2007년 가을에,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이라는 단행본을 한국의 학술전문출판사인 ‘박영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이 지난해 3월에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의 감수를 거쳐 ‘세계지식출판사’에서 중국어판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나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나는 감히 이 저서를 내 인생을 통하여 얻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열매라고 여기며, 책이 출판되기까지 도와주고 협조해 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런 가운데 각별히 잊지 못할 특수집단(?)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민박회다. 민박회란 ‘중앙민족대학 박사학위 동학회’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2006년도 졸업 민족학계 동기생들이 약 15명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소수민족 출신들로서, 주로 언어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등을 전공했다.

이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지방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교수 및 연구 활동을 해온 삼십대 후반에서 오십대까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도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석사 자격만 갖고도 교수 생활을 해왔던 인력들이 교수 직책을 계속 유지하려면 박사 학위를 받아야한다는 규정이 생겨서 어렵사리 파견근무 형태로 북경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는 누구를 만나던 그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가치있고 창의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을 좋아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만학을 한 내게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 주었던 이들과의 만남을 계속하고 싶어서 가까운 동기생인 전신자 교수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2006년 민족학계 졸업동기생 모임을 만들어 방학을 이용해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소수민족들이 사는 지역을 순회여행하면서 토론도 하고 서로의 연구실적을 나누는 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동기생들 모두가 이 제안을 환영해 모임이 만들어졌다. 내가 가장 연장자이며 모임의 제안자라는 이유로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내몽고 대학 예술학원 교수인 서영(徐英)박사를 부회장으로, 연변대학 사회학과교수인 전신자(全信子)박사를 총무로 임명했다. 그렇게 만학의 추억을 나눈 중국의 소수민족 10여명과 함께 민박회를 만들게 됐던 것이다.

이후 우리는 2007년 여름에 내몽고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첫 번째 민박회모임을 가졌고, 지난해 8월 7일부터 10일까지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는 연변과기대 일로 연길을 자주 다니다가 지난 여름에는 특별히 민박회모임을 위해 연길로 향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3박 4일간의 여정을 통하여 세계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깨닫는, 역사의식의 전환과 변곡점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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