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마다 '마루타 흔적'…역사의 비극앞에 말문이 막힌다
소각장·주사기·생체실험 대상자 명단

 

▲ 731부대 본부건물 전경.
◇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본 731부대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중국 만주땅을 점령하여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으로,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이라는 일본 괴뢰정부까지 세웠는데, 그게 바로 식민지가 된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하는데 일차적으로 만주땅을 집어삼킨 것이다. 일본은 전쟁 당시 세균전을 벌이기 위해 인체에 대해 생체실험까지 자행했던 곳이 바로 흑룡강성 하얼빈시 교외의 일본관동군방역급수부(731부대)본부 소재지인 것이다. 731부대가 이른바 ‘마루타’라고 일컬어진 인체실험용으로 포로를 가두기 위한 특설감옥과 세균실험실 등이 그것이다. 3천여명을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살해, 세계전쟁사상최대의 세균실험을 자행했던 그 본거지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잔악한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 시설은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어 세계적으로 세번째 전쟁관련기록이 된다. 중국측의 세계 문화유산 등록대상은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범죄 진열관’이 관리하는 부대본부 등 23개 시설인데 중국정부는 중학교 교사로 사용해 왔던 본부 건물, 그리고 잔해가 사라진 특수감옥과 지하통로 등을 복원해놓았다. 731부대 본부건물은 일본 관동군이 퇴각하면서 증거인멸을 위해 폭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병기의 위력을 확신한 일본군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중장이 관동군의 만주지배를 발판으로 세균전 연구를 자행했는데 세균 병기를 개발하기 위해 페스트, 탄저, 콜레라와 같은 치사율도 높고 전염성 높은 강한 세균을 연구대상으로 많은 항일 투사들과 포로들에게 자행. 9년(36~45년)간 약 3천명 이상의 마루타가 독가스, 동사실험, 세균실험 대상으로 실험보고서에 기록되었다.

▲ 731부대 본부건물 뒤 발전소 잔해 모습. 우뚝 솟아 있는 대형 보일러실이 이채롭다.
◇ 이름이 없는 마루타

마루타란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일본 관동군 만주 제731부대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등 전쟁포로 및 그 외 구속된 자로 약 3천여명 이상의 마루타 즉 "통나무"란 뜻으로 생체실험 대상자를 말한다. 마루타에게는 특별한 것들이 있다. 첫째, 마루타는 인간의 이름이 필요치 않다. 단지, 세자리의 번호로 구분되는 생체실험의 재료를 의미한다. 둘째, 마루타에게는 최고의 식사가 제공된다. 매 끼마다 영양만점의 음식에 디저트, 비타민제까지 곁들여 졌다. 셋째, 마루타는 소약한 체력을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여 실험재료가 되기 위해 건강한 육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31부대 죄증진열관. 두개골을 쌓아올린 조형물이 당시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1936년부터 10여년 동안 우리 동포와 중국인 러시인 등에게 생체실험을 한 일본제국의 부대로 전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가 생체실험에 사용했던 페스트균 증식기와 주사기, 현장사진, 사람이나 동물을 태웠던 소각장 등이 죄증진열관과 함께 볼거리로 남아있는데 하얼빈시에서는 50km 떨어진 곳에 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대로변 오른편에 크게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범죄 진열관’ 이라 세계놓은 건물이었다. 바로 진열관으로 들어갔는데 개방시간은 오전 8시 30분 부터 오후 4시까지며 입장료는 1인 10원. 1층은 로비성격으로 사무실과 기념품 판매점 등이 있었고 계단을 돌아 올라간 2층 좌우에 전시실이 나타났다. 바로, 그 「일본 관동군 731부대 죄증진열관」을 둘러보았다. 2층 진열관 입구부터 썰렁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두가 인간의 참혹성을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진열관은 좌우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왼쪽 진열관에는 당시 일본 관동군부대 건물 배치도가 모형으로 상세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사진들이 현장감 있게 그대로 소개되어 있었는데 끔찍한 것은 생체실험해부모형도 동상실험모형도 사지절단된 모형도 등 그 참혹상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책임자 사진, 당시 책임자들 명단, 의약품, 주사기, 가위 등 생체실험에 사용된 도구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또한 밀랍으로 하나하나 재현해 놓은 것들인데 옷을 다 벗기고 남자들이 고문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생생히 재현해 놓았다. 손발이 묶여져 있는 모습, 세숫대야에 알몸으로 앉아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 관동군이 막대기를 들고 무차별 때리는 모습들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제2진열관으로 들어서니 관동군 731부대의 연혁과 활동상황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나를 섬뜩하게 했는게 있었다. 다름아닌 생체실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의 명단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남자만 있는게 아니라 여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보면, 「장옥주.여.31.漢.길림.지하항일공작자.1942년 12월 2일…」그리고 소재지와 소속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한두 명이 아니라 한쪽 벽면을 다 메우다시피 당시의 희생자 명단을 상세하게 소개해 놓았다. 그중에는 「金安東.男.30.朝鮮 .愛國志士.1943年 8月 在奉天新城子被奉天 憲兵分 隊違捕, 1944年 送石井部隊」 (김안동.남.30.조선.애국지사.1943년 8월 재봉천신성자피봉천 헌병분유대위포, 1944년 송석정부대)이렇게 기록된 조선 독립지사의 명단도 들어있었다. 이은림시인은 기록노트에서 「한국사람 이름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고 적고 있는데, 실상인 즉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국만리 만주땅에 왔다가 악랄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쓸쓸히 죽어간 이런 영혼을 두고 지금의 우리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한 역사의 비극이 한 인간의 비극까지 초래했던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우리는 너무 많은 아픔을 가진 민족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 고혼으로 떠돌 731부대 희생자에게 명복을

▲ 31부대 죄증진열관. 두개골을 쌓아올린 조형물이 당시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오전 10시 43분에 도착해서 관람을 끝내고 731부대 죄증진열관을 빠져나온 시각은 11시 20분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731부대 유적지로 갔다. 다가서 보이는 그 앞에 가로로 바닥에 큰 비석으로 ‘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遺址’라 써놓은 본부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그 오른편에 지하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을 공개해 놓기도 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부서지고 내부는 검게 불탄 흔적도 보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별도의 계단이 있는 곳이 옆에 있었는데 굳게 자물통으로 잠겨져 있었다. 731부대 본부 건물과 연병장은 잘 가꿔져서 말끔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어두운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가니 붉은 벽돌담들이 즐비해 있고 두 갈래 철길이 놓여있었는데 철길이 놓여있는 것 보면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이곳에 내렸을 것으로 추증된다.

돌아들어간 골목길을 빠져나왔을 때 오른손 편에 대형철문이 양쪽으로 높게 달려있었다. 꼭 분위기가 가동을 하다 중단한 공장건물같은 높은 콘크리트건물이 폐허가 된 채 구멍이 숭숭 뚫린 채 하늘로 치솟은 굴뚝을 달고 버려져 있었다. 대형 보일러실이 있는 발전소었다. 본부건물의 뒤켠이 되는데 이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부대 정문 같은 게 나타났는데 그곳은 생체 실험용으로 쓸 생쥐 등을 가두어 놓은 흔적이 보이는 조그만 2층 건물이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조그만 건물이 하나 있는데 생체실험장이었다.

▲ 731부대 한 생체실험장의 전경.
일본제국의 악명을 잘 말해주고 있는 731부대 현장을 견학하고 돌아 나오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국만리 만주땅 이 추운 이곳에서 비명에 간 서러운 목숨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 아픈 마음 달래겠는가. 그 모두가 객귀가 되어 눈바람 부는 어느 벌판을 아직도 우둘우둘 떨면서 헤매다니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인간은 살아서의 영화도 중요하지만 죽어서도 영혼이 편안해야 하며 그리고 죽을 때 편안하게 눈감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일순간 들기도 했다. 만주땅 하얼빈은 일제시대 안중근의사가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으로 이름이 드높은 곳이지만 일본관동군이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할것없이 고문하고 죽이고 시체를 불에 태우고 하면서까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그 현장으로 더욱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장악하고 만주 땅 전역을 장악하면서 대일본제국이라는 명목 하에 ‘만주제국’을 장춘 땅에 건설했는가 하면 중국본토를 삼킬 만반의 태세까지 갖추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하얼빈에는 731부대가 주둔하게 되었으며 장춘에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위황궁’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특히 한국과 중국의 근대사에 크나큰 비극의 장을 일본은 펼쳤던 것이다.

이국만리 만주땅 하얼삔에서 이처럼 사나운 운명을 타고나 따뜻한 흙으로도 돌아가지 못한 생체실험장에서 비명으로 죽은 몸들, 소각장의 한 줌 재로 흩뿌려지고 영혼은 그을음이 되어 하늘로 말없이 날아갔지 않았겠는가 하는 순간, 이때 말이 끄는 인력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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