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장백폭포로 산행을 나갔다. 한 여름임에도 산중의 새벽공기라 그런지 차가왔다.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이 스며드는 공기가 무척이나 신선하고 상쾌했다. 마음 속 응어리가 모두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폭포로 올라가는 길가에 노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피어오르는 김이 백자작 고목나무들 사이로 새벽안개처럼 퍼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폭포에서 흘러 내리는 물길 위로 길이가 50m 정도 되는 철제 다리가 가로 놓여 있다. 모양은 볼품이 없지만,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철교 위에 서서, 장백폭포에서 쏟아진 물결이 하얀 거품을 물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흘러가는 물살에 빠져드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갑자기 ‘흐름’이란 말이 가슴에 메아리친다.

백자작과 물푸레나무들이 한데 엉켜 우거져 있는 산길을 15분정도 더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장백폭포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장백폭포의 위용을 말로 어찌 다 표현할까! 멀리서보면 긴 하얀 천이 산비탈 허공에 걸려 있는 듯 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천지에서 흘러넘치는 물의 양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물안개를 피우며 낙차 하는 그 웅대한 힘의 위력이 온 산천을 진동시키는 듯하다.

젊은 날, 일주일이 멀다하고 산행을 즐길 때 나는 곧잘 ‘산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을 화두로 던지곤 했다. 오늘 이제 물의 흐름에 잠겨보니 물 또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흐름속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 겸허한 실존이 물을 더욱 우러르게 만든다. 그 물결을 따라 나도 흐르고 싶다. 유구한 인류의 삶 한 가운데, 그 위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나도 함께 흐르고 싶은 것이다.
태어나고, 아내를 만나고, 젊은 날 가슴에 품었던 꿈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그 실패를 통해 더 큰 사랑을 얻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리고 김진경 총장을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고, 그 이후 새롭게 살아온 인생의 과정을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결코 내가 스스로 헤쳐 온 길이 아니다. 자연처럼 흘러온 것이다.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산처럼, 겸허하게 흐르는 물처럼, 시간과 자연 속에 나 자신도 흘러온 것이다. 나는 이 모든 흐름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역사의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다. 유구한 대 자연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의 실존과 나를 존재케 하는 절대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아침, 백두산 장백폭포 앞에서 마주한 그 존재의 섭리가 나를 깊은 감흥으로 이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바람도 불지 않아 천지 등정을 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중국 정부는 이 산을 몇 년 전에 중국 10대 명산중의 하나로 편입시켰으며, UN에 보고하여 환경보호구역으로 지정받음으로서 영구 귀속시킬 속셈이다. 또한 천지의 절반을 나누어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으로써, 한국의 많은 식자들로부터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관리하던 장백산 관광지 관리운영권을 길림성으로 이관시킨 후 대대적인 관광지 개발 사업을 벌려 인근 백산시에 공항을 건설하고 도로 및 철도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교통 요충지인 이도백하를 유럽풍의 리조트형 관광도시로 탈바꿈시켜, 중국내 주요기관들과 부유층의 여름휴가 별장지로 사용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일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과 맞물린 채, 이 지역에 투자해왔던 한국 기업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도 관광재정 수익면에서 많은 손실을 안겨준 배타적 행정조치라 해서 말썽을 빚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탄 짚차가 백두산 산정 가까이 올라서니 오래전에 중국 정부에서 세운 기상관측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최근에 기상관측소 앞에 국경 및 관광지 관리 임무를 띈 행정 건물이 하나 더 들어서 있는것을 볼 수 있다. 그 건물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祖国利益 高於一切"

중국의 국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글이다. 차에서 내려 우리는 뛰어오르듯 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문봉 정상에 올라서서 눈앞에 드러난 천지(天池)를 보니, 말 그대로 한 폭의 신비스러운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분화구 전체를 에메랄드색 유리판으로 덮어 놓은 듯 푸르고 맑은 빛을 띄며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데 구름한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그대로 천지에 빠져있는 듯하다. 물은 원래 무념무색하지 않은가. 그런 천지의 물이 하늘을 받아들이니, 하늘만큼 깊고 푸른색의 물이 된다. 그래서 천지라 불리웠던가.

하늘도 푸르고 천지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다. 또한 민박회로 모인 소수민족의 미래를 향한 꿈 또한 푸르고 순수하다. 누가 우리의 이 푸른 꿈을 막을 것인가. 천지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푸른 물길을 마음에 새기며, 내 가슴 속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정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본다. 시작도 끝도 없이 솟아오르고 흘러내리는 천지의 열정을 내 가슴에 담는다.

천지(天池)는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정기와 욕망을 담은 자궁이요. 장백폭포는 배꼽이 되어 긴 탯줄을 대지위에 드리운 채 만물을 소성케하는 강(江)의 시작점이다. 장백폭포가 쏟아낸 긴 흐름도 결국은 천지(天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의 흐름도 결국은 창조주의 배꼽으로부터 솟아난 생명의 물줄기를 따라 이합집산하며 여기까지 흘러왔으리라. 전쟁과 평화라는 이름의 쌍두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달려 온 인류 역사도 어쩌면 천지에서 흘러나온 장백폭포처럼 한줄기 유구한 흐름속에 존재하는 형상일 따름이다. 그 모든 용솟음치는 변화를 낳은 흐름의 근원과 같이 천지는 그렇게 신비로운 벽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도현 만보진에 있는 홍기촌이란 조선족 민속촌을 구경했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족 출신으로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다루는 최고기관인 정협회 주임인 리덕수 선생이 쓴 ‘중국조선족제일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민속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촌민 생활구, 민속 거주구, 민속 활동구, 민속 음식 제작구 등으로 구역을 나눠 특징 있게 시설을 배치했다.

민박회 일행들은 특히 조선족 촌민들의 주거형태와 식생활 부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이는 북방식 주거 형태인 마루짱 밑 부엌구조가 신기해 보였는지 직접 마루를 열고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어 보기도 했다. 건물들은 모두 단층 기와집으로 단장되어 있고, 지붕에는 태양열수기가 장치 되어있으며, 수세식 변소와 함께 주방에는 프로판 가스도 연결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옥수수, 해바라기, 배추, 고추, 가지, 파, 황두(콩), 깻잎 등의 작물이 자라고 있고, 빨간 꽃망울이 조롱조롱 매달린 분꽃이 화단에 심겨져 있다. 건물 벽에 군데군데「福」자와 함께 벽화형태로 민속그림이 그려져 있고, 마을 중앙에 있는 행정기관의 현관에 “신농촌 신면모, 신농민 신생활”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신 농촌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가보니 향도원(香稻園)이라는 이름의 수전(水田)농사 시범지구가 있었다. 2,000평 정도의 규모로 지당(池塘)을 조성하고 사방으로 목재로 된 통로를 배치해서 관광객들이 물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수초와 벼농사를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몽고와 신장지역에서 온 몇 사람들은 '벼'를 난생 처음 본다고 하면서 물에서 열매 맺는 수전농사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그들은 여태껏 밭작물 한전(旱田)농사 밖에는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손춘일 원장께서 조선족 사회가 중국에 미친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가 바로 수전농사를 개척, 보급한 일이었고, 특히 이곳 연변과 길림을 중심으로 벼농사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동백미’라 하여 청나라 황실에만 독점적으로 공급했음을 설명 해 주었다.
나는 손 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편 이런 생각에 잠겼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송화강의 발원이 되어 대지를 비옥케 하는 생명수가 되었듯이, 수전농사를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물의 흐름을 개척한 한민족 이주민들이야말로 이 땅을 변화시킨,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 선구자들이지 않는가! 또한 여기서 생산된 ‘동백미’가 청나라 황실을 먹이고 키우는 주식(主食) 소재(素材)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중국을 움직이고 천하를 통제하는 힘을 갖도록 만들었다면,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앞으로 중국의 미래를 선도할 새로운 세력으로 한민족의 등장을 예고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는 곧 세계역사를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구조 속에서 이끌어가는 ‘시대정신’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미학으로 발전하여 시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사례가 적지 않음을 깨닫으면서 천천히 향도원(香稻園)을 떠났다.

예를 들면, 헤겔의 변증법과 ‘역사철학’이 그랬으며, 물질이 정신의 기초가 되어 생산성을 이끌어 냄으로서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의 기초가 되도록 길을 열어준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와 같은 류(類)의 생각의 흐름을 통해 배태된 결실이 아니었던가. 그 열매가 우리를 더러는 행복의 식탁으로 데려가주기도 했고, 또한 더러는 불행과 고통의 밭으로 끌고 갈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의 흐름과 역사의 만남은 우리 인류를 한발 한 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지금까지 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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