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식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 지금으로부터 42년전, 아버지께서 병으로 세상 뜬 후의 그해 겨울방학이였다. 둘째형님이 생산대일에 날마다 다니다보니 집의 땔나무는 응당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한 나는 방학첫날부터 쪽발구를 끌고 나무하러 다녔다.

열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쪽발구로 땔나무를 해왔던 나라 땔나무하는 일이 손에 올랐다. 나는 낫나무고 장작나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해서 끌어들였는데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부는 흐린 날에는 마을과 가까운 강가나 야산에 가서 버드나무, 싸리나무 등 낫나무를 해왔고 날이 좋은 날에는 좀 먼산에 가서 장작나무를 해왔다.

열다섯살 어린나이에 쪽발구로 땔나무를 끌어오면 얼마나 끌어오랴만 몇 십 일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끌어들인 나무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렇게 끌어들인 나무를 눈이 녹울 무렵 쫑치고보니 낫나무 한낟가리에 장작 한더미가 나왔다. 그 장작들을 차곡차곡 쌓고보니 한장(길이 열자,높이 다섯자)너머 되였다. 그때 집에서는 단돈 한푼없어 애먹던터라 나는 그 장작을 35원받고 팔기로 흥정을 해놓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막고나서서 그 장작을 견결히 못 팔게 하는것이였다. 돈을 못쓰면 못썼지 어떻게 해온 나무라고 그걸 팔겠는가 하는것이였다.하긴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 나무들을 해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누구보다 잘알고 계셨다.

내가 쪽발구로 산에서 나무를 싣고 내려오다 내리막에서 뒤번져져 나무실은 발구에 깔린적은 얼마이며 마른 나무가지를 베겠다고 나무우에 올라갔다가 떨어진적은 얼마이며 힘들고 지치고 허기져 집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쓰러진적은 얼마이며 마른강대를 찾지못해 생나무를 찍어 끌고오다 호림원과 부딪쳐 림업경영관리소로 끌려간적은 또 얼마인가? 손등은 얼어 갈라터지고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고. 남몰래 흘린 눈물 또 얼마이고….

하지만 나는 고집을 쓰고 끝내 그 장작을 팔고야말았다.그날 돈 35원을 손에 쥔 나는 얼마나 격동되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내 혼자의 힘으로 번 뭉치돈이였다 더우기 우리 집같이 생산대에 진 빚으로 일년가야 생산대에서 돈한푼 못타오고 일년가야 현금 몇번 못줴보는 신세에 이 돈이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던가? 나는 그때 내 스스로도 장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이 것을 월급쟁이집 자식들은 전혀 느낄수 없을것이다 그들은 부모들이 달마다 몇십원의 로임을 타들이니깐!

지금 애들은 15세에 집일에 손가락하나 까닥 안하지만 우리 그때는 그 나이면 너나없이 집일을 도와나섰다. 물론 지금은 세월이 좋아 애들에게 일거리가 없긴 하지만 적당히 힘든일을 좀 시켜보는것도 결코 랑패는 아닐 것이다. (경기도부천시원미구춘의동217-28(102)  휴대폰:010-4930-9506, 이메일:jinchunzhi200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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