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박사의 '퓨전 로드맵'

[서울=동북아신문]마지막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대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식당 바깥으로 나가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새벽기도를 하러 갈 작정이었다. 나는 요즘 새벽기도 가는 일에 상당히 충실해졌다. 미국 유학 갔던 막내 딸(현주)이 지난 연말에 귀국해서 SK건설에 입사했는데, 근무지가 시내라서 남산 기슭에 있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갔다가 딸을 회사에 출근시켜주고 집으로 돌아와도 아직 7시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딸과 같이 새벽기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애를 출근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재미가 났고, 또 아침시간 관리상 매우 유익했다.

버릇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 전에는 게을러서 새벽기도를 엄두도 못 냈던 사람인데, 요즘은 거의 자동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다.

마을 뒷산 언덕으로 올라가는 곳에 콘크리트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양쪽에 붉고 노란 천으로 만든 깃발이 수십개 꽂혀 있다. 계단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어제 저녁에는 일행들과 함께 급히 올라가는 바람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엔 시간이 많으므로 차분히 내용을 읽어봤다.

고수명목 삼태송(古樹名木 三胎松)이라는 제목 아래 세 그루 소나무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참고로 전문을 게재한다.

목명 적송
수령 천 여년
연변주 림업국 과학연구소 감정.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합수목마을 동쪽 산자락에 고수 세 그루 소나무가 있다.

1. 제일 아래쪽 노송 : 높이 7.5m, 둘레 2.3m, 수관폭 13m,
모양 : 천자가 행차 시 사용하던 일산(햇빛 가리개 우산)과 같다.
2. 두 번째 노송 : 높이 9.3m, 둘레 2.6m, 수관폭 14.5m,
모양 : 대붕이 하늘을 치솟아 오르려는 듯하다.
3. 세 번째 노송 : 높이 10m, 둘레 2.3m, 수관폭 17.5m,
모양 : 거룡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

이 세 그루의 노송은 부르하통하(河)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동하국(東夏國)의 수도 성자산성(城子山城)과 약 1km 떨어져 있고, 해란강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 중요한 평원성(平原城)이었던 하룡토성(河龍土城)과 약 1.2km떨어져 있다. 청조말기 광서(光緖) 30년(1904)과 광서 32년에 전후하여 조선 함경북도 명천 밀양박씨(明川密陽朴氏) 박중근(朴重根)형제, 길주 양천허씨(吉州陽川許氏) 허웅범(許雄範)3형제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노송을 발견하였다. 그 후 명천, 영안, 길주, 화태군 등에서 박씨, 허씨 몇호와 리씨(李), 김씨(金), 강씨(姜)가 몰려왔다. 民國 18년(1928)에 이르러 80여호의 큰 마을 하룡촌(河龍村)이 중심 마을로 되고 신룡갑(新龍甲)이라 하였다.

그 당시 국자가로 이루어진 연길시 근처(연길분지)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박씨, 허씨들의 마을이었다. 세 그루 소나무를 주민들은 신룡툰(新龍屯)의 상징으로 성송(聖松)으로 모시면서 대대로 살아왔다. 3 송(松)은 나무마다 천여개의 년륜이 똑같이 새겨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한다. 무궁무진한 재부를 가진 「古樹名木 三胎松」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재벌나무의 하나이며, 가장 인기를 끄는 관광물로 장백산과 더불어 연변의 지명도를 높여주고 있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고향의 륙모진 모래길은 팔모진 모래길로 되어 가고 있다. 현재 매년 춘추 가일(假日)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산에 도착해서 본 지역을 앙연(昻然)한다. -연길시 소영진 하룡6툰 로년회(小營鎭 河龍六屯 老年会)』

좀 길게 인용되었지만, 전문을 다 수록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지역이(안내판에서 본 것처럼)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마을로 이주하여 온 조선인들은 당시 연도로 보아 이조말기 일본의 합병과 수탈에 저항하여 두만강을 넘어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하는 이곳에 농경지를 가꾸고 수전(水田)을 풀었을 것이다. 부르통하란 말은 원래 만주어로 버드나무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지형지세가 자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아마도 마을 뒷산 언덕에 있는 세 그루 노송을 삼태송(三胎松)이라 부르며 신주처럼 숭상했을 것 같다.

언덕에 올라서서 보니 멀리 연길 시(市)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세 그루 소나무 사이의 공지에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우선 소하룡(小河龍) 마을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合水)되는 지점에 있다는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조선(한반도)과 청나라(중국)가 함께 합류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주변에 1km정도 밖에 안 떨어진 곳에 고구려성과 발해성이 있다고 하니, 이곳은 원래 한민족의 고토임에 틀림없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단절되었던 천년의 역사가 일순간에 현실로 재현되어 그 맥을 같이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 한 가운데 입지한 소하룡(小河龍) 마을 뒷산에 천년도 넘게 살아온 세 그루의 노송이 버티고 있다. 그것도 삼태송(三胎松)이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리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땅을 살고 간 선조들은 왜 이 소나무들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불렀을까. 아이 밸 태(胎)'자인 이 말은 분명히 아이를 잉태하거나 씨앗을 배태할 때 쓰는 용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무슨 꿈을 잉태했고, 무슨 소망을 배태하였을까. 잃어버린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는가?, 아니면 멀리 역사속에 사라진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회복을 소망했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더 멀리 고조선 시대부터 면면히 흘러온 민족신앙인 三神사상의 부흥을 위해 기원했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와 함께 칼로 벤듯 내 영혼의 단층들이 켜켜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무엇을 깨닫고 결단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닫고 이해하고 확신하고 결단해야 할 역사의식은 무엇인가.
이 천년송 아래 벤치에 앉아 새벽기도를 올리며,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미래 천년을 향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꿈꾸고 소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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