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재외동포문학상│박성민(캐나다)

김 형이 오던 날은 유독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뒷문이 흔들리며 벌어진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 왔다. 가을인지 겨울

인지 애매한 때였지만, 찬바람을 앞세우고 서둘러 찾아온 겨울이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올해도 겨울은 춥고 길거라고 주방식구들은 말했다.

이민자에겐 항상 눈앞에 닥친 이번 겨울이 가장 춥고 길었다. 어떤 사

람은 이민생활 자체가 겨울이라고 했다. 얼어붙어 미끄러운 길을 넘어

지지 않으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먼저 와 주인행세

하는 사람들의 바라보는 눈은 늘 차가웠다. 그들은 넘어진 사람들의 손

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겨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겨울이라고 했다. 몸보다 가슴이 얼

어붙어 있고 찬 바람소리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 형은 뒷문으로 들어왔다. 그가 문을 열자 찬바람이 들이닥치며

휘청거리며 바람에 밀려들어 왔다. 그는 키가 컸다기 보다 마른 몸매

때문에 커보였다. 검게 탄 얼굴 위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동남아시아 계

통의 사람 같았다. 그는 철 지난 여름옷 속에 몸을 움츠리고 있어 옷이

헐렁해 보였다. 박 군이 악수를 한다고 김 형의 손을 잡았을 때 살이

없는 차가운 뼈다귀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빛만은 칼날이

들어가 있는 양 날카롭게 상대방을 찔렀다.

주방식구들은 김 형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주인아저

씨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아저씨와 함께 불쑥 주

방에 들어온 사실에 놀랐다. 주방을 들어오고 나갈 때 사람들은 식당

정문으로 들어와서, 홀 안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야 일하

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카운터 뒤에 앉아 있는 주인이 볼

수 있었다. 뒷문은 물건 배달이 왔을 때, 쓰레기를 내다 버릴 때 사용

했다.

우리들은 각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가 오면 자신들이

하는 일중 그에게 떠맡겨야할 일들을 생각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말만

하던 허 씨 할머니가 나간 자리를 매우기 위해 김 형이 온 셈이었다.

허 씨 할머니는 말을 하기 위해 왔고, 일을 해도 말로 했다. 그리고 대

부분의 말 많은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일일이 참견을 해

야 했다. 음식을 입으로만 만든다면 그녀의 음식솜씨는 주방장 아저씨

보다 백배 나았다.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거나 얼마나 바쁘게 일하고

있느냐는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 상대가 없으면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허 씨 할머니는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는 수지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수지 엄마는 원래 접시를 닦는 일이 그녀의 주 업무가 아니라

밑반찬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나이든 분이 접시를 닦는 것이 안쓰러워

틈이 나는 대로 말 없이 도와주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허 씨 할머니

곁에 자주 서있게 된 이유였다.

수지 엄마는 비단 허 씨 할머니뿐만 아니라 누가 말을 걸어도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주인아줌마가 말을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여,

주인아줌마는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

을 묵묵히 하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허 씨 할머니는 딸과 사위는 직장에 나가고, 하나 있는 외손자마저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하루 종일 갇혀 있는 집이 감옥이라고 했다. 그

녀는 마치 막 감옥에서 나온 사람처럼 확신을 가지고, 감옥도 독방이

아닌 이상 말을 나눌 동료가 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일손이 모자라는 마당에 젊은 장정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은, 주방식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는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 하

듯 접시를 닦을 것이었다. 송 양이 제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이도

비슷한데다가 나이든 할머니 대신 젊은 남자가 들어온 사실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평소에는 활짝 벌려 웃던 입을

반쯤 가리고 웃었다.

김 형이 온 날 밤에 남자끼리 모였다. 김 형, 주방장 아저씨, 박 군,

세 남자였다. 식당 이층의 주방장 아저씨 방에 모여서, 그가 안주 감으

로 특별히 끓여온 잡탕찌개를 가운데 놓고 술을 마셨다. 얼큰한 찌개가

맥주 안주로 맞는 것인지 몰라도.

김 형은 처음에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배를 타고 떠돌아 다녔다

고 했다. 한참 술이 돌아가고 약간 씩 취했다고 생각했을 때, 주방장

아저씨가 다시 물었다.

“미스터 김은 젊은 나이에 왜 그렇게 떠돌아 다녔소?”

언제 어디에 있던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주방장 아저씨였다 . 김 형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과 다른 대답을 했다.

“잊어버리기 위해서요.”

김 형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하기에 헤어졌다고

했다. 쉽게 튀어나온 대답은, 진실성이 담기지 않은 말장난 같았다. 대

답이 질문에 비해 너무 가벼웠고 내용에 비해 쉽게 튀어나왔다. 주방장

아저씨는 무성의한 대답에 자신의 질문이 무시당한 것처럼 기분이 상

했다. 박 군은 사랑이야기라면 무조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젊은 나이였

지만, 그 역시 김 형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말을 할

때마다 괜히 폼만 잡으며, 생각 없이 엉뚱한 대답을 던져대는 김 형의

대답에 실망했다. 그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말상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송 양은 결혼으로 이곳에 왔지만 정식으로 식을 올리기도 전에 남자

에게서 쫓겨났다. 여기 법대로라면 그녀는 한국에 돌아가야 했지만, 어

느 한인교회 목사님의 수고로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아있게 됐다고 했

다. 그녀는 그렇게 쉽게 남자에게 쫓겨날 만큼 결코 미운 얼굴이라거나

신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여성스러워 주

로 전화로 대화를 오고 갔다거나 채팅을 했다면, 충분히 상대방의 마음

을 사로잡을 만 했다. 사진이야 여러 장 찍어서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보냈다면, 오랜 이국생활에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

기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단점을 말하자면, 무엇보다 그녀의 시도 때도

없이 헤프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듣기 거북했다. 그녀는 나이에 맞

지 않게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가 갈비를 구울 때면 이상하

게 그녀가 구운 통 갈비는 한눈에 보아도 크기가 작아 보였다. 불에 굽

느라 줄어들었다 생각해도, 너무 작았다. 고기를 구우면서 한쪽 손에

집게를 들고 다른 손으로 칼을 들고, 그녀는 칼로 끄트머리를 잘라서

집게로 집어먹고 있었다. 어떤 때는 고기는 보이지 않고 휜 뼈만 보일

때도 있었다. 주방장 아저씨는 어지간하면 참는 눈치였지만 손님을 생

각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라면 돈 주고 사먹겠니? 너는 그냥 먹지만 손님은 돈 주고 사먹는

거야.”

그는 이제 비자 연장 신청이 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몇 달 남지 않은 그로서는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

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일가친척 하나 없이 타

국 땅에서 남자에게 딱지를 맞고 혼자 사는 것도 불쌍했다. 캐나다에만

오지 않았더라면, 주방장 아저씨를 빼놓고는 그 누구도 캐나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때 하도 춥고 배가 고파서, 따뜻한 불가에서 밥을 실컷 먹는 게 소원이

어서 식당일을 시작했다.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한 주방 일을 주변머리

없이 평생 했다. 아저씨는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과 드럼통처럼 큼

직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항상 식당의 주방에서 잘 먹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너그럽고 여유가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누가 실수

하여 짜증을 낼 일을 해도 늘 허허하며 웃으며 넘어갔다. 그는 정말 칼

한 자루에 매달려 한 평생을 살아온 ‘칼잡이’ 였다. 주방아저씨가 오이

나 무를 자를 때면 속도가 너무 빨라, 보는 사람은 그가 자신의 손가락

을 자르지 않나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했다.

송 양 만해도 한국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캐나다에 오

지 않았다면, 그리고 남자에게 쫓겨나지 않았다면 주방에서 일을 할 여

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 파티 복으로 등이 깊게 패인 색색

깔의 드레스와 외국 사람들과의 파티에 자주 참석할 경우를 생각해서,

한복 및 개량한복을 잔뜩 가져왔다. 그녀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이곳 사

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물론 한 번도 입을 기회는 없었다. 그녀는 자

신이 가장 좋아하는 마른 오징어도 여러 축 가져왔다. 어쩌면 짐을 풀

때, 그 내용물을 본 남자가 하도 한심해 보여서 그것 때문에 쫓겨났는

지도 몰랐다. 그녀는 파티 복이나 한복보다 작업복을, 오징어를 축으로

사오기 보다 남자의 넥타이를 사왔어야 했다. 그것도 별 실용성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수지 엄마는 원래 말이 없어, 그녀의 내막은 아무도 모

르고 있었다. 혼자서 딸 하나를 데리고 오고, 그 딸의 교육을 위해 주방

에서 일을 했다. 같이 주방 일을 해도 수지엄마가 입고 있는 앞치마와

박 군의 앞치마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박 군의 앞치마는 항상 김치 국물,

간장, 음식 양념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녀의 앞치마는 눈처럼 하얗게

빛났다.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박 군은 ‘학생’ 이라고 불렸지만 잠시 학교

를 다니다 그만 두었을 뿐 학생이 아니었다. 이곳 대학은 입학하기는

쉬워도 졸업하기 어려웠다. 마치 축복과 기회의 땅이라는 이 땅은 누구

에게나 활짝 열린 문처럼 보였지만, 일단 들어오면 닫힌 문이었다. 아

니 아예 문이 없었다. 그는 태평양을 건너 외국만 나오면 누구나 번호

를 정해 곗돈을 타듯 박사 학위를 받는 줄 알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

면 명문 대학 교수가 되고, 배운 것 하나 없이 돈만 많은 졸부의 막내딸

과 결혼을 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좋

아하는 체질도 아니었다.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이 그래도 싫지는 않

은 것이, 옛날 많은 한국유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접시를 닦으

며 공부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도 언젠가 돈이 모이면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며 주말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일단 일을 시작하자 공부할 기회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가 다시는 안 올지 몰랐다.

주인아줌마와 주인아저씨도 한국에 있을 때 철 따라 아니면 주말에

입맛을 찾아 맛 집을 드나들었다면 모를까 주방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식당사업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주인이 친절

하고 음식 맛이 좋으면 손님들이 몰려온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식당일

을 시작하며 깨달은 사실은, 음식이나 반찬은 적게 줄수록 맛이 있다고

믿었다. 주방장 아저씨가 듬뿍 퍼 담아 주었다가 음식이 남아 들어오

면, 너무 많이 주어서 그렇다고, 주인아줌마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아

저씨는 병아리 모이를 주듯 찔끔 주는 일식이라면 모를까, 한식은 시골

사람의 인심처럼 푸짐해 보여야 맛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미스 홍이 보기에 박 군은 사람이 성실해 보였다. 그는 말이 없었고,

주방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 박 군에 비해

새로 온 김 형은 왠지 사람이 미덥지 못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끈적끈

적하게 쳐다보는 눈초리가 싫었다. 그는 사방에 줄을 쳐놓고 먹이를 기

다리는 거미처럼 보였다. 그가 제니에게도 치근댄다는 사실을 그녀는

여자화장실에서 제니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는 미스 홍의 있는 그대로

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배경을 캐면서 계산하고 있었다.

“미스 홍은 여기 온지 얼마나 돼?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데?”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묻지 않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 싶으면 은

근히 다가와서 속삭이듯 물었다.

“홀어머니와 남동생하고 함께 살고 있어요.”

그 말이 자신이 기대와 어긋난 대답이었는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비밀이지만 제니는 언젠가 화장실에서 미스 홍에게만

말했다.

“언니! 나는 엽전은 싫어.”

처음부터 제니는 김 형의 상대가 아니었고 한동안 홍 양에게 치근대

더니, 결국 김 형은 송 양을 택했다. 그리고 송 양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나 보고 소리가 요란한 웃음을 흘렸지만 김 형을 향해 웃을

때는 왠지 웃음의 농도와 색깔이 달랐다. 그리고 김 형이 있는 곳에 언

제나 송 양이 그림자처럼 붙어 서있었다. 김 형도 그런 송 양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가한 시간에 둘이 붙어서 소곤대다가, 어디론가 조

용히 사라지기도 했다. 송 양은 지하실 창고에서 음식물 재료나 물건들

을 가지러 내려갈 때, 조용히 눈짓으로 김 형에게 도움을 청하더니 나

중에는 아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김 형은 기다리고 있었다.

박 군은 언젠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이 빨개졌다. 김치

창고에서 김치를 가지러 갔을 때였다. 창고의 문을 닫자마자 송 양이

돌아서더니, 갑자기 박 군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귀를 깨물듯이 입술

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박 군은 이상하게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있었

다 그는 아무런 느낌도 . 없이 당황하기만 했다. 뚜껑이 닫힌 플라스틱

김치 통에서 쉰 김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양손에 김치를 퍼내기 위해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짙은 빨간 색의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고, 박

군은 김치를 담으려 가지고 온 하얀 플라스틱 통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손에 꼭 붙들고 있었다. 박 군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의 눈에

는 왠지 눈물이 맺혔다. 박 군이 서있는 자리에 기둥이 서있었다 해도,

그녀는 껴안았을지 몰랐다.

계산대에서 앉아서 주로 돈을 헤고 있는 주인아저씨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분명 주인아줌마와 같이 일을 하러

나온 줄 알았는데, 얼마 안 있어 조용히 사라졌다. 주인아줌마는 주방

에 잔소리하러 들어는 와도 손에 물을 묻히는 자체를 싫어했다. 처음에

는 잠시 바람을 쐬러 식당을 나갔다가 몇 시간 후에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다시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아예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박 군과 가장 나이가 비슷한 제니는 홀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고 있

었다. 그들은 제니의 이름도, 성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주방장 아저씨가 주방의 대표이자 책임자로 점잖게 무게

를 잡으며 물었다.

“처자는 이름이 뭔가?”

“제니에요.”

그게 전부였다.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제니라는

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버터 냄새나는 이름으로 자신을 말했다. 당연히 진짜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쁘다는 듯, 휙 등을 돌리며 나가버렸다. 그녀의 성격인지, 아

니면 주방 사람을 무시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주방장 아저씨와 박

군은 왠지 머쓱해졌다. 박 군은 주소나 전화번호, 나이 그리고 좋아하

는 음식까지 묻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녀가 ‘아저씨! 나 배고파

요.’ 하고 말했을 때, 정성과 마음이 담긴 따뜻한 음식을 그의 손으로

만들어 내놓고 싶었다.

주방아저씨는 제니의 얼굴은 화장발 내지는 변장이라고 말했다. 박

군은 제니가 화장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틈만 나

면 주방 뒤의 공간의 기둥에 매달아 놓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지하실에 있는 화장실에 내려가기에는, 그녀는 너무 바빴다. 그 모습을

등 뒤에서 박 군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제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거울

속의 박 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게 저녁 장사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라고 했지만 같이 홀에서 일하는 미스 홍은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장사라

니, 여기가 술집인가? 이내 알게 됐지만 미스 홍은 일을 할 때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일하는데, 제니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일했다. 그러

니까 얼핏 보면 둘은 키가 비슷해 보였지만 사실은 제니가 훨씬 작은

셈이었다. 먼저 발견한 주방장 아저씨가 박 군에게 말했다.

“쟤, 저러다 뜨거운 국물이 많은 찌개나 탕 그릇을 잔뜩 들고 나가다,

홀에서 넘어지면 어떻게 할 거지?”

“아저씨! 생선찌개, 된장찌개, 육개장, 물냉면, 갈비탕, 김치 볶음밥.

탕수육 , 해삼탕, 빨리요. 아! 참, 육개장은 너무 맵지 않게요.”

제니가 노래를 했다. 바쁜 금요일 저녁 시간이었다. 밀린 주문만 해

도 한 둘이 아니었다. 좀처럼 욕을 하지 않는 주방장 아저씨의 입에서

쌍 시옷의 단어가 나오다가 들어갔다. 주방 식구들을 골탕 먹이려 작정

이라도 한 듯, 가지각색으로 주문을 받아와 놓고 빨리 해달라니? 추운

날씨에 냉면은 삶은 후에 찬 물로 씻어야 했고, 그것은 박 군의 일이었

다. 탕수육은 기름에 두 번 튀겨야 하고, 해삼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

붙은 것을 찬물로 천천히 녹여야 했다. 김치 볶음밥은 아예 메뉴에도

없었다. 육개장은 너무 맵지 않게라니? 매운 육개장을 시키면서 너무

맵지 않게라니? 외국에서 한국식당이라면 외국인이나 어린아이들 때

문에 자주 맵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을 듣지만, 너무 맵지 않게라는 말

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음식이 빨리 나가려면 음식의 가

짓수가 적어야 했다. 분명 그녀가 잘 아는 손님이거나 팁을 많이 놓고

가는 손님이었다.

주방장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식당 규모에 비해 음식의 가짓수가 너

무 많았다. 손님들도 한식, 일식, 중식에다 안주까지 들어가 있는 메뉴

판을 펼쳐 놓고 무엇을 시켜야할지 몰라 망설였다. 너무 많은 선택의

기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 사

람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음식을 주문할 때면 모두 급한 볼일이 있

는 것처럼 빨리 달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웨이트레스가 무엇을 시키

는 것이 좋은지, 무엇이 빨리 나오는지 말할 수 있었다. 그냥 옆에 서서

막연히 기다리는 웨이트레스는 경험이 없다기보다 멍청한 여자라고

했다.

수지엄마가 쓰러졌다 . 다행인 것이 마침 바쁜 점심시간을 끝마치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의 주방 안은 마치 싸움터 같았다. 주문이

한꺼번에 몰려서 들어오는데다가 점심시간을 지켜야 하는 직장인들이

많아 일을 쫓기면서 했다.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재촉하던 제니

의 성화도 끝나고, 한숨 놓을 때였다. 싱크대에 쌓인 빈 그릇들을 설거

지하려고 박 군은 김 형과 함께 짙은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수지 엄마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무수히 많은 작은 별들이

보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먼데서 들렸고, 이내

사방이 조용했다. 그녀는 바다처럼 깊은 호수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수지 엄마는 일어나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지 엄마가 살며

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이마에는 얼음주머니가 있었고 미스 홍의 얼굴

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어요.”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에요.”

미스 홍이 수지 엄마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수지 엄마가 눈을

뜨고 둘러보니 그녀는 식당 홀의 한 구석에 의자를 모아 만든 간이침

대에 누워있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의 빈 공간이 등을 거북하게 만들

었다.

“아줌마! 오늘은 먼저 집에 들어가.”

수지 엄마가 의식을 회복하자 주인아줌마는 한시름 놓았지만 저녁에

있는 약속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오늘 저녁 모임에는 꼭 나가야 하는데.”

미스 홍은 영어를 못하는 수지 엄마가 염려스러워, 택시 운전사를

단편소설 부문 85

붙잡고 수지 엄마의 집으러 가는 길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점심

시간에 나온 팁으로 택시비보다 넉넉하게 운전사에게 돈을 주었다. 그

녀는 택시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지 엄마는

수지와 서너 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미스 홍이 한국에서 대학

교 영문과를 다녔으면서도 여기 와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고 한심하

게 생각했었다. 수지엄마는 미스 홍이 대신 택시비를 내는 것을 보며

그녀가 가졌던 선입견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했다. 수지 엄마가 그녀를

초청해준 오빠의 집에서 싸우다 집을 나온 것도 수지의 교육 때문이었

다. 오빠는 수지를 자신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일을 시키고 싶어 했다.

많은 현금을 만지는 자리여서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그녀

는 한사코 반대했다. 공부를 시키려고 왔지, 일을 시키려고 오지 않았

다고 항변했다. 그때가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오빠에게 대들었던

때였다.

수지 엄마는 오랜만에 타보는 택시에서 내렸다. 꽃 한 송이 보이지

않고 얼어붙어 있는 아파트 화단 앞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풀리기는

풀렸어도, 벤치에 쌓여있는 찬 기운에 몸이 떨렸다. 한가한 대낮에 집

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 수지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는 아직 이른 시

간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찬 공기를 쐬자 상당히 가신 느낌이었

다. 수지 엄마는 서둘러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

왔으니 잠깐 쉬었다가 근처의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아, 수지를 위해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리라 생각했다. 식당 일은 항상 밤늦게 일이 끝났

다. 남을 위해 음식을 만들면서 수지를 위해 따뜻한 저녁 한 끼 제대로

준비해주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을 아파트에서 동물의 울음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응접실의 소파 한가운데 수지의

가방이 팽개쳐져 있었고, 그 위에 처음 보는 큰 청재킷이 포개져 있었

다. 소리가 나는 침실로 살그머니 다가갔을 때, 조금 열려진 문 사이로

검고 굵은 다리와 그 다리를 뱀처럼 감고 오르는 하얀 다리가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게 또 한 번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

다. 그녀는 힘이 빠진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벽을 더듬으며 문 밖으

로 나왔다. 수지 엄마는 빨갛게 ‘EXIT’ 이라고 적혀 있는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밀었다. 머리 위에서 붉은 눈물이 오늘 따라 유독 하얀 그

녀의 뺨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철제 난간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옮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몇 계단 내려가지 못하고 머리가 어지

러워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아, 콘크리트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

다. 쭈그린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수지 엄마는 새어나오는 울음

을 삼키며 울었다. 덫에 걸려 쓰러진 동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가녀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비상계단 위에 박혀 있는 누런 전등알이 점점 흐려

졌다.

미스 홍은 속이 상했다. 보글보글한 파마머리로 동생이 식당을 찾아

왔다. 당연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 보글보글한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일찍 집에 들어가라.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 계시지 않니?”

그녀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도 그는 안 들어오기 십상이었다. 어머니

저녁 식사를 챙겨드리거나 말 상대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는 집에 붙

단편소설 부문 87

어있는 자체를 싫어했다 . 동생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올 때도 있었

고, 또 어떤 때는 옷에서 풀 태운 냄새가 나고, 눈이 토끼눈처럼 빨개져

서 들어왔다. 학교생활과 공부를 따라가기 힘든 동생도 나름의 고충이

있으리라 생각 들었지만, 집안의 형편을 생각하면 동생은 너무 이기적

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여기 애들 흉내만 내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

다. 언제부턴가 그는 영어도 아닌 한국말로 말하는 도중에도 ‘Fuck’ 이

나 ‘Shit’ 같은 쌍소리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나쁜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언제 정신이 바짝 들게 충고를 하리라 생각했다.

주인아저씨, 이 사장은 아무리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해도 식당일이

돈이 남지 않았다. 그의 대학 선배가 운영하던 것을 떠맡다시피 시작했

는데 속은 것 같았다. 선배는 식당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

는데 돌아가지도 않고, 여전히 토론토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재료값이 오르고 몇 개 안되던 한국식당이 배로 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민사회에서는 어떤 직종의 일을 하던, 자영업을 하려

면 두 부부가 달라붙어서 해야 했다. 그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에 취미가 붙어서 골프를 치느라 바빴다. 전에 공장 다닐 때

는 시간도 없었지만, 같이 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하자

같이 치자는 사람이 많아 좋았다. 식당 부근에서 보석상을 하는 김 사

장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죽기 전까지 매일 나간다 해도, 몇 번이나 나가겠소? 게다가

필드에 눈이 쌓이는 겨울에는 나갈 수 없지 않소?”

그의 아내도 무슨 일이 바쁜지 남편이 나가기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

최소한 주인이 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데, 요즘 들어 문을 닫는 일조차

미스 홍에게 맡길 때가 많았다.

주방장아저씨는 사장님과 다른 말을 했다. 전 주인은 음식 재료의

대부분을 새벽같이 시장에 가서, 싸고 싱싱한 것으로 사왔지만, 지금

주인은 모든 것을 배달로 시킨다고 했다. 가격이 비싸고 야채는 질이

떨어져서 버리는 것이 많았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대로 다듬는

데 손이 많이 가기에 피곤했다. 전 주인과 비교해 현 주인을 말할 수

없지만 우리식당을 위해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했다.

김 형은 자신이 떠돌던 넓은 세상에 비해 주방 안이 좁고 답답해 틈

만 나면 바람을 쐬러 뒷문으로 나갔다.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뒤에서 그

는 파도소리를 듣는지 몰랐다.

김 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식당이 늦게 문을 여는 토요일 아침, 주

방장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할 때, 김 형의 칫솔, 수건이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의 방문을 두들겨도 아무 소리도 없어 문을 열어보니

김 형이 없었다. 어디 바람 쐬러 갔나 생각하는데, 그의 짐이 없어진

것을 보았다. 짐이래야 낡은 검정색 여행 가방 하나와 회색빛 손가방

하나였으므로 언제든 가볍게 들고 나갈 수 있었다. 주방장 아저씨가 주

방으로 내려올 때 보니 뒷문이 반쯤 열려서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고 했다.

“문이라도 제대로 닫고 갈 것이지.”

없어진 물건이라곤 주방장 아저씨의 전기면도기 하나였다. 그 면도

기는 미스 홍이 지난 크리스마스 때 선물한 것이었다. 주방장 아저씨는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얼굴 가득 웃음을 감

추지 못했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는 틈이 나면 사용법을 잘 모르겠다고 이층으로 박 군을 데리고 올라갔

다 그가 사용하는 . 법을 모르기보다 다분히 자랑하려는 의도였다. 그

면도기 때문에 주방아저씨의 얼굴에서 털을 보기 힘들었다. 박 군은 속

으로 이러다가 머리에 있는 털까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김 형이

떠나는 것을 알았다면 기념으로 줄 수도 있었는데, 말도 없이 가져간

것이 주방장 아저씨는 서운했다. 잊어버린 면도기에 대한 아쉬움을 누

르며 한 마디 했다.

“추운 겨울이나 나고 나갈 줄 알았는데.”

주인아저씨만 잊어버린 면도기도 없으면서 혼자 흥분해서 욕을 해

댔다.

“오갈 데가 없다고 사정사정해 받아줬는데.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박 군이 보기에 떠날 사람은 떠나야 했다. 다만 그 때가 문제였다.

그는 제자리인 싱크대로 돌아가 크고 헐거운 짙은 분홍빛 장갑을 끼고

혼자 접시를 닦았다. 그리고 수지엄마는 이상하게 도와주지 않았다. 말

이 없는 수지엄마는 한 번 쓰러지고 나서 더욱 말이 없어졌다. 송 양마

저 말이 없어지고, 제니만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와 깊게 가라앉는 주방

분위기를 흔들어 깨웠다.

송 양은 주인아줌마 몰래 코트 안자락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정종

병을 급하게 건널목을 뛰어 건너느라 떨어트렸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차도 바닥에 부닥쳐 산산조각이 났다. 신호가 바뀌는 것을 보며 서둘러

건너 뛴 것이 잘못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는

데, 그녀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가급적이면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구해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시청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결혼식을 올리

고 싶었다. 증인이자 들러리로 미스 홍에게 부탁하고, 그들의 결혼을

식당 식구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면 미스 홍은 입이 무거워 아

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 들러리로 박 군에게 부탁하면

주방아저씨와 친한 박 군이 아저씨에게 말할지 몰랐다. 그러나 주방아

저씨에게는 언젠가 그녀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그것이 최소한도

의 지켜야할 예의였다.

미스터 김은 영어도 잘하고 일본 말도 잘해, 영주권만 받으면 쉽게

직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명문 대학을 나왔기에,

공부를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아버님이 큰 사업을 하

신다는 데, 그가 착한 여자를 만나 떠도는 생활을 청산하고, 마음잡고

공부한다면 언제라도 돈을 부쳐주신다고 했다. 아니 박 군의 말에 의하

면 여기는 미국과 달라 대학 수업료를 정부에서 보증을 서서 은행에서

융자를 해준다고 했다. 두 사람의 생활비 정도는 그녀 혼자의 힘으로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자립정신을 안다면 서울에서도 요즘

보기 드문 여자라고 기뻐할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

해 그가 오랜 방황을 한 것이었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방에 불이 꺼져있는 것을 보면 방

이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처럼 땅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한 탓인지 그는 늘 방뿐만 아니라 얼굴 가득 환하게 불을

단편소설 부문 91

키고 기다렸다 김 . 형은 늦은 밤에 어둠을 헤치며, 지친 몸을 끌고 돌아

오는 여자를 위해 등대가 됐다.

송 양이 길을 돌아서서 자신의 방을 보았을 때, 불빛이 보이지 않았

다. 반 지하실 방이어서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불빛은, 어두운

길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오늘 따라 쌓인 눈을 밟는 송 양의 발

이 유난히 시렸다.

언제부터인가 송 양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주방 구석에 입을 다물

고, 고장난 냉장고처럼 서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헤프게 웃어 주방

안을 떠돌던 웃음소리마저 사라졌다. 웃지 않는 송 양은 송 양이 아니

었다. 남들이 하는 말에 내용도 모르면서 끼어들던 그녀가, 말하는 자

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 좋은 주방장 아저씨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박 군과 미스

홍은 돈을 모아 그에게 전기면도기를 선물했다. 박 군의 제안에 미스

홍은 그가 마치 대단한 발견 내지는 발명이라도 한 것처럼 감탄과 함께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자신감을 얻은 박 군은 제니 앞에서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왜?”

두말 않고 돌아서는 제니의 등을 보며, 박 군은 지극히 실망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너무도 사람을 잘못 본 자

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면도기를 받아든 얼굴에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떠나기 며칠 전 이번

에는 잡탕찌개를 놓고, 주방장 아저씨와 박 군 그리고 미스 홍까지 앉

아 술을 마셨다. 늘 마시던 맥주대신 미스 홍이 특별히 사온 Canadian

Club을 마셨다. 아저씨는 술이 쓰다고 했지만 달게 마셨다. 서너 잔의

양주에 이내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저씨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

고,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불렀다. 아저씨의 눈은 웃을 때뿐만 아니

라 노래를 부를 때도 보이지 않았다. 박 군은 술잔을 앞에 놓고 병아리

가 물을 마시듯,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입에 대지 못하는 불그스레한 얼

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저씨는 평소 마시던 맥주와는 달리

독한 술에 취해 그런지 주책없이 말했다.

“박 군아! 미스 홍은 좋은 여자다.”

그 말을 몇 번 되풀이 했는지 몰랐다. 박 군은 술보다 그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나야 때를 못 만났지만,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공부해라. 캐나다가

제일 좋은 것은 교육제도라고 하지 않냐?”

그 말을 하고나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그는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배우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 목표를 이루고 못 이루고는 나중 문제야. 이민자는

도망자가 아니라 도전자이거든.”

박 군은 도전이라는 추상명사는 아저씨 입에서 나와야할 단어가 아

니라 자신의 입에서 씩씩하고 용감하게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특히 미스 홍이 듣고 있는 앞에서 그랬다면 그 단어는 차돌처럼 단

단한 돌이 되어 , 그의 가슴에 박힐 것 같았다. 결국 그 자신이 일학년

일학기를 끝마치고 학교를 그만 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것이

나 다름없었다. 그는 부닥쳐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부닥쳐야 했

다. 미스 홍은 아저씨의 말에 감동을 받은 듯,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참! 눈물이 헤픈 여자였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그렇게 목말라 하는 정

이 많은 여자였다. 박 군은 미스 홍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너무

예뻤다.

아저씨는 미스 홍의 눈물을 미처 보지 못했는지 다른 말을 했다.

“송 양에게 잘 해줘라. 너희는 부모형제가 있지만, 송 양은 혼자 아니

냐?”

그날 밤 미스 홍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고 박 군은 아저씨 방에서

잤다.

아저씨는 떠났다. 말을 바꾼 주인이 싫었고 왠지 속은 것 같은 느낌

이 들었지만 칼처럼 맺고 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 사장이 한국으로 돌아간 주방장에게 취업연장이 확실한 것처럼

말한 이유는 혹시라도, 그가 다른 식당으로 갈까봐 한 말이었다. 주방

장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조용히 떠났다. 이미 그들은 다른 주방장을

구해 놓았고 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때를 맞추어서 캐나다에 왔다. 홀

안이야 자신들이 교대로 지킨다 해도, 주방 안도 믿을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 좋았다. 전 주방장은 일은 그런대로 하는지 몰라도 음식재료가 나

쁘다고 불평이 많았다. 이 사장의 생각에는 음식은 만드는 솜씨에 달린

것이지 재료는 다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방식구들의 일하는 시

간이 너무 길다고 자신이 주방의 대표나 되는 것처럼 불평을 했다.

새 주방장이 왔다. 그는 주인아줌마의 친척이라고 했다. 주인아줌마

에 의하면 한국의 유명한 ○○정, ○○관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지만

의심스러웠다. 오랜 시간 한국의 유명한 식당에서 일을 하고 주방장이

되기에는 나이가 젊어 보였다. 박 군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그

가 칼을 다루는 태도에서였다. 전에 주방장아저씨는 자신이 쓰는 칼을

마치 신주단지 다루듯 했다. 박 군은 주방장 아저씨가 주방 일을 가르

치며 한 말이 생각났다.

“주방일은 칼로 시작해 칼로 끝나느니라.”

갑자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순식간에 자란 하얀 수염을 쓰다

듬으며 말했다. 그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잠시 자리를 떠났던 사실을

사과하듯, 자신이 처음 일을 배울 때, 주방장의 손에 붙어서 움직이는

칼이 신기해 몰래 만졌다가 혼이 났다고 했다. 새 주방장은 칼을 한

번 쓰고 닦지도 않고 팽개쳤고, 때로는 그릇을 닦는 싱크대에 던져놓아

박 군은 칼에 손을 베일 뻔 했다. 그 한 가지로 박 군은 그가 엉터리임

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오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주방 분위기였다.

늘 화기애애하여 가족 같은 분위기는 사라지고, 썰렁한 분위기 속에 주

방장의 고함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다른 분명한 차이는 한국에 간 주

방장 아저씨는 아무리 오더가 밀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할 맛 난다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그는 들어온 순서대로 차분히

만들어서 내 보냈다. 늦게 온 사람들의 음식이 먼저 나갈 때, 먼저 온

사람들이 기분 나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일행의 음식이 같이

나가야지 다른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했다. 한 번은 대여섯 명의 손님이

왔는데 음식이 다 나오고 한 사람 분만 안 나와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

고 있었다. 미스 홍이 이유를 물었더니 목사님의 음식이 안 나와 다른

손님들이 먹지도 못하고 국물이 다식도록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사장은 이제 주방에도 믿을 만한 사람이 들어와, 그 동안 미루었

던 휴가를 생각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마음껏 마시고, 먹고 그리고 이

추운 겨울에도 골프를 칠 수 있다는 도미니칸 공화국에서의 골프 휴가

를 생각하고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식당은 손님을 끌어들이기는 어려워도 잃어버리기는 쉬웠다. 어느새

음식 맛이 아니라는 소문과 주방장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손

님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었다. 소문에 살고 소문에 죽는 것이 동포를

상태로 한 사업체였다.

식당을 가장 먼저 그만 둔 것은 뜻밖에도 미스 홍이었다. 인내심이

많고 주인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던 그녀였기에 식구들은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취업으로 온 주방장과 그녀와의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주인아줌마가 미스 홍에게 자존심

을 건드리는 인격모독적인 말을 했다고 했다. 박 군이 보기에 나이 차

이도 차이였지만 성격의 차이가 불과 물이었다. 그리고 미스 홍은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정은 많아도 누구보다 사리판단이 분명한 여자

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간 주방아저씨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새 주방장이 아니었다면 한국에 돌아간 아저씨가 아직도 주방

에서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스 홍은 배가 고파 주방에 들어오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미스 홍아! 찌개 먹을래?”

그것은 메뉴에도 없는 아저씨의 특별 메뉴를 말하고 있었다. 점심시

간에 팔다 남은 재료를 모아 만든 것인데 맛이 기가 막혔다. 박 군은

‘잡탕 찌개’라 불렀다. 제니는 ‘찌꺼기 찌개’라고 먹지 않았다.

미스 홍이 마지막이라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박 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놓았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서 있었다. 미스

홍이 주방문을 나간 한참 후에야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뛰어나갔다. 아직은 겨울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월의 밤이었다. 밖에는 이 겨울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려 미스 홍이 지나간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박 군은 저만치 멀어져 가는 미스 홍을 불렀다. 여자는 뒷모습이 아름

다운가?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뒷모습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

다웠다. 목이 메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녀는 멈추어 서지

않고 계속 걸어, 눈 속에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박 군은 계속 소

리를 질러 그 모습을 깨뜨리고 십지 않았다. 그때서야 박 군은 자신이

반팔 차림에 앞치마를 두룬 체 뛰어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웠다.

박 군은 영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매일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때야 깨달았다. 그는 주방에 누가 들어왔다 나갔는지도 몰랐고 한 쪽

구석에서 접시만 닦았다.

수지엄마가 그만 두었다. 아무런 이유나 변명도 없이 그냥 안 나왔

다 주인아줌마가 .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일주일분이 넘는 봉급이

깔려 있었는데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주인아줌마와 주인아저씨까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것은 오히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급기야는 서로 네탓이라

고 하며 아줌마와 아저씨가 주방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음성을 높이며

싸웠다.

이제 식당은 매일 가면 새얼굴이 있었다. 박 군에게 우리식당은 이제

더 이상 우리식당이 아니었다. 종업원이 자주 바뀌는 식당은 좋은 식당

이 아니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일하러 나온 첫날, 주방장이 말을 함부

로 한다고 앞치마를 풀어 던지고 나가버렸다. 송 양의 헤픈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주방장 아저씨의 따뜻한 웃음도 떠나고, 미스 홍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주방은 소리도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온타리오 호

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박 군은 접시를 깨먹었다. 그것도 식당에서 쓰는 것 중에 제일 큰

것으로 새우튀김이나 팔보채 같은 요리를 담는 그릇이었다. 가장 자리

에 그려진 꽃무늬가 고급스러워 보여 접시만 봐도 비싼 요리가 담겨

있다고 말해주었다. 한 번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대충 닦는 것이 아니

라 서너 번 정성들여 닦았다.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산산

조각이 났다. 박 군은 갑자기 미스 홍이 생각났고 주방장 아저씨가 생

각났을 뿐, 접시가 무거워서 떨어트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온 주방 바

닥에 흩어진 것이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내팽개친 것 같았

다. 하얀 접시조각을 주우며 깨어진 꿈의 조각을 줍고 있었다. 박 군은

떠날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학교로

98 재외동포 문학의 창

돌아갈지 몰랐다 공부해서 . 성공하여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목표를 세우고 도전을 하고 싶었다. 만약

에 가로 막고 있는 벽이 있다면 온몸으로 부닥쳐 보고 싶었다.

식구들은 이제 모두 떠나고, 송 양만이 남아 주방기구처럼 서 있었지

만, 그녀는 접시가 깨지는 것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웃음

을 찾게 되면 그녀도 웃으며 떠나리라. 아니면 그녀는 또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