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집안땅을 가다

7층 계단식 돌무덤 장군총 "동양의 피라미드를 보는 듯"

◇ 겨울 만주기행의 의미

▲ 고구려 제2도읍인 '집안'의 장군총 모습.
내가 겨울만주기행을 감행하게 된 것은 남다른 데 있었다. 2000년대라는 새 천년의 첫해 첫날을 만주땅 환인시에 있는 오녀산성에서 맞이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가 늘 맞이하는 남한땅의 해맞이란 동해의 경포대나 호미곶에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인데, 나는 만주땅 고주몽이 대고구려 개국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린 눈덮인 그 오녀산성(고구려 첫도읍지)에 올라 바닷가 아니라 고조선시대부터 오천년 역사를 굽이쳤던 비류수를 내려다 보며 줄달음치는 산맥 위에 뜨는 새 천년의 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겨울만주기행은 인천 국제여객선터미널로 가서 중국 단동으로 가는 동방명주호를 타고 가 단동에 도착, 다시 집안으로 가서 환인을 밟는 수순이었다.

집안에 다와 갈 무렵이었는데 정말이지 현대문명이 발달된 밝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시간 속 흑백세상으로 잠식해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온통 눈풍경 뿐이었다. 또한, 지도상에서는 혼강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 비류수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도읍인 환인시가지를 관통해 집안쪽으로 흘러와 압록강과 합류하는데 전혀 문명이 끼어들지 않아서인지 전혀 상하지 않은 커다란 생선이 푸들거리는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비류수는 내 애인처럼 내 왼쪽에서 팔짱을 낀 채 따라 붙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그전에는 분명히 이 강을 만났을 때는 내 오른쪽 팔짱을 낀 채 함께 갔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단동에서 환인을 거쳐 집안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에 비해 지금은 단동에서 환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집안으로 가는 사잇길을 택한 셈이니 강 저쪽길이 아니고 강 이쪽길이 되어버린 셈이다.

9시간을 거의 달려온 시골버스가 교량 하나를 지날 즈음, 천지가 흰눈으로 덮힌 이 추운 겨울날 흑까마귀 한 마리가 빙빙 돌며 강산위를 날으고 있었다. 이는 분명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집안땅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그 삼족오(三足烏)가 1600년이 지난 오늘에 거기서 나와 부활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 흑까마귀가 찬란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해속에 그려져 있고 두꺼비는 달속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 해는 남자가 받쳐들고 있고 달은 여자가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흑까마귀가 눈덮인 비류수 위를 날으며 내가 가는 길의 비류수 강을 훤히 열어주고 있었다.


◇ 장군총을 가다

▲ 집안 시가지를 달리는 리어카 인력거의 이색적 풍경.
시간으로 따지면 장장 9시간 반을 달려왔다.「집안빈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튿날이 정확히 말하면 1999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날이다. 그 다음날이 2000년 1월1일 신정으로 금요일이긴 하지만 오전 업무나 휴무를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12월 31일, 미리 대기해 있는 승합차에 오른 우리 일행이 미끄러운 눈길로 찾아간 곳은 동방 최대의 금자탑이라 불리우는 장군총이었다. 오회분 고분이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이 모두가 몇 분 거리안에 놓여있었는데 아직 비포장도로의 농가집들이 들어서 있고 과수원 옥수수밭들과 함께 고구려 시대를 재현해 주는 모습들이었다.

장군총은 7층 계단식 큰 돌로 쌓은 무덤으로 그 위엄은 대단했다. 찾아가는 길 도중에도 유난히 장엄하게 눈에 띄는 모습은 피라밋을 연상시켰다. 바로앞 넓은 주차장까지 승합차가 다가갈수록 그 장엄함은 더욱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왔다. 연말연시 휴무라 철문을 굳게 닫아놓고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하는 청년이 부르니까 중년을 훨씬 넘긴 수위가 허름한 촌노의 복장으로 나왔다. 그래서 뭐라뭐라 말을 건내니까 문을 열어 주겠다는데 관람료 때문에 한참을 흥정했으나 직업정신이 투철한 그 수위는 좀처럼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아 간신히 75원에 흥정을 하고 들어갔다. 장점은 관람객이 우리 일행밖에 없다는 것. 평소처럼 50~60명의 드나드는 인파에 밀릴일 없이 유유자적하게 둘러볼 수 있다는 게 아주 좋았다.

천하의 명당이라도 주인없고 돌 볼 이 없다면 이 또한 덧없는 법. 거기다가 이곳에 안장되었던 이의 시신마저도 증발 당하고 없으니 이보다 더한 회한 어디 있겠는가. 죽은 자는 말 없다지만 그러기에 시신이 간 곳마저 모르니 더욱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밖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군을 둘러 보았으나 둘러싸인 산능선도 말이 없고 이 앞을 흐는 압록강도 말 없음을 어찌하랴. 장군총을 보고 나오는데 아침부터 두부장수 아주머니가 눈내려 미끄러운 길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두부장수 아주머니! 서민들의 삶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풍경을 이곳에서도 보여주는 풍경 하나로 비쳐졌다.

◇ 광개토대왕비를 찾아서

▲ 집안 광개토대왕비 앞에 선 서지월 시인(위쪽)과 고구려 고분벽화를 디자인 한 티셔츠.
정확히 말해서 12월 31일, 묵은 천년의 마지막 해 마지막 날, 새 천년의 첫날을 맞기 위해선지 이곳 대부분도 휴무에 들어갔으며 식당들만 영업을 하고 있을 뿐 그런 조용한 거리 풍경이었다. 장군총을 나온 우리 일행은 광개토대왕비를 향했다.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우리가 빌려탄 승합차로는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산과 들에는 그대로 흰눈이 덮혀있었으며 길은 눈이 쌓이고 쌓여 미끄러웠다. 휴무인 날 찾아왔으니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평소에는 하루에 수백 명도 더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돼 버렸는데 얼신거리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을 가이드하는 집안빈관의 조선족청년이 말해서 간신히 들어갔는데 그 안 수위실에는 노부부가 지키고 있었다. 마침 젊은 안내원들도 휴무라 다 집으로 돌아가고 노부부도 입장료 받고는 추워서 수위실 문 닫고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맘대로 사진과 비디오로 근접촬영까지 하며 요행히 우리들만이 누리는 특권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광개토대왕 비문을 내 솥뚜껑 같은 큰 손으로 몇 번이고 어루만지며 돌의 체온을 한참 느꼈던 행운도 가졌다. 동북공정 이전의 일로 동북공정 이후는 대형 유리문으로 사방을 막아놓아 이젠 손으로 어루만진다는 건 상상밖의 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휴무인 12월 31일, 이곳 광개토대왕비를 보러온 사람은 한국에서 간 우리 일행 4명과 조선족청년 다섯명 뿐이었다. 오전의 엷은 겨울햇살 아래 1600년전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비석 앞에서 만난 기쁨인 것이다. 저 햇살은 어김없이 돌아와 비치건만 돌에 새겨진 고구려인들의 혼은 말이 없으니 역사는 지나가는 바람이었던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이 웅혼한 광개토대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제위 3년(414년)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6.39m 무게 37t의 세계 최대의 비석이리 한다. 새겨진 글자 한 자 한 자 크기는 손바닥만하게 크게 새겨져 있으며 사면을 돌아가며 빽빽하게 새겨놓은 글자수는 무려 1775자인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수는 1590자 정도다.

신라, 백제, 일본을 복속시킨 것은 물론 후연 숙신 등 중원대륙에 있던 북방민족들까지 전부 속국으로 만들었던 대고구려였다. 북으로는 몽골지역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이런 업적이 잘 나타나 있는 광개토대왕비인 것이다. 「삼국사기」보다 700년이나 앞선 기록으로 이 비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역사서와 다름 없는 귀중한 사료로 전한다. 주몽이 환인땅 홀승골성(현재 오녀산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후 그의 아들인 제2대 유리왕이 제위 22년에 이곳 집안땅으로 도읍을 옮긴 이래 제19대 광개토대왕까지 400여년간 찬란한 고구려역사의 위용을 자랑해 왔던 곳,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39세의 나이에 아깝게도 눈을 감고 그의 아들 장수왕은 대왕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흠모정신이 이 광개토대왕비 제작의 크나큰 기여가 된게 아니었을까.

비문내용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면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위업과 영토확장 그리고 묘지를 지키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다행이 이곳 일대는 청나라가 200여년간 봉금제를 실시해 사람들이 살 수 없는 허허벌판 그대로 버려진 곳이 되어 그나마 고구려 유적들이 훼손이 덜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만큼 발견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에 이끼와 흙먼지가 뒤덮였다고 한다.

참으로 위험했던 일은 일본인 사카와 포병 중위가 의사로 위장해 들어와 이 비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일본은 이 광개토대왕비를 귀중하게 여겨 일본군함을 동원해 반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1600여년이 지난 날까지 광개토대왕비가 있었던 것도 모른 채 우리는 무얼하며 지냈다는 말인가. 엄연한 우리의 것인데 일본인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으니 낯 부끄러운 일이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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