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氷谷

6장 붉은 홍수



3


최복만은 술 한 병에 북어 두 마리를 들고 은파강나루터로 찾아갔다.
사공인 오 영감이 거처하고 있는 나루터 기슭의 자그마한 움막에는 희미한 등불 빛이 쥐구멍만한 들창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른다리를 저는 오 영감은 벌써 십여 년째 은파강 나루터에서 배를 저어 생계를 유지해왔다.
어제부터는 은파강이 완전히 풀려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강물이 완전히 풀릴 동안 외부출입을 못한 채 기다려야만 했었다.
쏴아- 쏴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은파강 물결은 봄이 되었으니 이젠 여름도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듯 신바람 나게 흘러간다.
복만은 어둠 속에 묻힌 나루터 주위를 깐깐히 둘러보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강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찢어진 창호지 구멍으로 등잔불 앞에 마주앉아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고 있는 수척한 오 영감의 얼굴이 보였다. 출입문에 드리운 한 장의 거적이 강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성 지게라우?”
“누군가?”
“복만이구먼유.”
“자네가 어쩌다가 여길 다. 어서 들어오게나.”
움막 안은 허리를 펼 수도 없을 만큼 천장이 낮았고 온돌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큼 비좁았다. 그래도 오 영감은 구석 쪽으로 들어앉으며 손바닥만큼의 자리를 드텨준다.
“앉게나. 한밤중에 무슨 일루?”
“집에 있장께 속이 답답혀서 성캉 쇠주나 한잔 헐려구 나왔지라.”
“그래?”
술이라는 말에 오 영감은 귓구멍이 번쩍 뚫리는 모양 반색했다. 헤벌쭉 벌려진 그의 입 안에서 다 빠지고 몇 대 남지 않은 누렇게 삭은 이가 드러났다. 술이라면 말만 들어도 취하고 지고가라면 못해도 먹고 가라면 한 동이라도 통째로 마시는 영감이었다. 한 번은 술을 잔뜩 마시고 노를 젓다가 나룻배를 강물 속에 뒤집어엎어 배 안의 사람들을 죄다 은파강에 처박아 넣은 적까지 있었다. 다행히도 장정들뿐이어서 저마다 헤엄쳐서 기슭으로 나왔기에 망정이지 큰 인명사고가 발생할 뻔했었다. 그 자신도 동네 청년이 구해주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었다.
“이 동숭매가 지 손구락으로다 담근 술이지라우. 술맛이 괜찮을 팅께 쬐깨 맛보드라구.”
실은 한상권을 위해 빚은 술이었다. 그러나 청산 때 그 술마저 압수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던 것이다. 복만은 술만은 받아 두었다가 오늘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음. 어디 맛 좀 보세나. 자네 술 빚는 솜씨야 강촌마을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잖은가! 그래서 촌장도 늘 술빚을 땐 자네만을 부르곤 했었지.”
오 영감은 군침부터 삼키며 무릎걸음을 하여 술병 가까이로 바싹 다가앉았다.
술병뚜껑을 열던 복만은 촌장이라는 말에 문득 저 은파강물에 빠져죽은 한상권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변으로 나올 때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가 익사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만 생각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한상권의 남은 식구들을 마을에서 빼돌려 고향 전라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자식사이에, 형제자매간에 생이별하는 아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나리한테 입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 것인가. 그러나 넷이나 되는 식구들을 동네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나 마을에서 빼돌리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발각이라도 되면 그 자신이 지주집식구들을 빼돌렸다는 죄명을 쓰는 건 둘째고 마님과 아가씨들 그리고 막내 도련님께 돌아갈 구박이 더 커질 것이기에 각별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만 권하지 말구 아우도 좀 들게.”
“지사 머시냐 기양 묵들 않습디여. 성이나 어여 흐끈 드이소.”
복만은 놋그릇에 술이 곯기 바쁘게 연거푸 그득그득 따랐다. 오 영감이 어서 빨리 취해야만 그의 오늘밤 거사가 성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 영감은 오랜만에 만난, 게다가 공짜 술이라 주는 대로 사양 않고 게걸스레 마셔대고는 금방 혀 꼬부라든 소리를 해댔다.
“아우는 정말 술 빚는 솜씨가 대단하이. 옛날 황제나 신선들도 이런 술은 맛보지 못했을 걸세. 허허허. 대단하이!”
영감은 똑바로 앉지 못한 채 상체를 앞뒤 또는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밖의 나루터에서 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짜놓은 각본이었다.
“할아버지, 강 좀 건네주세요.”
한상권의 맏딸 한영자였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깔아서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야밤삼경에 웬 손님이야. 제밀할!”
오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선 자리에서 두어 번 비틀거리다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졌다.
“성. 고마 누지게라오. 이 동숭이 퍼뜩 거네주고 올 팅께.”
“그래 고맙네. 열쇠가 여기 있으니 가지고 나가게.”
오 영감은 창문턱에 놓아둔 열쇠를 건네주었다.
복만은 열쇠를 손에 쥐자 허둥지둥 움막을 나왔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나루터에는 벌써 마님과 두 아가씨 그리고 막내 도련님이 나와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복만은 어둠 속을 더듬어 쇠말뚝에 비끄러맨 쇠사슬의 자물쇠를 열었다. 강바람이 어찌나 세찬지 그의 상체가 배 위에서 휘청거렸다.
“마님, 어여 배에 오르이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부축해서 배를 태웠다. 그들은 저마다 자그마한 보퉁이 하나씩을 들었을 뿐 무거운 휴대품은 없었다. 청산 때 식구들 몫으로 그릇과 수저를 하나씩 남기고는 가재家財를 죄다 농민협회에서 압수해갔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재산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입고 있던 비단 치마저고리마저 벗겨내고 낡은 베치마저고리를 입혀서 쫓아냈었다. 그 보퉁이에 싼 것들은 죄다 최복만이 청산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대신 감춰둔 것들이었다. 마님과 아가씨들의 비단 치마저고리 한 벌씩과 한상권의 한복, 마고자 그리고 패물함과 금반지, 팔걸이, 회중시계와 금제만년필, 은비녀 등 돈이 될 만한 보물들을 미리 챙겨서 감춰두었다가 농민협회 몰래 슬그머니 한상권의 집에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것들이 있어 노자 장만 근심은 덜 수 있었다.
강을 건너자 복만은 7살 난 막내 도련님을 등에 업고 앞장서 걸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한길을 버리고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읍내에도 기차역이 있었지만 아침에야 차가 있는데다 아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아서 그냥 은파시내로 나갈 작정이었다. 은파역까지는 하남읍에서도 20리가 넘었으므로 걸음을 다그쳐야 했다. 그러나 논둑길이라 좁고 울퉁불퉁한데다 밤이어서 여인네들은 걷기 힘겨워 했다. 더구나 부잣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란 여인네들이라 금방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그러나 단 한걸음도 지체할 수 없었다. 혹여 농회나 민병들이 그들이 도주한 걸 눈치라도 채면 곧장 뒤를 쫓아와 덜미를 잡을 터이기 때문이다. 은파역에 가서 기차를 타기 전에는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두 아가씨는 탈진한 나머지 자꾸만 논두렁 위에 주저앉곤 한다.
“아가씨들 이라먼 앙그 되는 겨. 기운얼 내사 쓰지라우. 사램덜이 뒤럴 쫓아오기락또 하먼 그땐 후회혀도 씰데 없어라우.”
복만이 연신 독촉해서야 영자와 영희는 간신히 땅바닥에서 기어 일어났다. 서로들 어깨를 의지하고 걸었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영자와 영희는 홀짝홀짝 울기까지 했다.
자정 무렵에 떠났는데 무려 여섯 시간이나 걸린 뒤인 아침 6시에야 겨우 은파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차는 놓치고 할 수 없이 일곱 시 차를 기다려 승차했다.
복만은 그녀들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여인네들은 떠나는 열차의 차창에 매달려 그를 향해 손을 저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복만은 눈물이 시야를 가려 그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부디 잘들 사이다.”
목이 메었다.

일행은 열차를 타고 국경도시인 ㄷ시까지는 별 탈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두만강교두보에는 이미 국경초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경비병들이 총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두만강 건너편의 북조선 내무서內務署에서 월경자들을 일률로 검문, 단속한다는 소문을 귀동냥한 일행은 삽시에 공포감에 휩싸였다. 저쪽에서라고 지주의 가족을 환영할리 없기 때문이었다.
“검사가 심하다니 아무래도 다리로는 월경이 어려울 것 같구나. 어디 다른 곳으로 가서 배가 없는지 알아보자꾸나.”
한상권의 아내 문씨는 두 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기슭을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남자들이라면 상류 쪽의 옅은 여울목을 찾아 도강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뿐인데다 일곱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애까지 딸린 그들에게는 그건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10여 리쯤 내려가니 키를 넘는 무성한 갈대밭이 나타났다. 강 중간에서 중년 사공이 고깃배를 타고 어망을 치고 있었다.
“아저씨, 제발 좀 도와주세요. 어린애아빠를 찾아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저희들 강을 좀 건네주세요. 삯전을 후하게 드릴 테니까요.”
사공은 기슭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여인네들과 어린애임을 확인하자 안심이 되었던지 말없이 배를 저어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어깨에 커다란 도롱이를 걸친 사내는 얼마나 줄 거냐, 어디서 오느냐 묻지도 않고 그냥 그들을 배에 오르라고 손짓을 했다. 남루한 옷차림을 보아 사내의 가정형편도 궁색한 모양이다.
문씨는 보퉁이 안에서 마노 팔찌 한 쌍을 꺼내어 사공에게 건넸다. 사공은 뜻밖의 보물을 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두말없이 받아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기잡이 보다는 월경자들을 건네주고 챙기는 삯이 짭짤한 모양이다.
배는 잠깐 사이에 북쪽 대안에 닿았다.
정작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에 발을 딛긴 했으나 앞날이 막연하기만 했다. 뒤에는 소용돌이치는 두만강이 흐르고 앞에는 하늘을 찌르는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말이 조국이지 그녀들에게는 전혀 낯선 곳이었다.
마을과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인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도 구해야 했고 패물을 팔아 노자도 마련해야 기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 여인이, 어린애까지 데리고 산길을 타고 전라도까지 걸어간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산자락 밑에 자그마하고 초라한 동네 하나가 나타났다. 스산한 거리엔 건조한 봄바람에 쓰레기들만 뒹굴어 다닐 뿐 행인조차 볼 수 없었다. 건물의 벽들과 전봇대, 지붕 위에는 생소한 혁명구호들이 나붙어 있었다.
마을에서 좀 동떨어진, 벼랑 밑의 오막살이집에 찾아들어갔다. 백발의 늙은 할머니 한 분과 아들인 듯싶은 중년사내가 저녁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한창 식사 중이었다. 삶은 콩깻묵과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잣국이 전부였다. 방 안의 살림살이란 건 때오르고 누덕누덕 기운 이불 두 채와 장롱 하나뿐이었다.
“만주서 나오는 사라들임둥?”
중년사내는 한두 번만 겪어본 일이 아닌 듯 첫눈에 알아맞힌다.
“네. 애들이 너무 배고파하기에……”
“우리두 죽지 못해 살고 있스꾸마. 이런 거라도 괜찮다면……”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걸 좀 팔 수 없을까요? 이 밥값도 드리고 저희 노자로도 쓰려고요.”
문씨는 보퉁이 안에서 은비녀 하나를 꺼내어 중년사내에게 건넸다. 여위다 못해 뼈만 앙상한 사내의 눈이 은비녀를 보자 반짝 빛났다. 식사가 끝나자 사내는 그들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뜻밖에도 사내가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남양 내무서였다. 사내는 그들을 내무서원에게 넘기고는 어느 사이엔가 은비녀를 가지고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문씨는 내무서에 들어서는 순간 재빨리 보퉁이 안에서 회중시계와 금제만년필, 금반지 두 개와 마노 팔찌 몇 개를 꺼내어 막내아들의 조끼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다행히도 어른들의 몸은 샅샅이 뒤졌으나 막내아들 종학의 몸은 수색하지 않아 일부 패물을 건질 수가 있었다.
“물건들을 보니끼니 달 사넌 사람들이 틸림없구래.”
내무서원은 그들을 따로따로 격리시킨 다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어 단독심문을 시작했다.
문씨가 제일 먼저 불려 들어갔다.
면상이 기름하고 눈이 움푹 꺼진 내무서원이 그녀를 심문했다.
“여성동무래 만듀 어디메서 왔시요?”
평안도 억양이 강한 말투였다.
“은파시 강촌마을에서 왔어요.”
“거기설라무네 뭘 하던 사람들임메?”
문씨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주라고 이실직고하자니 강촌마을에서 당한 사회적 천시가 재현될까봐 두려웠고 거짓말을 하자니 후과가 두려웠다.
“뭘 하던 사람이냐구 묻디 않슴메?”
내무서원은 연필 끄트머리로 낡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그녀를 뚫어지게 박아보았다.
“농사를 지었어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말마디들이 토막 났다.
“농살 디었다? 농살 디은 사람으 손이래 이렇게스리 반반함메.”
내무서원은 연필 끝으로 그녀의 뽀얀 손등을 콕콕 찔렀다. 문씨는 가슴이 두근거려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남뎡네래 어드래서 보이디르 안씨요?”
“사……사망하셨어요.”
“어드러케 듀거씀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고향이래 어딤메?”
문씨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디뿌리래 하디 말구. 슬라므니 애시당초 솔픽허게 털어놓으시라요. 네 사람의 말이래 서로 어긋나문 금방 들통날거이께니.”
문씨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침묵을 지켰다.
“동무래 기만 바까테 나가 기다리시라요.”
문씨가 나온 뒤 두 딸과 막내아들도 차례로 심문실로 불려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막내아들 종학은 잠을 재우지 않고 철야심문을 들이대자 견디지 못하고 모든 사실을 죄다 털어놓고야 말았다.
문씨로서도 더 이상 신분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탄백했다. 이제는 가족의 생사를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내무서에서는 그들을 갑자기 불러내더니 도道내무서로 압송했다. 물론 보퉁이는 죄다 압수당했고 빈 몸으로 내무서원의 압송 하에 함흥 행 열차에 올랐다.
문씨는 이젠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비관, 실망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글렀고 아들 종수와 종철이를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두 딸 영자와 영희 그리고 종학은 2주야나 되는 철야신문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지라 모든 걸 체념한 채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유리가 파손된 차창 밖으로 허름한 오막살이 동네들이 지나갔고 토지를 분여 받은 농민들이 논갈이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민주개혁》,《산업국유화》,《20개 정강》, 《인민위원회》라는 표어들도 언뜻언뜻 보였다. 문씨는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혁명의 물결을 보고 이북에는 그들이 발붙일 한 치의 땅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장차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주가족인 우리를 인민정권은 도대체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졸음이 밀려들었지만 오만가지 잡념 때문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강촌마을에 그냥 남아 남편의 무덤 옆에 묻혔을 걸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열차가 나남역에 도착하자 갑자기 소련군 장병들이 나타나더니 승객들을 전부 하차하라고 강요했다. 문씨 일행도 승객들 속에 끼어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은 붉은 군대 장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민간인 승객들은 자그마한 역 대기실로 떠밀려 나왔다. 역무원의 안내에 따르면 열차가 내일쯤에 출발하니 승객들은 나남에서 하룻밤 숙박해야 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아녀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오늘의 열차는 긴급군용열차로 대용된 것 같았다. 이것이 잘 된 일일까 못 된 일일까?
승객들은 저마다 친척이나 시내의 여관을 찾아 뿔뿔이 대기실에서 떠나갔지만 갈 곳이 없는, 갈 수도 없는 문씨 일행은 그저 썰렁한 대기실장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때 그녀들 이곳까지 압송해온 내무서원이 문씨에게로 다가왔다.
“아주머니, 여기서 하룻밤 묵었다가 그냥 해주로 내려가세요.”
“해주라니요?”
내무서원이 불쑥 내던진 영문 모를 말에 문씨는 잘못 들은 거겠지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 도 내무서인 함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주는 황해남도 도청 소재지이고 또 38선이 가까운 국경도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더러 그 곳으로 가라니!
“황해도 해주로 내려가시라고요. 지주야 나쁘다지만 그 처자들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듣자니 지금도 해주에 가면 38선을 넘을 수 있다고 하니 그리로 가라는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들과 만나야 할 게 아닙니까.”
문씨는 그래도 반신반의했다. 공화국의 치안을 유지하는 내무서원이 지주가족인 그들더러 38선을 건너 월남하라고 풀어주다니?!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게 정말이세요.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만주에서 살다 온 사람입니다. 우리 아버진 박지주네 소작농이었는데 박 지주는 마음이 선량한 사람이어서 아주 가깝게 지냈거든요. 같은 지주라도 좋고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그럼 이거라도……고마운 뜻에서 드리는 거니 받아 주세요.”
문 씨는 막내아들 종학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와 금제만년필을 꺼내어 내무서원에게 건넸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금품이 탐나서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아주머니 가족이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제 진심을 물건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문씨는 목이 콱 메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눈물만 쭈룩쭈룩 흘러내렸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뒤 아무 소리도 없기에 고개를 들고 보니 내무서원은 이미 그 자리에서 떠나고 없었다. 문씨는 장의자에 늘어진 채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두 딸과 아들을 깨워 가지고 부랴부랴 역 대기실을 떠났다. 혹여 내무서원의 마음이 변해 그들을 찾으러 돌아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될 수록이면 사람의 눈길이 많은 번화가를 피해 한적한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우선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기에 잠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두만강변에서의 교훈이 문씨더러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했다.
어느 으슥한 뒷골목에 벽체가 허물어지고 지붕도 무너져 내린 폐허 한 채가 나타났다. 문씨는 자식들을 거느리고 그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집물은 죄다 도둑 맞히고 텅 빈 방이었다. 그래도 짚을 두툼하게 깔면 하룻밤을 지낼 만했다.
“어머니, 그 내무서원은 어디 갔어요?”
큰딸 영자가 이상한 듯 물었다.
“우리더러 38선을 넘어 월남하라면서 놓아 주구 가지 않겠니.”
“정말요?”
“그래.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만…… 아무튼 고마운 사람 덕분에 우린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구하게 되었구나. 하늘이 도운 거야.”
집 주변에 널린 볏짚을 주워 바닥에 두툼하게 깔았다.
“너희들은 우선 한잠 푹 자두어라. 엄만 나가서 먹을 걸 구해와야겠다.”
“어머니, 혼자는 위험해요. 저도 같이 가요.”
큰딸 영자가 자진하여 나섰다.
문씨도 사실은 이 낯선 고장에서 홀로 거리에 나가기가 두려웠던 차라 막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넌 엄마 따라 가고. 영희와 종학은 절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알겠니?”
영희와 종학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응대조차 없다. 며칠간의 기아와 피로가 어린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뭐라도 좀 요기를 해야 기운을 차릴 것이다.
문씨는 영자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선 전당포에 들러 마노 팔찌 한 쌍을 헐값에 팔았다. 그거면 해주까지 갈 노자와 식비는 될 것 같았다. 저잣거리의 음식가게에서 호떡 몇 개와 감자떡을 샀다. 그리고는 급히 저잣거리를 떠났다.
금방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등 뒤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고개를 돌보니 코가 우뚝 크고 눈동자가 새파란 러시아군인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두 여인은 그냥 골목길로 도망치려 했으나 군인이 어깨에 메고 있던 따발총(자동소총)을 내리더니 그들을 향해 겨눈다. 문씨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도망치려는 딸애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군인은 총을 겨눈 채 씨물씨물 웃으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영자는 엄마의 등 뒤에 몸을 숨겼으나 군인은 문씨의 어깨를 잡아당겨 옆으로 떠밀었다. 문씨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저만큼 나가 넘어졌다. 영자는 비명을 지르며 엄마한테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벌써 군인의 노란 털이 푸시시한 우악스러운 손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오체 크라시바! 다와이, 다와이!”
군인은 영자의 턱을 손으로 받쳐 들고 히죽거렸다.
영자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전신을 바들바들 떨뿐 공포에 질려 꼼짝을 못했다.
“이것들을 다 줄 테니까 제발 내 딸만 건드리지 말아 줘.”
문씨는 보퉁이 안의 회중시계며 금제만년필이며 반지들을 땅바닥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오우, 하라쇼우! 다와이, 다와이!”
군인은 입귀가 귀뿌리에 가 걸리며 땅바닥의 물건들을 주워 군복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젠 내 딸을 놓아주는 거지.”
문씨는 딸 영자한테로 다가갔다. 그러나 군인은 그녀의 덜미를 덥석 잡더니 저만큼 옆으로 내던졌다. 문씨는 무너진 벽체더미 위에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 망할 놈아, 금품까지 주었는데도 기어이 내 딸을 능욕할 테냐. 이 귀축 같은 놈!”
그러나 군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영자의 허리를 껴안아 가볍게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내 딸을 다치지 말아 이놈아! 이 짐승 같은 놈아!”
문씨가 생사결판으로 달려들었으나 번마다 군홧발에 채여 뒤로 벌렁 넘어졌다. 병졸은 총구를 문씨의 가슴팍에 들이대고 입으로 뚜르륵, 뚜르륵, 죽인다는 시늉을 했다. 총부리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군인은 수욕이 뻗쳐 황소처럼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영자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깃을 여며 쥐었으나 병사는 아예 저고리를 북북 찢어버렸다. 삽시에 영자의 하얀 알몸뚱이가 드러났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하늘도 무심하지. 아이고, 이 돼지 같은 놈아!”
문씨는 군홧발에 짓밟힌 가슴을 부여안고 땅바닥에서 뒹굴며 울부짖었다. 땅바닥을 벌렁벌렁 기어서 딸을 구하려고 다가갔으나 또다시 날아드는 군홧발에 허벅지를 짓밟히고는 모진 통증으로 정신을 깜박 잃고 쓰러졌다.
영자는 자신의 저항이 엄마에게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줄까봐 몸부림을 멈췄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엄마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엄마까지 죽는다면 그들 5자매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고 말 것이다. 순순히 제 놈의 수욕만 채워준다면 사내도 더 이상 엄마를 구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자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곰 같이 비대한 몸뚱이가 그녀의 가냘픈 몸뚱이를 미친 듯이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하신이 찢겨나가며 통증이 발작했고 땅바닥은 삽시에 피범벅이 되었다. 영자는 비명을 질렀고 사내는 키들키들 웃어댔다. 놈이 흘리는 침과 땀방울이 얼굴에 떨어질 때마다 그 고약한 누린내 때문에 그녀는 구토가 발작했다. 늑대 같은 이빨에 깨물려 입술이 터졌고 뜨거운 액체가 입 안에 그들먹이 차오르며 비린내가 풍겼다.
실신상태에 빠졌던 문씨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났고 병사는 씨물거리며 땅바닥에 널린 군복들을 주섬주섬 주워 몸에 걸치고 있었다. 군인의 호주머니에서 금반지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옷가지를 집어 가슴을 가린 채 허물어진 벽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영자는 군인 몰래 얼른 금반지를 주워서 손아귀에 단단히 거머쥐었다.
“이 귀축 같은 놈아! 백주에 이게 무슨 만행이냐!”
정신을 차린 문씨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군인은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이더니 혀를 널름 내밀고는 껑충껑충 폐허에서 나가 버렸다. 삼천리강산에 왜놈이 들어와 짓밟더니 그들이 겨우 물러가자 이번엔 또 러시아인이 들어와 짓밟다니! 문씨는 통탄했다. 이 나라는 왜 외국군대의 더러운 군홧발에 짓밟혀야 하는가. 삼천리강토가 도대체 누구의 땅인가! 원망과 울분뿐이었다. 저주와 증오뿐이었다. 힘없는 자는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할 곳이 없었다.
영자에게 무슨 불행이 덮쳐들었는지도 모른 채 자고 있던 영희와 종학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사다준 호떡과 감자떡을 게걸스레 먹어댔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식곤에 빠져 다시 잠이 들었다.
영자는 폐허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흑흑 울기만 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무서웠다.
“울지 마. 악몽을 꾼 셈 쳐. 엄마하고 너만 알고 누구도 모르잖아.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문씨도 적당한 위안의 말을 고르지 못하고 같은 말만 연신 반복했다. 그 수치스러운 능욕을 영원히 비밀에 붙여둔다 한들 어찌 영자의 가슴에 못 박힌 상처야 아물 수 있으랴. 그 상처는 평생토록 그녀의 가슴속에서 썩고 곪으면서 마음을 괴롭힐 것이다. 순결을 잃은 여자! 여자에게 그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으랴. 그녀는 자신을 절망에로까지 내몬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정조를 짓밟은 러시아군인이 저주스러웠다.
그 밤을 눈물로 지낸 문씨와 영자는 이튿날 아침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짓고 영희와 종학이를 깨워 길을 떠났다.
해주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했다. 마노 팔찌를 판 돈으로 음식도 배불리 사먹을 수가 있었다. 배도 부르고 잠도 충분히 잔 영희와 종학은 기운이 회복된 듯 말도 많아지고 얼굴 표정도 퍽 밝아졌다. 그러나 영자는 해주까지 도착하는 동안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내내 말 한마디 없었다.
해주시내에 도착한 그들은 어느 더럽고 누추한 여인숙에 들었다. 빈대, 벼룩, 바퀴벌레, 파리가 득실거리는 여인숙에는 얼핏 보아도 38선을 넘는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표정은 불안과 초조로 어두워 보였다.
이마가 홀랑 까진 대머리 영감이 그들이 투숙한 방 안으로 들어와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남쪽으로 건너 갈 분들이지유?”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문씨는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거짓말 마슈. 이 여인숙에 든 사람은 열에 아홉은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라우. 네 식구이니 이것만 내슈. 틀림없이 남쪽 땅까지 무사하게 데려다 줄 테니까.”
대머리는 구부정한 엄지와 식지를 펴보였다. 문씨는 그게 돈으로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10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영감의 말에 의하면 언제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한다. 하루라도 지체 말고 38선을 넘어야만 했다. 모험을 하지 않고 의심만 하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사람을 한 번 믿어보기로 작심했다. 게다가 열차에서 해주에 가면 돈을 받고 38선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는 손님들의 말을 귀동냥한 적도 있었다.
“아저씨, 혹시 이거면 안 되겠어요?”
문씨는 영자가 겨우 건져낸 금반지를 대머리에게 내보였다.
영감은 금반지를 받아 이로 깨물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튕겨보기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것은 사내가 생각지도 못한 횡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씨일가에게는 생사와 관계되는 문제였음으로 그런 걸 흥정할 경황이 없었다.
“오늘밤에 떠나도록 하지유. 준비하세유.”
대머리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실 준비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반지마저 줘 버렸으니 몸에는 노자와 식비로 쓰고 남은 돈 몇 푼과 입고 있는 옷 그리고 몸뚱이가 전부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대머리영감은 그들을 데리고 여인숙을 나섰다.
남산을 넘고 해주 시내를 벗어났다. 개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 걷다가 어둠을 타 길 옆의 숲 속으로 슬쩍 숨어들었다. 이제는 북쪽의 수양산도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자정이 될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야 돼유. 밤이 깊으면 경비병들의 순찰이 뜸해지니까 그때 손을 써야 되는 거지유.”
숲 속에 엎드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개미들이 옷 속을 파고들어 살갗을 물어 뜯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어린 종학이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대머리가 사정없이 그 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귀신이 되고 싶어 그래!”
삼태성이 기울자 드디어 대머리는 그들을 데리고 철길 둑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고 밤은 어찌나 어두운지 한치 앞도 가려보기 힘들었다. 대머리가 하는 대로 발소리를 죽이고 허리를 굽힌 채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갑자기 발목이 접질린 모양 종학이가 철길 둑 아래로 쭈르륵 미끄러졌다.
“누구야!”
어디선가 경비병이 부르짖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뛰시우. 50여 미터만 달리면 남쪽 땅이에요. 어서유……”
일행은 대머리의 뒤를 따라 숲 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남쪽을 향해 달렸다.
깊은 웅덩이 속에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풀뿌리에 걸려 뒹굴기도 하면서 헐레벌떡 남쪽으로만 달렸다. 등 뒤에서 눈먼 공포탄을 발사하는 총성이 몇 방 들렸으나 상한 사람은 없었다.

서울은 만주나 북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소련군 대신 미군이 거리를 활개치고 다녔고 우익과 좌익이 공존하며 혼란한 정국을 빚고 있었다. 거리에는 반공구호도 붙어 있고 반민족주의, 반일반미구호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문씨 일행은 일제시대의 지주나 순사들이 아무런 사회적 제재도 받지 않는 미군정통치하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신변위험 같은 건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문씨 일행이 고향인 전라도 남원군 산곡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서울에서 열차 편을 이용하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노자가 없어서 화물차를 타고 내려왔다.
어느새 면경찰지서장을 하고 있던 맏아들 종수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압씬 머땜시 함께 오들 않았습디여?”
종수의 첫마디 관심은 아버지의 생사였다.
“아버진……”
문씨는 설움이 북받쳐 뒷말을 잇지 못했다.
종수는 안타까운 듯 여동생 영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압씨가 어떻게 됐간디? 먼 봉변이락도 당헌 거여? 어여 말혀봐.”
영자는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 자신이 당한 불행까지 겹쳐 더구나 원통하여 엉엉 통곡했다.
“아버진 죽었어.”
막내 동생 종학이가 누나 대신 대답했다.
“머락꼬? 돌아가셨닥꼬! 머땜시로?”
“영식이 아빠가 은파강물에 밀어 넣어 죽였어.”
“영식이 아베라니! 그게 누군디?”
“덕구 있잖아요. 우리 집 소작농 최 서방 둘째 아들 말이에요.”
영희가 동생의 말에 상세한 설명을 달았다.
“그랴! 내 그럴 줄 알었당께. 그 덕구란 넘이 울 아벨 해 헐 줄을. 개자식! 그러잖여도 내 손부닥으로다 죽여비리들 못허구 온 게 후회된다.”
종수는 눈에 불을 켜며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이를 뿌드득뿌드득 갈았다.
“최 서방은 아버질 구하려고 하다가 그만…… 최 서방 도움이 없었다면 우린 널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아마.”
문씨가 드디어 마음을 진정하고 그 간의 사정을 소상하게 말했다.
“언제고 그넘얼 만날 때가 있겄제. 내 이넘얼 내 손으로다 직접 잡아 죽이기 전에는 눈얼 감들 않을 거야!”
종수는 분노하여 길길이 뛰었다.
종수는 월남 뒤 큰아버지 한상진이네 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고모도 산곡리에 함께 살고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늘 만주에 두고 온 부모형제 때문에 근심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만주 땅이 공산당 천하가 되었으니 지주인 아버지와 그 가족이 무사할리가 없었기에 늘 가족의 생사가 우려되었다. 그런데 끝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며느리도 너 때문에 투쟁 받다가 견디다 못해 자살했단다.”
“쩌런 망헐넘들! 기집헌티 먼 죄가 있닥꼬!”
종수는 사실 아내 이씨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었다. 고향에 돌아와 이미 숙희라는 여자를 새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경찰에 자원입대하여 지금은 지서장까지 하면서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기실 곱단의 생사였다.
“곱단이는요?”
“곱단이는 최 서방 며느리가 되었니라.”
“머락꼬? 덕구의 여편네가 되었닥꼬. 쩌런 미친년이! 어이 갈 곳이 없어서. 엄닐 따라서 남쪽으로 월남해두 그넘보담 나은 머시마헌티 시집갈 수 있을 틴디.”
아무튼 자기네 가정은 덕구네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으로 통분했다.
“내 그넘얼 길코 가만 두들 않을 거구만유.”
종수의 얼굴은 타오르는 분노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 사램언 지집 사램입이다. 숙희락꼬……”
종수는 문씨에게 키가 크고 예쁘장한 여자를 소개했다.
“울 엄니야. 인사드려.”
숙희는 문씨에게 공손히 절을 드렸다.
“너들 아무튼 고생이 많았다.”
문씨는 아들까지 만나자 극도의 긴장이 풀리며 전신의 맥이 삽시에 빠져나갔다.
만사를 뒤로 밀어놓고 한잠 푹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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