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氷谷

7장 그윽한 여름

1

낮 최고기온 섭씨 34.2 도. 곳에 따라 소나기 내림.
TV에서는 며칠 동안 계속된 찜통더위가 오늘도 이어질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방송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면서 폭염에 몸부림치는 도시를 떠나 서늘한 피서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도시인들은 게임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계곡과 물가를 찾아 떠나갔다.
더위는 아침부터 불볕을 거느리고 온도계를 섭씨 22도까지 끌어올리며 도시에 군림했다. 준호가 탄 택시는 구의동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거리를 행보하는 여성들의 옷차림은 차마 홀랑 벗지 못해 겨우 한 두 장만 걸치고 있다.
유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지은이도 밖에 나간 채 귀가하지 않아 혼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정말이지 유리한테서 먼저 전화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었다. 그녀의 모습은 가슴깊이 각인되어 체념 같은 지우개로는 지울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3호선을 타고 그녀가 살고 있는 일산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교분 역시 진옥의 경우처럼 제3자의 개입 때문에 지속되리라는 기대감은 포기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세대의 원한을 내세워 유리와의 만남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아버지의 태도에서 한종수의 강경한 반대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젯저녁 느닷없이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저 유리예요.”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너무도 뜻밖이었고 그 때문에 감동 또한 커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준호씨. 내일 따로 스케줄이 없으시면 저랑 등산하실 의향은 없으세요?”
늘 안개처럼 고요하고 아지랑이처럼 수줍음만 타던 그녀가 자진하여 데이트를 요청하는 결단력에 또 한 번 놀랐다.
“저야 뭐. 유리 씨만 가능하다면……”
느닷없이 한종수의 얼굴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노인이 손녀와 최덕구 손자의 동반등산을 허락할까, 그게 궁금했다. 성품이 순결하고 반듯한 유리가 할아버지를 속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준호는 지난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녀의 데이트 요청이 과연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진행시키고 어느 수위에까지 끌어올릴 것인가? 물론 우정 하나만으로도 등산의 이유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준호와의 동행에는 거짓말을 하든 강행하든 어떤 경우에도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불복이라는 반항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심성이 착한 그녀로서는 선택의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경을 감수하면서까지 모헌적인 데이트를 요청한 이유가 단순히 둘 사이의 평범한 우정 하나를 이어가기 위해서일까?
혹시 그녀도 날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비약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진옥을 사랑했다곤 하지만 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다만 그날 소낙비가 쏟아지는 은파강기슭의 버드나무숲에서 그녀가 옷섶을 헤치고 박속같이 눈부신 가슴을 드러내며 자신을 가지라고 했을 때 준호는 단 한 번 흥분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날의 흥분도 즐거움보다는, 달콤함보다는 우려와 공포에 타고 그을린 불안뿐이었다. 지난밤 그가 느낀 흥분은 봄날의 황홀한 꽃 바다 속에 잠긴 듯한, 구름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나는 듯한 그런 달콤한 흥분이었다.
택시는 정확하게 8시 50분에 구의동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유리 씨와 만나기로 약속된 동서울종합터미널 《만남의 광장》으로 들어갔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약속시간 보다 20분이 지난 뒤였다. 8시 30분에 도착하기로 했었다. 혹시 무슨 변동이라도 생긴 건가? 할아버지가……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준호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휴대폰 벨이 울렸다.
“네, 유리 씨.”
“차가 막혀서 늦어지네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운전 조심하세요.”
“이따 뵈게요.”
오기는 오는구나.
준호는 우선 안심이 된다. 오기만 한다면, 그녀와 만날 수만 있다면 한 시간 아니, 10시간이 늦은들 어떠랴 싶었다. 구태여 등산이 아니더라도 좋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녀와 마주앉아 이야기만 나눌 수 있어도 기쁠 것이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컵을 뽑아들고 벤치에 앉았다. 일회용 종이컵에 3분의 2쯤 담긴 커피에서 구수한 커피 향을 실은 가느다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준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 투명하고 파란 색깔의 증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피어오르는 아련한 모습이 유리 씨를 방불하게 해서였다. 물이 펄펄 끓어오르며 주전자뚜껑을 달그랑달그랑 뒤흔들며 쌕쌕 성급하게 뿜겨 나오는 김처럼 다기차고 박력 있는 지은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여유 있으면서도 매력 있는 모습이었다.
준호는 신문가판대에서 조간지를 사들고 읽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느닷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고 보니 바로 앞에 유리 씨가 서 있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의 콧등과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등산용 운동화와 청바지, 저고리를 입고 등에 배낭을 진 그녀의 모습은 오늘따라 유순함보다는 전에 없던 박력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결코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의 그 타고난, 온화한 분위기가 더 지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네요.”
“차는 주차했어요. 등산이니 만큼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멋스러울 것 같아서요.”
“그게 좋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등산 가신다는 분이 양복 입으시고 구두 신으시고……” 그녀는 미소를 지어도 두 볼이 발그레하게 홍조가 물든다.
“처음이라서……”
“그럴 줄 알고 제가 다 준비해 왔어요. 우리 이젠 버스를 타야죠.”
“어디까지 티켓을 끊으면 됩니까?”
행선지를 몰라 창구 앞에서 꾸물거리는 사이 유리가 어느새 승차권을 끊었다.
“홍천이에요. 서울에서 100km 정도 되니까 1시간 50분이면 도착할거에요. 공작산이라고, 홍천군립공원인데요 아직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곳이거든요.”
시외버스는 44번 국도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양평읍까지는 오른편으로 넓은 남한강을 끼고 달렸다. 팔당유원지를 지나 북한강하류를 가로지른 양수대교를 건너고 월계사와 구인사를 스쳐 양평읍에 이르고 거기서부터는 남한강과 갈라져 신내개울을 끼고 용문을 지나 다대리에 닿고 다시 청석휴게소부터는 오안천을 끼고 홍천강가에 자리 잡은 홍천읍에 이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할아버지가 저랑 등산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몰라요.”
“그럼 몰래 나오셨군요.”
유리는 대답 대신 얼굴만 살짝 붉힌다.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거짓말에 익숙하지 못한 듯싶다.
“나중에라도 알면 어떡하려고요?”
“전 다만 제 삶의 내용을 다른 사람의 의지대로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거짓말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할아버지를 속였다는 사실이 그분의 저에 대한 사랑을 배반한 것만 같아 마음이 괴롭기도 해요. 인생은 자신의 소유라 하더라도 많은 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권리를 양도하고 예속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녀의 고운 눈에 맑은 이슬이 반짝였다.
“저도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불효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공유이기 전에 사유이지요. 비록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라곤 하지만. 그래서 유리 씨처럼 할아버질 어른으로서 존경은 하지만 그것이 이유가 되어 윗세대의 그늘 밑에서 자신의 의지를 시들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럼 준호 씨 부친께서도 절 만나지 말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세대잖아요.”
“전 할아버지를 존경해요. 그분의 신념과 지조와 인생 전부를요. 그런데도 이번만은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게 되는 일이 이상해요. 존경이 순종 자체는 아닌가 봐요.”
진정으로 할 말은 그 뒤에 있을 텐데도 유리는 그쯤에서 화제를 지워 버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실개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읍스름한 강돌들이 들쑥날쑥 드러난 개울바닥으로 맑은 냇물이 쪼르륵 쪼르륵, 굴러 내리고 있었다. “윗세대의 그늘”이라는 표현을 어쩌면 “윗세대의 햇볕”이라는 말로 바꿔야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날의 준호와 유리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부모는 생명을 주신 하늘같은 분들이시다. 그러니 그분들에게 자식의 인생을 교정하거나 가르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은 아닐지. 그러나 할아버지 세대의 원한을, 전쟁의 그늘을 아랫세대에게까지 덮어씌운다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되었다. 희생의 제물로는 진옥이 한 사람으로도 과분하다. 인간사회가 전통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그 때문에 미래가 과거의 단순한 복제판이 된다면 자유는 한낮 꿈에 불과할 것이다.
북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덩이들이 밀려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며 준호는 곳에 따라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던 아침 기상예보를 상기했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비가 우리들의 만남의 시간을 줄이는 악재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유리 씨가 할아버지의 회고록 대필 요구를 거절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실례는 아니겠죠?”
시커먼 복부를 드러낸 그 구름장들이 전쟁의 화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려주었다.
“글쎄요. 거창하게 이유라고 할 만 한건 없고 다만 편견의 노예가 되기 싫었어요. 전쟁을 어느 일방적인 이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권과 평화와 민중과 시대흐름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할아버지한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인 만큼 타협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온 거예요. 그리고 전 저의 공부에만 몰두하고 싶어요. 동물의 세계에서 자연의 섭리를 발견하고 싶어요. 인간의 모든 욕망 즉 개인적 욕망과 집단적 욕망에서 해탈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할까?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집념 역시 일종의 욕망이 될 수 있다.
홍천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다된 점심시간이었다. 먹장구름은 어느새 하늘 전체를 뒤덮어 대지는 밤의 어둠이 드리운 듯 어두컴컴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서둘러야겠어요. 식사는 산에 올라가서 해요.”
홍천강가에 자리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노천리행 버스를 환승했다. 버스는 벌써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444번 국도를 따라 운행하기 시작했다.
“제발 큰비는 내리지 말아야 할 텐데.”
준호는 시커먼 하늘을 쳐다보며 걱정했다.
“아침 기상예보에서 소나기라고 했으니 지나가는 비일 거예요. 산에 가면 비나 눈을 맞는 편이 더 스릴 있고 기분이 좋잖아요.”
준호는 놀란 표정으로 옆 좌석에 앉은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유약해 보이는 그녀도 어떤 자극과 충동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면이 고요한 호수라고 하여 어찌 수심 깊이에 분출구가 없으며 수초가 자라지 않으며 물고기가 헤엄치지 않으랴. 다만 표면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하긴요. 차라리 하늘이 붕괴되고 땅이 꺼지도록 한바탕 폭우라도 퍼부었으면 좋겠습니다.”
버스는 속초저수지를 지나 소리고개를 넘어서더니 노천리부터는 홍천강지류인 덕지천을 따라 행선지인 공작골을 향해 달렸다. 시간도 이미 늦었고 비가 쏟아질 징조여서 등산객은 그들 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까 유리 씬 인간사회보다는 동물계에 더 흥취가 있다고 그러셨죠?”
“네. 거기엔 적어도 동족끼리의 전쟁은 없으니까요.”
“사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극치이고 사회적 이념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극치가 아닙니까. 사랑과 이념은 사랑하는 자와 같은 이념을 소유한 자 이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며 전쟁까지 불사하지요.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지만 이 양자는 본질상 타협할 수 없다는 걸 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그 시작부터 평등의 파괴를 전제로 하며 평등은 반대로 자유의 박탈을 그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권의 자유가 억제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는 자유를 주장한다고 하지만 빈부의 격차와 탐욕에 의한 범죄가 난무하지 않습니까. 자유와 평등의 공존과 조화를 시도한다고도 하지만 그건 망상일 뿐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념과 사회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왜 인간은 자연의 섭리대로 자연이 부여한 만큼에만 만족하고 다른 동물과 공존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지구를 독차지하고도 모자라 인제는 우주까지 독차지하려고 하잖아요. 인간의 탐욕은 문명, 발전이란 가면을 쓰고 끝도 없이 팽창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힘의 한계를 느끼기에 어떤 집단에 기대어 힘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은 과거에는 혈통에 의해 결속되고 형성되었지만 경제가 발달하면서부터 계급분화에 의해 이념이 집단을 결집하고 형성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의 이념을 지키고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겁니다.”
“저의 할아버지나 준호 씨의 할아버지께서도 적당히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모두 너무나 극한으로 치달은 것 같아요. 서로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인간의 상호살육은 동물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동물의 죽임은 자연의 섭리를 따른 것이지만 인간의 살육은 이념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한 복수잖아요. 인간의 복수심리가 가장 집약적으로 체현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 바로 전쟁이고요. 먹이를 얻기 위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시장점유를 위한 식민지쟁탈의 단순한 경제적 목적을 위한 전쟁이 이념전쟁으로 발전한거죠.”
유리 씨와 마주앉기만 하면 그들의 화제는 일상을 떠나 멀리 추상의 경지에로 비약하곤 했다. 그때에야 유리 씨도 이성간의 만남에서 오는 수줍음과 어색함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사고를 충분히 전개시켰다. 그들 두 사람은 누구도 현실이 아닌 논리와 추상의 세계에서, 그 때문에 현실이 한층 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는 사변의 세계에서 만나는 것을 싫증내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현실보다는 단순한, 주어진 섭리대로만 사는 동물의 세계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실은 동물에게는 없는,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정신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현실은 정신과 정신이 만나기 위한 한낱 환경이나 분위기를 제공하는 역할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었다.
버스가 목적지인 공작골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하늘에서는 빗방울을 실은 비바람이 불어치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낙비 같지만은 않았다. 하늘을 꽉 뒤덮은 시커먼 구름장들은 지어 무시무시한 공포까지 불러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거센 폭풍우를 퍼부어 하늘과 땅을 뒤집을 듯 흉흉한 기세다.
“그만 돌아갈까요?”
준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동요했다.
“이왕 내친걸음인데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잖아요. 한동안 퍼붓고 지나갈 건데요 뭐.”
유리는 인간의 지적능력을 그토록 믿고 있은 것일까? TV기상예보도 오보할 때가 있다는 걸 전혀 승인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녀는, 안개처럼 유유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그녀는 속으로 폭풍우가 도래하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두 시간 가량 걸으면 공작산 정상에 등반할 수 있어요.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우리 아버지가 이전에 등산할 때 입던 옷이에요.”
유리는 배낭 안에서 등산복과 운동화를 꺼냈다. 품이 좀 널렀지만 길이는 맞춤했다.
그녀는 이곳 등산길에 익숙한 듯 배낭을 메고 앞장섰다.
“전 한시도 자연을 떠나선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거의 주말마다 등산을 해요. 삭막한 인간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이곳에 오면 충분히 휴식할 수 있어요.”
준호는 유리가 준비해온 등산화를 신었다. 들메를 단단히 동여맨 뒤 물매가 뜬 공작계곡을 따라 등산을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그들 스스로 선택한 이 사랑의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건지며 준호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만 유리와의 이 순수한 인간적 만남이 윗세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에 의해 정당화 또는 비화悲話 되지는 말았으면 싶었다. 우리의 만남은 우리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만으로도 정당화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쓴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고 싶었다.
공토삼거리를 지나자 계곡은 한결 깊어지고 산세도 가팔라졌다. 산릉선들에는 희부연 석회암으로 구성된 바위와 절벽들이 들쑥날쑥 솟아나 산세가 험준하고 갈래갈래 뻗은 산줄기들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듯 그 풍경이 수려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공작산이라고 한다.
비를 피해 비탈길로 하산하는 등산객들은 간혹 보였으나 등산하는 사람은 그들 둘 외엔 보이지 않았다. 등산객들은 늦은 시간에 비가 쏟아지려는 데도 산을 오르는 두 사람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권고나 조언 같은 간섭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계곡은 흐린 하늘 때문에 더구나 어두컴컴했다. 고개를 쳐들고 보면 마치도 바다 밑에서 시커먼 배를 드러내고 지나가는 한 떼의 고래무리를 쳐다보는 기분이다. 대군단의 기갑부대가 이동하듯이 무시무시했다. 그런데도 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의 모습에 흠뻑 도취되어 있다.
“전 시커멓게 밀려드는 저 비구름들이나 폭풍우, 이 계곡을 덮은 어둠도 인간이 벌린 전쟁이나 이념의 갈등보다는 두렵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참으로 무서운 건 인간이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장들은 비바람을 앞세워 놓고 요란하게 시위만 벌릴 뿐 정작 폭풍우는 내리지 않고 잘 참아준다.
정상에 오르자 두 사람의 온몸은 땀에 젖어 물자루가 되었지만 성공의 희열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인젠 텐트를 치고 식사해요. 시장하시죠?”
“아니, 괜찮습니다.”
“다섯 시쯤 하산하면 버스가 있을 거예요.”
그녀의 배낭에서 준비해온 텐트를 꺼내어 평평한 공지를 골라 설치하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들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어찌나 굵고 살졌는지 숲을 때리며 툭툭 터지는 소리가 옹골차고도 박력 있어 큰비를 예감케 했다. 그 소리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서두릅시다.”
두 사람이 서둘러 텐트를 치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기세등등한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다.
성난 빗줄기가 텐트지붕을 박살낼 듯 내리퍼붓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것만 같이 요란했다.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도 말소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었고 비탈로는 어느새 빗물이 수천 줄기의 작은 내를 이루며 골짜기 아래로 쏴-쏴, 흘러내려간다. 준호는 하늘땅을 뒤번지는 그 거창한 기세에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다.
그런데도 유리는 장쾌하다는 둥, 호탕하다는 둥, 후련하다는 둥 찬탄을 연발하며 도리어 신바람이 나 한다. 자연 속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인간 속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완전히 자연을 즐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호흡을 함께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장관이에요. 전쟁이 아무리 요란하다 해도 자연의 거창함에는 비하지 못할 거예요. 준호 씨, 우리 식사해요. 자연의 이 장쾌한 취주악을 감상하면서 식사하는 건 정말 만나기 힘든 기회잖아요.”
유리는 배낭 안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술까지 휴대했다.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할 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지적이기도 했으며 섬세하고 주도면밀하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폭풍우가 쏟아지며 천둥번개가 치는 산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잔을 드니 그 분위기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모험적이기도 하고 자극적이기도 하여 그 기분을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전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전쟁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장쾌한 취주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준호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리 씨, 이런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전 준호 씨가 혹시 거절하실까봐……”
“천만에요. 제가 거절할 리가……”
남자의 미묘한 자존심이 준호의 뒷말을 삼키게 했다. 그녀가 베풀어준 건 우정인데 사랑으로 오판하여 웃음거리를 남길 수도 있다는 신중함이 흥분에 경고를 주었던 것이다.
“소나기라니 곧 그칠 거예요.”
그녀의 말 속에는 할아버지와 준호의 아버지를 암시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될 터이니 어른들을 걱정시킬 염려는 없다는 귀띔이다. 우리는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준호는 지금 이 순간 쏟아지는 폭우가 제발 그치지 말기를 맘속으로 빌고 있었다. 오늘의 폭우가 그와 유리의 투명하지 못한 관계를 윤곽과 모습을 가진 분명한 정분으로 키워주는 단비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리는 이 비가 소나기인 만큼 조만간 그칠 거라고 한다. 그녀는 이 순간을 지속하고 싶지 않을까? 연장하고 싶지만 할아버지의 반대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일까?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이 시간의 정지와 연장의 권리를 할아버지에게 양도하려는 걸까. 전쟁의 여독이 왜 우리 세대마저 그 후유증을 앓게 하는가. 과연 진옥이 하나의 죽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누군가를 또 죽이고야 만족할 것인가.
“이곳에는 당귀, 더덕, 오미자 같은 약재와 곰취, 산미나리 같은 산나물이 많은 고장이에요. 북쪽에 위치한 인제군은 예로부터 전국 제1의 꿀 생산지로 유명하지요. 설악산 쪽에는 옛날에 사슴과 곰이 많아 사향과 웅담 생산지이기도 했대요. 토사향이라 하여 본시 우리나라 사향을 으뜸으로 꼽았는데 지금은 곰이나 사슴이 멸종되어 사향과 웅담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고요.”
유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자신의 말소리가 자꾸만 묻혀버려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당차 보인다. 그녀는 자연 속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게다가 술기운까지 가세해 유리는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동물들이 무엇 때문에 죄다 사라졌겠어요. 전쟁은 반도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거예요. 문명은 난개발을 불러와 자연을 죽이고 있어요. 이제 겨우 살아남은 산토끼나 꿩마저도 인간의 총부리와 덫에 치어 죽어가고 있어요.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해놓으신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어요. 저는 이 산에 올라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는 동물들과 자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어긴 징벌을 언젠가는 꼭 받고야 말거예요.”
어느덧 유리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준호는 그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해졌다. 인간과 동물 또는 자연을 자연의 섭리라는 한 영역 속에 넣는 포괄적 비교가 가능한 것인지 어리둥절해졌다. 전쟁과 문명이 자연계와 동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고 심지어는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제공으로 된다는 한계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술 두 병을 다 마시고 식사도 끝났지만 폭우는 그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모른다.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골짜기 아래에서는 그 사이 불어난 골물이 소용돌이치며 굴러가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왔다.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날은 해가 저물어선지 하늘이 흐려선지 골짜기엔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 안은 플래시를 밝히지 않고는 물건을 식별하기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유리는 조급한 모양이다.
“비가 그치지 않고 그냥 올 건가 봐요. 기상예보엔 분명 지나가는 비라고 했는데……”
텐트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얼굴에 근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금시 원래의 온화하고 유연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실 텐데. 어쩌죠?”
안타까워 안절부절 했다. 밀려드는 어둠이 그녀를 불안하게 한 건지도 모른다. 이 산중에서, 여자랑 단 둘이서, 비좁은 텐트 안에서 밤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은 준호에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밤과 어둠을 이겨나가는 것보다는 이 밤과 어둠의 분위기에 흔들리는 자신을 이겨나가는 것이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밤의 산중노숙은 유리의 할아버지와 준호의 아버지에게도 심각한 문제일 것이고 그 심각성은 다시 그들의 만남에 강력한 저해 작용을 할 것이 틀림없다.
“비가 그치길 마냥 기다릴 순 없어요. 그냥 내려가요.”
유리는 할아버지를 강하게 의식한 듯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 골짜기에서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홍수를 보자 유리는 금방 자신의 결단이 경망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무뿌리를 뽑고 바윗돌을 굴리는 골물을 건넌다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두 사람은 침묵했다.
이 밤 때문에 감수해야 할 걱정이 그들을 고민하게 했다. 유리의 할아버지는 이 밤의 외박에 대해 꼬치꼬치 캐고들 것이며 손녀가 당신의 앙숙인 최덕구의 손자와 산 속에서 밤을 함께 지냈다는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하며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준호의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기만 하면 결코 아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행사할 수 있는, 부친으로서의 권위를 훨씬 능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당적인 입장에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간섭할지도 모른다.
이제 폭우는 지나간 듯싶었으나 비는 그치지 않고 장맛비처럼 쭈르륵 쭈르륵, 늘어지게 내린다.
두 사람은 저마다 텐트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준호 씬 이렇게 외진 곳에서 남녀 둘이서 지낸 적이 있으세요?”
느닷없이 유리가 가느다란 음성으로 침묵을 노크했다.
“네.”
준호는 진옥이를 회상하며 솔직히 대답했다. 유리 앞에서 진옥이에 대해 이실직고하는 데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물론 진옥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준호 씨와 함께 했던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알아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진옥이라고 한마을에 살았던 여자였습니다. 소꿉시절부터 친한 사이었지요. 고등학교 때부터 연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준호는 궐련 한 가치를 뽑아 입에 물었다.
유리는 또렷한 눈길로 준호의 표정을 조심스레 읽고 있었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억수로 쏟아졌습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이별한 날이었지요. 저와 갈라지지 않겠다고, 자기를 가지라고, 임신이라도 하면 부모님들이 결혼을 허락할 거라며……”
웬일인지 눈앞이 뽀얗게 흐려왔다.
“부모님들은 무슨 연유로 두 분의 연애를 반대하신 거죠?”
“부모님들끼리 척진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진옥의 할아버지가 우리 큰할아버지를 공산당을 도와주었다고 왜놈순사한테 고발했지요. 그 바람에 큰할아버지는 주재소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숨졌답니다. 그것에 앙숙을 품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원수 놈 가문의 손녀와 사귀는 걸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준호는 그때를 회상하며 비 내리는 텐트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래서요?”
“전 차마 그녀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너무나 불쌍하고 가여웠습니다. 그녀를 그처럼 비참하게 만든 양가부모님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창녀처럼 몸뚱이로밖에는 대항할 수 없는 불행한 그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요?”
유리는 자꾸만 무릎걸음을 치며 준호에게로 다가앉았다.
“결국 양가부모님들은 서로 멱살잡이를 하며 싸움을 했고 진옥이네 집에서는 그녀를 학교에서 중퇴시키고 멀리 친척집으로 피신시켰지요. 그녀는 거기서 핍박에 의해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요……”
준호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내려 갈 수가 없었다.
“진옥 씨가 정말 안 됐네요. 그러나 저 같으면 부모님이 아무리 핍박해도 다른 남자랑은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랑은 애정과 순수함만 구비되면 결합이 가능한 거잖아요. 무엇 때문에 양가부모님들 간의 갈등과 적의가 이별의 원인이 되는 거죠? 부모님세대의 정한은 그 세대에서 끝내야 되는 거잖아요.”
준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저와 유리 씨 앞에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봉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나 노골적인 암시가 실려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사실 화제의 수위는 이미 거기까지 도달해 있었다.
“준호 씨……”
유리는 얼굴에 빨간 고춧물이 들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녀의 뽀얀 목살까지 불그레한 물이 들어 있었다.
“전 이렇게 남자랑 단둘이서 밤을 보내는 게 처음이에요.”
남자라는 말로 그녀는 준호를 이성으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준호는 그 뜻을 자연스럽게 연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양가 어른들이 과거의 원한 때문에 우리가 사귀는 걸 반대하시니……”
“사랑만큼은 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거에요.”
“유리 씨, 고맙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텐트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교감은 가능해졌다.
비는 이튿날 아침에야 그쳤다.
그러나 불어난 골물은 금시 줄어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고 텐트로 나갔던 유리가 갑자기 놀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준호는 급히 텐트 안에서 달려 나갔다. 유리는 수많은 벌떼에 휩싸인 채 두 팔을 휘저어댔다.
준호는 급히 저고리를 벗어 그녀의 얼굴과 몸에 달라붙은 벌들을 쫓아버렸다.
“이 여석들이 감히 유리 씨한테 덤벼들다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 이놈들의 둥지를 찾아 박멸해 버리고 올 테니까요.”
준호는 벌써 탁구공만 하게 부어오른 그녀의 이마를 보고 아름다움을 훼손한 벌들의 만행에 분노했다.
“그만두세요. 전쟁을 반대하신다는 분이 복수를 하려고 전쟁을 불사하시겠다는 건가요.”
“어, 그런가요?”
준호는 주춤 멈춰 서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복수야말로 정의요 명분이요 하는 온갖 미사여구의 포장을 한, 전쟁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화근이다.
“벌과의 전쟁이라. 하하하. 복수나 전쟁은 그러고 보니 이처럼 자그마한 일로도 벌어지게 되는 거군요.”
“우리나라엔 인젠 인간을 위협하는 동물이라곤 겨우 벌, 뱀, 쥐와 같은 몇몇 종류뿐이에요. 호랑이나 곰 같은 건 보고서 죽자 해도 없고요. 그런데 그것마저 사람들은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하거든요. 사실 벌 같은 동물은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해하지도 않잖아요. 도리어 산청, 석청 등 보약으로 쓰이는 꿀을 제공하는 유용한 동물이지요. 인간의 탐욕은 동물과의 공존관계를 파괴하고 있어요. 인권을 빌미로 서슴없이 생명권을 침해하는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러워요. 생명권은 인권보다 더 귀중한거잖아요.”
이른바 인권은 인간을 위한 전쟁에 의해 유린되고 그 손실을 생명권의 약탈로 보상하려고 한다. 자유를 위한 전쟁은 자유를 유린하고 이념을 위한 전쟁은 이념을 유린하고 경제적 수탈을 위한 전쟁은 경제를 파괴하고…… 유린당한 모든 것은 원상복구를 위해 다시 전쟁을 불사하고…… 인간의 역사는 과연 이러한 악순환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가!
텐트를 철거하고 하산준비를 했다.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골짜기 건너편에 구조대가 나와 있었다. 산중에 등산객이라고는 그들 두 사람밖에 없는 줄로 알았더니 어디서 밤을 새웠는지 모를 십여 명의 등산객들이 구조대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조대원 한 명이 계곡물을 건너와 어깨에 메고 온 밧줄을 굵은 나무에 단단히 비끄러맸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밧줄을 잡고 물이 불어난 골짜기를 건너기 시작했다. 싯누런 흙탕물이 허리까지 잠기도록 불어나 있었다. 물살이 급한데다 강바닥 돌까지 미끄러워 자칫 발을 헛디뎠다간 홍수에 떠내려갈 위험이 있었음으로 구조대원들이 등산객들을 한 사람씩 부축하여 건네주었다.
준호는 유리를 부축하여 밧줄을 타고 조심스럽게 계곡을 건넜다. 그녀가 물살에 밀려 비틀거릴 때마다 어깨를 꼭 부여잡았다. 급한 물살 때문인지 그녀는 개울 중간쯤에 이르자 정신이 아찔해지며 상체를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습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어서요.”
유리는 어지럼증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준호의 등에 업혔다.
그러나 그들은 물 건너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건너편 기슭에서 구조대를 따라온 TV방송사의 뉴스취재단이 그 모든 장면들을 녹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계곡을 건너와 시름을 놓고서야 자신들의 모습이 TV카메라에 잡힌 사실을 알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이상 인제는 앞을 막아서는 고난을 함께 이겨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