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氷谷

장혜영

7장 그윽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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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쳤던 비가 반나절부터는 다시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대군단의 먹장구름은 철퇴했으나 하늘은 빈틈 하나 없이 찌뿌드드하게 흐려있었다.
뒤늦게야 방송에서는 호우주의보며 호우경보를 발령하며 부산을 떨었다.
삼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준호네는 계곡을 내려와 공작골에서 홍천행 버스를 탔다. 지난밤을 뜬 눈으로 꼬박 밝힌 두 사람은 무거운 피로에 지쳐있었다.
이제는 지금까지 불투명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연인관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탄생하는 첫 순간부터 사랑의 앞길에 온갖 가시덤불과 설산이 가로막아나서는 불행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두 사람을 불안하고 안타깝게 했다.
“할아버지께서 외박원인을 대라고 추궁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약을 발랐지만 말벌에게 쏘인 유리 이마의 상처는 아까보다 더 크게 부어있었다. 닥쳐올 불행 앞에서 그녀는 뜻밖에도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있다. 사랑을 확인한 그들은 이제부터 걸림돌이 되는 현실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유리의 이런 온화한 성품으로 간고한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성격이 활달한 지은이라면 모를까, 벌써 진옥이가 사랑의 시련 앞에서 무릎을 꿇고 투항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솔직히 준호 자신마저도 유리의 유순함을 보강해줄 만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제 인생이에요. 제가 주인이고 싶어요.”
꿈속에서 속삭이듯 유리의 음성은 가늘었다. 그러나 결연함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운명의 주인이 되자면 숙명과의 피나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죠.”
“어쨌든, 인간 세상에 사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잖아요. 이념의 전쟁, 사랑의 전쟁……전쟁을 통해 사랑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준호에게 그보다 더 고마운 말은 없었다. 거목은 폭풍우에 허리가 부러지지만 가는 버드나무는 휘어들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그것이 유연성의 장점이라면 강인한 지은이보다 유순한 유리가 도리어 시련을 거뜬하게 버텨낼지도 모른다.
유리는 피곤한 듯 자꾸만 머리를 차창에 기댄다. 그러다가도 버스가 덜컹거리면 차창에 이마를 짓찧고는 감았던 눈을 뜨곤 했다.
“제 어깨에 기대세요.”
“괜찮아요.”
그녀의 얼굴이 금시 발그레 익는다. 깊은 산 속에서 하룻밤을 단둘이 보내고서도, 골물을 건널 때 그의 등에 업히고서도 그녀는 준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만큼 순수하다.
“할아버지께서 이번 일을 아시면 취재는 여기서 포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고 한다. 준호는 유리의 사랑을 얻은 대신 책 집필을 위한 취재기회를 상실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책은 써야 한다. 그러나 그 책이 할아버지의 일방적 진술에 근거한 편견의 자료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글을 써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할아버지의 일방적 진술의 단점을 미봉할 수 있는 한종수의 진술을 얻어내야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는 건 인젠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나 다른 방법이 또 있을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제가 방법을 강구해 볼게요.……”
어느새 그녀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졸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던 그녀의 상체가 창 쪽으로 기우는 듯싶더니 버스가 덜컹하는 바람에 준호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의 머리가 준호의 어깨 위에 부드럽게 얹혀졌다. 싱그러운 냄새를 싣고 윤택이 흐르는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게 했다. 가슴이 설렜다. 어깨에 닿은 것이 그녀의 머리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깨끗한 믿음이라고 생각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살며시 열어준 그녀의 마음이 준호를 행복하게 했다.
난 다시는 유리 씨를 진옥이처럼 버리지 않을 거야.
준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사랑 앞에 어떤 시련과 난관이 들이닥쳐도 난 유리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부모의 뜻을 어기고 불효를 저질러야만, 신념을 배반하고 불충을 저질러야만 사랑을 지킬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것들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거야. 절대로 사랑하는 유리 씨를 진옥이처럼 불행한 여자로 만들지 않을 거야.
저도 모르게 정서가 격앙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 진옥이도 준호가 유리처럼 이렇게 보듬어주고 지켜주었더라면 그처럼 불행한 여인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뒤늦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랬고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유리 씨의 사랑을 받아 안은 행운과 감격 때문에도 눈물이 나왔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그만 잠이 깜박 들었었나 봐요.”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어난 유리는 준호의 어깨에 기대여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부끄러워 시선을 마주조차 못했다.
“타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주차장에서 나온 유리가 차를 준호 옆에 정차했다.
“할아버지께서 혹시 이번 사건으로 유리 씨를 집에 가두지나 않을까 걱정되네요.”
준호는 차에 타며 우려를 내비쳤다.
“몸은 가둘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야 가둘 수 있겠어요.”
안심하라는 듯 유리는 준호를 쳐다보며 생긋 웃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청초하고 순수하여 한 떨기의 장미 같아 보였다.
“아무튼 들어가면 연락주세요.”
“네. 1박 2일 동안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제가 할 말입니다.”
준호는 신림동에서 내렸다. 그는 유리의 차가 시야에서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자취방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오르는 준호의 마음은 기쁨으로 설렜다. 마치도 세상을 죄다 얻은 듯 한없이 뿌듯한 기분이었다.
난 유리 씰 사랑한다. 유리 씨도 날 사랑한다.
온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기쁨만큼 우려와 번뇌도 컸다. 우박처럼 쏟아져 내릴 아버지의 거센 반발은 물론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녀를 압박할 한종수의 간섭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취방은 텅 비어있었다. 지은의 방도 미닫이문이 반쯤 열린 채 빈 공간만 휑뎅그렁했다. 요즘은 뭘 하느라고 집에 오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건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밀렸던 졸음이 일시에 덮쳐들었다. 식사고 뭐고 우선 한잠 푹 자고 싶었다. 그는 샤워도 못하고 옷도 벗지 못한 채 뿌리 잘린 나무처럼 맥없이 침대 위에 쓰러져 금방 잠이 들었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전화벨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저녁 여덟시였다. 유리의 전화일 거라는 추측에 얼른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임자는 반갑지도 않은 아버지였다.
“이놈아! 뭘 하느라고 전화도 받지 않냐? 지금도 그 계집애랑 붙어 있냐?”
추상같은 호통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아 휴대폰을 귓가에서 멀리하며 준호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나 부친이라는 권위만 휘두를 줄 아는 아버지가 싫었다. 자애롭고 인자한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부친이기 전에 당 간부에 익숙했고 그래서 준호를 아들이라기보다는 일반 당원으로 대하고 교육하고 비판하고 훈계하고 그러실 줄밖에 몰랐다.
“그 계집애라니요?”
아버지는 벌써 내가 유리와 등산을 다녀온 정보를 입수한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사실은 그들 둘만 알고 있으며 아직 하루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럼 지은이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까?
“아직도 시치밀 뗄 작정이냐? 애빈 아직 죽지 않았어! 누군 누구야. 그 한종수라는 왜놈앞잡이의 손녀 말이지!”
“아니,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사실을……”
“TV에 다 방송되었다. 방금 전 뉴스에서 보았단 말이야. 네 등에 업힌 그 계집애가 그 앞잡이 놈의 손녀딸이지. 바른 대로 말해봐.”
“TV뉴스에 방송되었다고요?”
“말을 에두르지 말구 묻는 말에나 어서 대답해. 그 계집애가 맞지?”
“네.”
“뭐라고?! 너 그래 그 계집애와 같이 산 속에서 밤을 지냈단 말이냐?”
“네.”
피할 수 없는 대답이어서도 그랬고 또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불원간 아실 일이었다.
“너 이놈! 내가 전번에 네놈한테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애비 말을 귓등으로 들어. 한종수란 놈이 누군데. 네 큰할아버지를 죽인 원수 놈이야. 공산당을 반대하고 반일투사를 살해한 반동분자이구. 왜놈의 앞잡이란 말이야. 당원이란 놈이 그런 원수 놈의 손녀딸과 연애를 하다니. 그게 되기나 할 소리더냐. 내 당장 네놈한테로 달려 올라가 종아리라도 분질러놓고 싶다만……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날엔 네놈은 물론이고 이 아비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때의 일이 저희들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 까닭 없는 사랑이 어디 있다더냐. 안 된다. 백인이나 흑인여자라도 가능할 수 있으나 그놈의 손녀와는 절대로 안 돼.”
“아버지, 진옥의 일을 벌써 잊으셨나요? 진옥일 불행 속에 매장하고도 아직 만족되지 않냐고요. 진옥이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유리 씨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을 죄다 불행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걔네들의 애비, 할아비들이 다 우리 가문의 원수고 반동들이기 때문이지. 당원이란 놈이 그런 이치도 모르냐.”
“그건 부모님 세대의 원한이지 우리 세대의 원한은 아니잖아요.”
“부모가 없이 네놈들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더냐. 안 된다면 안 되는 줄로만 알거라. 다시 쉬쉬한 소문이 애비 귀에 들어오는 날이면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이 날 줄 알거라. 배울 만큼 배운 놈이니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겠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이제 그들의 사랑 앞에 최초의 시련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들의 사랑이 결코 부모에 대한 효도나 신념에 대한 지조에 배치背馳되지 않는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이념이나 체제에 의해 삭막해지는 세상에 평화와 안녕을 부르는 천사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인간 세상에 충만한 것이 사랑뿐이라면 이념이나 전쟁, 체제나 국가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래서 맑스의 공산주의 사회에도 국가와 이념이 없고 하느님의 에덴동산에도 이념이나 체제, 국가나 계급 같은 건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진정으로 효도하고 신념에 대한 지조를 지키는 길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랑의 범위가 혈육이나 친구에게만 그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이해이고 용서이다. 그래서 한계가 없다. 사랑의 영역이 원수까지도 포괄할 때 비로소 완벽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위대한 보편적 인간애의 중심에 남녀 이성의 사랑이 우뚝 서 있다. 모든 죄악은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에 의해 지속되는 만큼 그 연결고리를 내 수중에 장악된 사랑으로 단절시켜야 한다.
“이놈아, 꿈 깨! 너라면 네 아비를 죽인 놈을 사랑할 수 있겠냐?”
어디선가 아버지의 격한 음성이 들려왔다. 계급이 존재하는 한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맑스의 논리는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물질이 풍족하면 계급도 자연히 소멸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실정을 보아도 물질적 부를 소유한 국가지도계층의 탐욕과 비리는 가난한 서민보다 더 창궐하니 그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물질이 존재하는 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급적 갈등은 영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에 따른 투쟁도 영원할 것이 아닌가. 이제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성을 사수하는 마지막 보루로 간신히 잔류하고 있을 뿐이다. 이념의 갈등과 전쟁에 불구가 된 사랑을 누군가는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야만 그 나마의 잔명을 유지해나갈 것이다. 준호는 지금 피비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랑의 고지를 지키는 마지막 전사가 되고 싶었다.
“오빠!”
느닷없이 로비 쪽에서 들려오는 지은의 목소리에 준호는 잡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명랑함과 낭만을 가지고 세상을 밝게 해주는 아가씨다. 세상의 모든 기존질서는 일단 그녀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런 다음엔 그녀가 창조하는 새로운 질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빠, 집에 있었잖아. 보고 싶었어.”
“그래 요즘은 어딜 나다니느라 우리 지은의 얼굴마저 구경할 수 없는 거니?”
“그런 일이 있었어. 참 오빠, 내가 사람 하나 소개해줄게. 명철 씨, 꿔온 보릿자루처럼 거기 우두커니 버티고 섰지 말고 방으로 들어오세요.”
그제야 준호는 지은의 등 뒤에 웬 남자가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명철이라 합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집도 건장한 미남자가 허리를 굽실하며 인사를 올렸다.
“반갑습니다. 최준홉니다.”
“어서 신을 벗고 구들로 올라오세요. 여긴 제 방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오빠, 요즘 사귄 남자친구야.”
지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녀는 남자를 이성보다는 술이나 담배와 똑같은 심심풀이 대상으로 여겼다. 그보다 더 의미가 있다 해도 기껏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자취방은 모든 남자들을 향해 그 연령이나 성격이나 외모, 사람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돈만 주면 언제라도 활짝 열려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남자친구라고 정중하게 소개를 하는 바람에 준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우리 오빠예요. S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내 말은 그만하고 손님 소개나 해줘.”
“뭐랄까? 한마디로 탈북자야.”
“뭐라고? 탈북자!”
준호는 명철이 건네는 담배를 받다 말고 흠칫 놀랐다. 다시 한 번 명철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북한 사람이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푸지고 기름기가 돈다. 그리고 말씨나 행동까지도 서울식으로 세련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놀라. 북한 사람은 뭐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하나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북한 사람에 대해서는 한국인들보다 중국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난 북한 사람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벌써 나온 지 3년째라잖아. 완전히 서울사람 다된 거지. 그죠 명철 씨?”
지은은 사들고 온 술과 안주를 상에 차리며 부산을 떨었다. 그녀는 남자친구를 사귄 것이 무슨 재미있는 장난처럼 여겨지는 듯 조금도 진지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벌써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흥분으로 들떠 술상을 차리는 행동이 조급해졌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준호는 오래간만에 지은이가 독차지한 화제의 틈서리에 쐐기를 박았다.
“네, 미대 다닙니다.”
“아, 미술을 전공하시네요.”
“북한에 살 때부터 미술에 흥취가 있었는데 월남자가족이라고 학교추천도 못 받고 광산에서 일했대. 그러다가 결국 중국으로 탈북한거지.”
지은이가 대신 설명을 단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뜻을 이루게 되었다니 축하합니다.”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나 할아버지가 내가 이북남자와 사귀는 걸 알면 아마 야단하실 텐데 어쩌지? 오빤 어떻게 생각해?”
“나야 전적으로 지지하지. 어머니와 할아버지도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면 아마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정말.”
“그럼.”
“고마워. 난 누구보다 오빠가 지지해주니 안심돼. 자, 우리의 만남을 위해 건배.”
“건배!”
준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의 앞길에도 암담한 역경이 가로놓여 있다는 예감이 들어 마음이 언짢았다. 무엇 때문에 사랑은 반드시 시련과 고난의 가시덤불을 지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사랑을 수용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거친가. 천진한 지은인 자기들의 앞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을 알고나 있는지?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어떠한 역경도 헤쳐 나갈 것이라고 준호는 확신했다. 이번의 사랑이 그녀의 거칠고 타락한 삶을 교정하는 아름다운 충동이 되어 주기를 맘속으로 빌었다.

유리는 자가용을 차고에 주차시킨 후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어르신께서 몹시 화가 나셨으니 조심하세요. 지난밤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서 아가씨를 기다리셨어요. 벌써 세 끼나 물 한 모금 드시지 않았어요.”
정원으로 달려 나온 가정부 아줌마가 근심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무슨 벼락이라도 떨어질 까봐서인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평소 주인의 과격한 성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야단맞아야 할 유리는 그녀의 우려에 가벼운 미소로 응대했을 뿐 담담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호에 대한 연정을 느낀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유리의 가슴은 이상하게 설렜었다. 그런 감정은 그녀가 남자를 보고서 처음으로 느낀 것이었다. 그날 유리는 사랑은 정말이지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알았다. 준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비록 짧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뚜렷한 윤곽을 그리며 마음속에 생생한 애정의 꽃으로 피어났다.
자전거를 함께 타고 호수공원을 드라이브하던 일, 꽃피는 월파정의 벤치에 앉아 인생을 담론하던 일, 포장마차에서 향기로운 술잔을 기울이던 일, 육교계단 위에서 발목을 접질려 그의 품에 안겼던 일…… 모든 것은 하나의 세절도 빠짐없이 그녀의 가슴속에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밤이면 밤마다 수면을 앗아가고 그 자리를 가득 메우는 준호의 모습과 그가 던진 화제들, 꿈이면 꿈마다 나타나 그녀의 얼굴을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붉게 물들게 하는 준호의 모습은 자신이 사랑의 신 큐피드가 쏜 화살에 명중되었음을 실감케 해주었다. 그녀는 또한 여자의 특이한 육감으로 준호 씨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충고가 그녀를 동요시킨 것도 사실이다. 자식으로서 불효를 행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준호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로 하여금 이 감정이 단지 효도 하나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결국 그녀는 효도와 사랑 그 두 가지를 모두 선택했다. 효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효도는 효도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하리라.
두 사람 사이의 모호하던 관계가 1박 2일 간의 산행을 통해 사랑으로 정립된 지금 이 순간 유리의 마음은 여느 때 없이 고요했다. 정작 사랑을 만나고 보니 사랑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들의 사랑을 막아선다 해도 당당하게 맞설 신심이 생길만큼 사랑의 힘은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거실 가운데에 험상궂은 몰골을 한 장승처럼 턱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인자하기만 하던 어르신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고 먹장구름이 드리운 표정에는 배신감에서 오는 독기까지 번뜩였다.
유리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겁에 질려 잠시 얼굴색이 변했지만 금시 온화한 표정을 되찾았다. 무서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꼭 당해야 할 벼락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침묵만 지켰다.
안달이 난 가정부는 행주치마에 연신 손을 비비며 안절부절못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원수 놈의 손자가 금쪽같은 내 손녀를 넘보다니!”
한종수는 별안간 발로 타일바닥을 쿵 소리 나게 짓밟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도 유리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단단히 뿌린 채 요지부동했다.
“너 지난밤 준혼지 한 녀석과 지냈지? 바른 대로 말해봐.”
유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내가 벌써 다 알아보았다. 네가 함께 등산 간다던 지혜는 집에 있었어. 그러니 네가 누구하고 등산을 갔겠니? 아범이 입던 등산복도 없어졌고……”
유리는 대답 한마디 없이 그린 듯이 서 있었다.
“어디 말해봐라. 할아비가 피를 토하고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아니 세상에 남자가 없어서 그러냐. 대한민국에 흔해빠진 게 총각인데 하필이면 이 할아비와 원수를 진 최덕구의 손자와 사귀냐?”
한종수는 숨이 막히는 듯 잠시 가슴을 부둥켜안고 헐떡거렸다. 그의 얼굴이 금시 사색이 되었다.
“어르신, 왜 이러세요. 청심환이라도 드릴까요?”
가정부 아줌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허둥지둥했다.
그래도 유리는 선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떠한 말과 행동도 할아버지에게는 화만 더 자극할 것이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이 할아버지를 돕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종수는 가정부 아줌마가 가져다주는 청심환 한 알을 복용하고서야 안정을 찾았다. 노인은 잠시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어 있더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이 무너질까봐 거기 그냥 버티고 서 있는 게냐.”
소파에 다가와 앉으라는 허락이다. 언제나 유리는 할아버지가 화나셨을 때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종수는 당신 홀로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결국엔 제풀에 기운이 빠져 주저앉아버리곤 했다.
“못된 것! 한번 입을 다물면 그만이라니까. 제 에밀 먹고 게웠어.”
유리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할아버지에게 원수 최덕구의 손자가 아닌, 박사공부를 하는 학자이며 준수하면서도 지적인 준호 씨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준호 씨의 신분과 혈통만 보고 있을 뿐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무엇에 집착하면 그것에만 빠지고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것을 가리켜 편견이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편견에 빠지셨다. 과거만 보고 오늘은 볼 줄 모르신다. 바로 할아버지의 그 편견의 포로가 되기가 싫어서 유리는 아버지의 당부도 거스르며 할아버지의 참전회고록 대필을 거절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 피로 얼룩진 바통을 이어받아 복수와 전쟁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갈 수는 없었다. 평화와 사랑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
“오늘부터 이 할아비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줄 알거라. 할아비가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마라. 이건 네 자신이 자초한 화니라. 미국 계시는 네 아비와 어미에게도 이 사실을 다 알려드렸다. 다시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널 미국으로 데려가라고 일렀다.”
한종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유리는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곱창전골을 만들어 대접시킬 생각에서였다. 곱창은 할아버지가 좋아하므로 언제라도 대접시킬 수 있도록 수시로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었다.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아가씬 방에 올라가 휴식하세요.”
“괜찮아요. 할아버진 제가 만든 걸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피곤해 보여서……”
할아버지는 아직도 50년대의 기분 속에서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오늘날의 평화는 할아버지에게는 불안 이상의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준호 씨에 대한 손녀의 사랑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안다면, 정말로 손녀를 사랑하고 손녀가 잘되기를 바라서 손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긴다면 당연히 손녀의 선택을 지지해야 할 것이 아닌가. 모르긴 해도 한 세대의 사상과 이념은 그 세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을 포로나 노예로 만들어 세월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말 젊은 시절에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을까. 그래서 한 남자를 사랑하는 손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한종수는 음식그릇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손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면벽하고 돌아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태웠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준호의 할아버지 최덕구가 당신의 부친을 살해하던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를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리는 이미 할아버지의 마음속에서 허물어진 자신의 존재를 원상 복구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고 화해의 시도를 포기했다. 말없이 할아버지의 방에서 물러나와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왔다. 지치고 피로한 몸을 침대 위에 뉘였다. 샤워할 기운도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었다. 준호 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할아버지의 가슴에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할아버지를 대하기가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눈을 감자마자 기억의 오솔길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최준호였다.
폭풍우가 울부짖던 지난밤 공작산 영마루 텐트 속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일, 그의 등에 업혀 불어난 계곡의 급류를 도하하던 일, 버스에서 준호 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던 일들이 영화장면처럼 의식의 스크린에 생동한 화면을 펼쳤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지만 눈만 감으면 나타나는 모습, 눈만 뜨면 그리워지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조건도, 흥정도 없는 티 없이 깨끗한 이러한 마음이 어찌 비난의 대상이 되며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유리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울 속에도 타일 벽에도 욕조의 물속에도 준호의 모습은 없는 곳이 없었다. 빙그레 웃는, 지적이고 평온한 표정, 눈부신 순발력과 질서정연한 사유, 점잖고 예의바른 언행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성향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준호 씨!
그녀는 욕조 속에 몸을 잠근 채 가만히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26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한 감정이었다. 그이와 헤어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어지다니. 내 정신이 지금 정상인가. 집에 도착했을까. 씻고 잠자리에 들었을까. 아니면 컴퓨터에 마주앉아 「6.25 참전자실록」을 집필하고 있을까……
머릿속이 온통 준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하나봐!
그녀는 호-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18세의 어린 소녀도 아니고 내가 왜 이러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와 책을 손에 들었으나 한 글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그이를 만나고 싶어진다. 보고 싶다.
유리는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랑도 일종의 병인가 봐. 그리움의 병……
따르릉 따르릉,
거실 쪽에서 전화벨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가정부 아줌마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전화 받으세요. 미국에서 온 전화예요.”
미국에서라니?
유리는 방안을 거닐던 발걸음을 멈췄다. 미국에서 온 전화라면 엘레이에 계시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서 정말 아버지, 어머니께 고해바치신 거란 말인가.
주저주저하며 거실로 내려갔다. 가정부 아줌마가 넘겨주는 수화기가 각별히 무거운 느낌이다.
“여보세요.”
목소리도 저도 모르게 떨렸다. 너 당장 미국으로 나와, 라는 호령이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 전 같으면 그런 명령이 떨어져도 별로 두려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 하고만 갈라지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더러 미국으로 나오라는 건 사랑을 버리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리니?”
아버지의 음성이다. 언제나 자애롭기만 하신 분이다. 딸을 자식이 아니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셨다.
“아빠.”
“잘 지내냐?”
“네.”
이 모든 것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의 서곡에 불과했다.
“할아버지한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니? 아빠가 알면 안 되는 거니?”
“그게 저……”
“남자친구가 생겼어?”
“네.”
“저런. 우리 공주님이 남자친구가 생기다니 축하할만한 일이구나. 그런데 그 남자친구가 할아버지와 척진 가문의 자손이라는 말이 정말이냐.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며?”
“네.”
“응. 그랬구나. 그래 네 생각엔 어떠냐? 할아버진 한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나면 아빠더러 널 미국에 데려가라고 하시는구나.”
“전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준호 씬 훌륭한 분이에요. 박사 공부하는……”
“글쎄 할아버지한테 그런 조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한만 쌓였을 텐데.”
“할아버지 세대의 원한이 저희들의 사랑과 무슨 상관이지요.”
“그건 너희들의 사고방식일 뿐이야. 과거를 부정하는 건 실은 오늘을 부정하는 거란다.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시대의 가치관과 인생관은 다르잖니. 너 그러지 말고 개학이 아직 남았는데 기분도 전환할 겸 미국이나 여행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도 가질 수 있고.”
“전 준호 씨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유리는 저도 모르게 말꼬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두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지척에 살고 있으면서도, 대한민국의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갈라진 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준호 씨를 떠나 미국으로 가다니! 아빠, 그건 이 딸을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어요.
“아니 그 사람과 사귄지 얼마나 되는데 벌써 그 정도 감정이 깊어진 거냐?”
“첫눈에 정이 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설마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수화기에서는 아버지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 잠시 말이 없다. 남자를 보면 얼굴도 제대로 쳐들지 못하던, 수줍음을 잘 타던 딸애가 아빠한테까지 그토록 솔직하게 사랑의 감정을 토로하는데 놀란 모양이다.
“아빠라지만 네 연애문제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으니 모든 건 너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아무튼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할아버지를 노엽혔다간 당장 미국으로 추방될 터이니 말이다. 할아버진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훌륭한 분이시고 온 집안 식구들이 존경하는 분임을 명심해라. 그분은 누구보다 만년을 행복하게 보낼 자격이 있으신 분이야. 불행하게 해선 안 된다.”
“명심하겠어요.”
“그래 아빤 슬기로운 우리 딸이 스스로 잘 알아서 처신할거라 믿는다.”
“걱정 마세요, 아빠.”
“그럼 이만 끊자. 잘 있거라.”
“아빠, 사랑해요!”
“아빠도 널 사랑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다르다 싶었다. 미국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답게 젊은 세대의 마음을 널리 헤아려 주신다.
아버지와의 통화는 유리의 불안하고 암울하던 기분을 한결 전환시켰다.
이제는 잠을 청해도 될 것 같았다.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두 눈을 감고 밀린 졸음을 청했다.
그러나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졸음 아닌 준호 씨였다.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이젠 완전히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뿌리를 박은 것 같다.
준호 씨, 사랑해요!
앞에서는 쑥스러워 꺼내지 못했던 말을 가만히 소리 내어 보았다. 마음속에서 달콤한 꿀물이 녹아내렸다. 꽃이 활짝 피고 나비가 훨훨 날아들었다.

8장 안개 짙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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