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중국유학생「소정(素井)」문학상 수기 공모 수상작

[서울=동북아신문]시원한 가을 날씨에 예쁘게 물든 단풍으로 단장된 캠퍼스에서 걷다 보니 가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3년 전부터 이 캠퍼스에 오기를 갈망 하였었다. 그간 학업부담 때문에 바삐 보내다나니 일요일의 휴식도 자주 가지지 못하였지만, 지금 내가 바래오던 캠퍼스에서 가을과 뒤 늦은 인사라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바람이 단풍을 쓰다듬는 소리는 왜 이리도 경쾌한지, 높고 푸른 하늘은 왜 이리도 상큼한지, 눈부신 햇빛은 왜 이리도 포근한지. 이 모든 걸 미처 만끽하기도 전에 앞에서 오고 있는 버스가 보여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님 뵈러 가는 날이다.

전철역 승강장에 들어서니 방금 열차의 문이 닫혔다. 다음열차를 확인하려고 열차운행 게시판을 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신도림에 갈려면 여기서 타는 게 옳으냐고 물으셨다. 가끔 전철역에서 기다리다 보면 흔히 겪는 일이다. 반대방향에서 전철을 타야 된다고 알려드리고 나서 불편하게 이동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내가 금방 서울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지하철이 이렇게 발달 된 도시에서 살기는 처음이라 복잡한 지하철노선도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고 환승역에서 항상 어리둥절 해있었다. 금방 서울에 왔을 때에도 한 할머니께서 전철역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물으셨는데 그때는 나도 익숙하지 않은지라 핸드폰을 꺼내들고 노선도를 보면서 알려드린 기억이 난다.

앞 열차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바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지하철이라고 자신하는 서울메트로, 국제적인 도시인 서울의 격에 맞게 최고의 운행효율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다. 열차에서는 관악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많이 내렸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질서 있게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 올라 한국에 금방 왔을 때를 계속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사실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만 많이 들은지라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게다가 유학비자가 잘 나오지 않아 애를 쓰며 겨우 비자를 받다나니 한국에 대한 거부감은 더 컸었다. 다른 사람 못지않게 성실하게 서류를 준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납득이 될 만한 이유도 아닌 이유로 비자거절을 당하니 억울하였다.

정부정책상 그럴 법도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 개인으로서 언짢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2년이 넘도록 한국생활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 인상이 180도 바뀌었다고 할 것이다. 백문불여일견의 옛 속담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소한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중국에서 20년을 넘게 생활하고 큰 도시들이며 빈곤한 농촌이며 많이 다녔지만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질서의식, 건강의식, 서비스문화, 레저문화 등은 실로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열차는 사당역에 도착하였다. 4호선을 갈아타고 자리가 없어 문어귀에 섰다. 일요일인데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때의 나처럼 오늘도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은가 보다. 문어귀에 서 있다가 눈앞에 보이는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는 중국과는 달리 출산장려 정책을 실시하는 한국을 보면서 호기심이 들었다. 아이폰으로 관련 정책을 검색하여 보았다. 한국은 1960년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부터 1980년대의 성비균형 정책을 거쳐 2000년대에는 출산장려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관련 정책변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현상과 미래를 연계하여보게 되었다. 지금은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는 중국도 언젠가는 출산장려 정책을 실시할 날이 오지 않을지. 중국도 이미 산아제한 정책이 효과를 보아 인구증장이 크게 더디어 졌지만 인구노령화, 인구마이너스증장 등 위험은 멀지 않아 현실적인 문제로 될 것이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가져온 한국과 비슷하게 중국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런 측면에서는 먼저 발전한 한국의 경험이 중국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펼쳐질 큰 무대를 상상하니 한국 유학의 기회가 참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열차 연결 문이 열리더니 자그마한 손수레를 밀고 한 중년 아저씨가 들어섰다. 전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법 판매상”이다. 하지만 유머가 넘치는 멘트로 열심히 상품을 소개하시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워 보이셨다. “요즘 날씨 싸늘하시죠? 제가 오늘 여러분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라고 이렇게 기모 레깅스를 미리 들고 나왔습니다. 강호동도 입을 수 있는 쭈~욱, 쭈~욱 늘어나는 기모 레깅스 입니다.” 덜컹거리는 전동차소리와 레일의 끼익 소리만 들리던 전동차 내에서 아저씨의 소개를 열심히 듣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모두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자신의 세계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였다.

침묵이 흐르는 전동차 내에 아저씨의 재치 있는 말솜씨 때문에 인적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몇 가닥의 흰머리가 나신 아저씨의 눈빛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에서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너무 익숙한 눈빛이다. 가족을 떠나 이곳 한국에서 더 좋은 삶을 위해 고생하시는 나의 중국 친척 분들의 눈빛이다. 모두들 오늘도 피곤한 몸을 끌고 가족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고 계시겠지. 같은 서울에 있어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전차가 목적지인 수유역에 도착하였다. 마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삼각산 화계사로 올라가는 길로 다급히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한 달 만에 찾은 이 길도 그사이 가을빛에 물들어 유난히 아름다웠다.

“막내야~ 아들 왔어~”

화계사 주방에 들어서 어머니와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인사를 드리기 바쁘게 어머니를 불러주셨다. 봉사부장 아주머니께서 익숙한 얼굴로 반겨주며 왜 자주 다니지 않느냐고 물으시면서 좀 자주 다니라고 말씀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뵈러 자주 다니지 못하니 안쓰러우셨나 보다. 인심 좋으신 아주머니들이 반갑게 맞아 주는 사이 어머니께서 저쪽 문으로 들어오셨다. 하얀 모자에 앞치마를 두른 익숙한 모습이다. 감정표현에 낯선 못난 아들이라 어색한 웃음을 보이기만 하였다. 어머니께서도 나를 보며 웃으시면서 왜 옷을 이렇게 얇게 입고 왔냐고 물으신다. 어머니를 뵈니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께서는 점심준비 때문에 바쁘다면서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주시고는 일하러 나가셨다. 그나마 어쩌다 만나는 모자간의 만남도 시간여유가 길지 않다. 나는 오면서 슈퍼에서 샀던 물건들을 엄마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에 과일들은 있었으나 고기유의 음식들은 없었다. 절에서 일하시니 고기 드실 일이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기를 즐겨 드시던 어머니께서 고기를 드시지 못하니 맘에 걸렸었다. 그래서 오늘 냉동만두, 햄, 참치통조림 등 육류식품을 사온 것이다. 가끔 회식을 하면 드신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식습관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그간 잠이 부족했었는지 졸려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께서 점심 밥상을 들고 들어오셨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어머니께서는 역시나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고등학교 때는 이런 잔소리가 짜증났었지만 지금은 왜서인지 행복한 것 같다. 우리 가족 세 식구도 내가 대학을 가던 2005년에 한 점으로부터 세 점으로 흩어졌었다. 나는 외지에 있는 대학으로, 어머니께서는 한국으로, 아버지께서는 고향에 남으시어 계속 출근하셨다. 사실 고향에는 우리 가족처럼 “이산가족”으로 된 가정들이 아주 많다. 어찌 보면 글로벌화 된 오늘 날에는 당연한 추세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내가 대학을 마치고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기에 지금은 어머니와 가끔이라도 만날 수는 있다. 고향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가 걱정 된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어머니께서도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하셨다.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앞이마에 어느새 나와 버린 흰 머리가 가슴을 찡하게 했다. 일을 많이 하셔서 손가락도 굵어 지셨으며 터실터실 하였다. 얼굴에도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주름살이 많아지시는 것 같았다. 누워 계시는 어머니께 마사지를 해드리려고 엎드려 누우시게 했다.

마사지를 해드리면서 또 한 번 반복되는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대학을 마쳤으니 이젠 중국에 들어가셔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라고 몇 번이고 부탁을 했지만 듣지 않으신다. 대학 등록금만 마련하겠다고 하시더니 이젠 아들 장가보낼 돈도 버신단다. 한국에서 중국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을 수는 있지만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먹고 살기에는 넉넉하지만 이 외동아들에게 조금이나마 경제기초를 마련해주신다고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다. 절에서 식사를 담당하고 계시니 새벽 3시면 일어나야 되고 저녁 7시에야 일이 끝나신다. 하지만 환율도 예전보다 좋지 않아 중국 위안화로 환전하면 월급이 많이 적어진 상황이다. 이젠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 어머니, 아버지 건강에만 신경을 쓰시라고 말씀 드리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좀처럼 이기지 못해서 안타깝기만 한다.

월요일 수업 때문에 어머니 곁에 더 있지도 못하고 어머니께서 오후 3시경에 다시 저녁 준비하러 나가실 때 나도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어머니와 나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꿈을 가지고 있는 두 모자에게는 더없이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삼각산 화계사 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 속에 묻혀 전철역을 향했다. 가족동반 등산을 오신 분들이 여느 때보다 많은 것 같았다. 아마 가을구경을 오셨나 보다. 뭔가 야릇한 느낌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가족도 일요일의 여유를 가져야 할 텐데 말이다.

갑자기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더니 길에 곱게 놓인 단풍잎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마치 언젠가 고향에 불어온 “출국바람”이 대부분 가정을 흩트려 놓듯이 말이다. 내년 봄이면 단풍잎들도 다시 피어나고 화창한 봄날을 맞이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땅에서 단풍잎 하나를 주어 일기장에 끼워 넣었다. 소중한 단풍잎과 함께 봄을 갈망하는 오늘을 기억하고 싶었다. 봄이면 곧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한문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석사과정,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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