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자문위원 신길우 수필가

육필원고 가지고 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12월 10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영면

 

▲ 작고한 윤혜원 여사
[서울=동북아신문]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으로 안장할 예정이라 한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가 있고, 장남 철규 씨 등 2남 2녀를 두었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한 윤 여사는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월남하면서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 왔다.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이 실렸을 뿐인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과 1999년에『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서울로 지참해 온 자료들 덕택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면서 건축업에 종사하였다. 1970년에는 필리핀에 가서 사업을 하고,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았다.

또한 이들 부부는, 윤동주 시집을 읽고 감명을 받은 재미 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연변의 <중학생>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여 왔다.

▲ 윤혜원 오형범 부부
뒤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시상비를 부담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윤혜원 부부는 2003년에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묘소를 2개월여에 걸쳐 개수도 하였다.

▲ 윤동주 자필 '서시'
     

윤동주는 3남 1녀의 장남이었다. 2남 윤일주(1927~1985)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로 근무했는데,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발표를 않다가 아들 윤인석(수원대) 교수가 엮어 1987년에『민들레 피리』로 정음사에서 발간했다. 3남 윤광주(1933~1962)는 시인으로 현재 24편이 알려져 있다. 윤혜원(1923년생)은 마지막 혈육으로 평생을 오빠 윤동주를 위한 여러 활동을 남편과 함께하며 살았다.

윤혜원 여사는 “내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오형범 장로의 공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의 실천이었다.

2003년 묘소를 개수한 뒤부터, 2005년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가 국내외에 열린 이후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사실과 에피소드, 추억담과 소감 등을 종종 밝혀 왔다.

우리의 ‘아리랑’과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잘 불렀다는 윤동주, "오빠의 시 중에서「서시(序詩)」를 제일 좋아한다.“는 윤혜원 여사는,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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